(듀게 여러분, 먼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 건강하시고 소망하시는 일들 모두 이루어지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해요. 이 글은 2017년 12월 31일에 완성했는데요. 감기 때문에 글을 올리는 게 몇 일 늦었네요. 글이 워낙 길어서 읽으실 분들이 많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저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셨던 게 듀게분들이기에 한번 올려봅니다. 이 글에는 제가 지금까지 영화와 함께 한 삶에 대한 회한이 담겨있거든요.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에 관한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에요. 저처럼 한 영화와의 특별한 사연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댓글로 나눠주셔도 좋을 것 같네요.)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에 관한 미친 기록

이제 2017년도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이 해가 가기 전에 꼭 이 글을 써야만 했다. 이 글을 쓰지 않고서는 나는 결코 2017년을 떠나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이다. 이 글을 읽을 사람이 없거나 설사 있더라도 많지 않겠지만 나는 이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일기를 남긴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이 글에 내가 적을 미친 짓은 아마 내 주변에 그 어떤 사람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미친 짓이 궁금하다면 이 글은 그 미친 짓을 알게 하는 계기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었는지 여전히 미스테리이다. 나는 이 글을 솔직하게 쓸 생각이다. 이 글은 글 자체로 반성의 의미도 있고 내 인생을 돌아보며 느끼는 회한도 담기게 될 것 같다. 이 글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이라는 영화와 나의 관계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이다. 이제부터 시작해보기로 하겠다. 이 글이 언제 끝날지는 나도 아직 모른다. 일단 써보기로 하겠다. 이 글을 만족할 만큼 썼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2017년을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현기증>을 제대로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 98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정 불화와 신앙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비롯된 극심한 고통에 대한 회피의 수단이 필요했던 나에게 여러 계기로 인해 영화는 마치 운명처럼 다가왔고 97년부터 나는 영화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영국 영화잡지인 'Sight and Sound'의 역대 베스트 영화 10 명단에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을 보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현기증>에 대해 이름만 알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나는 영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전 세계의 모든 영화들을 봐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몇몇 영화 리스트들은 그런 나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그 리스트들에 있던 영화들을 나는 동대문에 있는 중고 비디오 가게에서 사모으기 시작했고 그 중에는 <현기증>도 들어있었다. 영화와 나의 관계란 참 절묘한 것이 있는 게 내가 본격적으로 영화들을 사모으기 시작한 그 시점에 국내에 처음으로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와 <피아니스트를 쏴라>,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등의 고전 명작들이 처음으로 비디오를 통해 소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수혜를 입은 사람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비디오로 <시민 케인>을 본 지 불과 2-3년 정도가 지나서 그 영화를 국내에서 필름으로 볼 수 있을 거라는 건 그 당시에도 상상을 못 했었다. 내가 영화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던 때는 그렇게 국내 영화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던 시기였다. 98년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집에서 <현기증>을 비디오로 보았다.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날 나는 집에 혼자 있었고 <현기증>이 끝나자마자 어머니가 귀가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기증>을 처음 봤을 때 쥬디가 갑자기 카메라를 바라보며 플래시백이 되면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 깜짝 놀랐고 영화의 마지막에 쥬디가 종탑에서 떨어져 죽었을 때 큰 충격을 받고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버나드 허만이 작곡한 음악이 정말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 영화를 정말 재미있게 봤다. 엔딩 장면의 충격으로 인해 그 당시에 봤던 팀 버튼의 <에드우드>,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 <시민 케인>, <네 멋대로 해라> 등과 함께 <현기증>은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영화 중의 한 편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현기증>에 완전히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영화를 비디오로 여러 번 돌려보고 그러지는 않았다. 보고 싶은 영화들이 너무 많아서 그 영화를 다시 볼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현기증>은 내 머리 속에서 계속 재생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가정 불화와 신앙에 대한 고민 때문에 <현기증>을 봤던 당시에 개인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고 그 고통으로 인해 사는 게 너무 힘들었으며 심지어 자주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동시에 막 본격적으로 사랑에 빠진 영화라는 대상 안에서 너무 행복해하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았다. 내가 볼 수 있는 좋은 영화들이 너무 많았으며 그 영화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감동을 받는 순간이 너무 많았다. 점점 영화에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항상 영화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면 공허함을 느끼고 냉정하고 죽을 것 같은 현실과 다시 마주해야 했다. 나는 현실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행복한 영화의 세상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다. 그런 삶을 반복하는 가운데 나는 <현기증>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스코티가 점점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매들린은 혹시 영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현기증>은 많은 평자들에 의해 '영화'에 관한 영화로 높은 평가를 받지만 나는 그들의 글을 학습해서 이런 결론에 이른 게 결코 아니었다. 그게 흔히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오해하는 부분이다. 내가 당시 영화에 대해 갖고 있는 복잡한 감정은 스코티와 너무도 닮아있었고 급기야 나는 내 자신이 스코티라고 믿기 시작했다. 스코티가 매들린에게 느끼는 온갖 감정들은 내가 영화를 보고 이미지들에 매혹되어 너무도 행복해하면서 동시에 한편으로 영화가 끝나고 내 눈 앞에서 사라질 때 느끼는 공허함 그리고 영화에서 빠져 나와 잔인한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괴로움 등으로 인해 내가 느끼는 영화에 대한 애증의 감정과 너무도 비슷했다. 스코티의 강박관념이나 광기도 나를 닮아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자 <현기증>은 나에게 더 대단한 영화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적어도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리얼한 작품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판타지인데 한편으로 위대한 리얼리즘 영화가 되어 버린 것이다. <히치콕 트뤼포>라는 다큐에서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현기증> 속에서의 스코티를 설명하면서 똑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친구에게 실제로 내가 스코티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말을 한 적도 있었고 나에 대해 설명할 때 자주 동원하게 되는 영화가 <현기증>이었다.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아이디로도 '스코티'를 선호하게 되었다. 내가 점점 스스로를 스코티와 동일시하게 됨에 따라 나에게 있어서 처음에는 인상적인 영화 중의 한 편 정도였던 <현기증>은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의 한 편으로 점점 자리잡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현기증>은 내가 97년 이래 본 수천편의 영화들 가운데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는 작품이다. <현기증>에는 기독교적 죄의식의 테마가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도 신앙적인 고민으로 괴로워하고 있던 나에게 이 영화는 중요한 작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스코티만큼 죄의식에 시달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쥬디가 결국 종탑에서 떨어져 죽을 때 인간적인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도 나의 신앙과 관련이 있었다. 이렇게 나는 <현기증>을 너무도 사랑하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틈날 때마다 자주 이 작품의 메타 영화로서의 위대함을 설파하며 강력히 추천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이 영화를 같이 본 적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나만큼 이 영화에 감탄하지는 않으셨었다. <현기증>을 비디오로 본 지 불과 몇 년만에 서울시네마테크 주최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렸던 알프레드 히치콕 회고전에서 나는 드디어 이 영화를 필름으로 보게 되었다. 아쉽게도 16 미리 프린트로 봐야 했지만 이 영화를 필름으로 본다는 사실에 너무 행복했다. 그때 이 영화를 세 번 상영했었는데 나는 세 번 전부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회고전때 사적으로 질문을 한 끝에 홍성남 평론가를 통해서 이 영화의 훌륭한 점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다시 몇 년이 흘렀고 이번에도 서울시네마테크 주최로 필름포럼에서 열렸던 알프레드 히치콕 회고전에서 이 영화를 드디어 35 미리 프린트로 볼 수 있었다. 그때의 감격이란 형언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때도 나는 이 영화를 주변 지인들에게 추천하면서 이 영화를 상영할 때마다 전부 보았다. 필름으로 영사된 스코티의 양복 색깔의 질감조차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머리 속으로 계속 떠올려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한 동안 이 영화는 내 마음 속에서 항상 최고의 영화 중의 한 편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나 표면적으로는 이 영화에 대한 열기는 좀 가라앉은 듯 보였다. 세월은 점점 흘러갔고 2008년에 어머니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 현실이 너무 괴로워서 영화 속에서 영원히 살고 현실을 잊고자 했던(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용기 없는 자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살아있는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던 것 같다. 마치 <양철북>의 주인공이 뛰어내려서 성장을 멈춰버렸던 것처럼) 나는 어느 순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외면했던 현실로 돌아와서 살아가야만 했다. 현실로 돌아오기 전의 상황과 비교를 하자면 가정불화나 신앙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된 상태였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영화 속에 빠져 살았던 나는 이제 현실에 적응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특히 인간 관계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고 인간 관계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다. 나는 나이가 이미 많이 들어 있었고 누구도 나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가므로 이것에 대해 누구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나이대마다 각자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알아갔어야 하는 것들을 경험할 시간이 10년 넘게 영화 속에서 영원히 살려고 했던 나에게는 없었던 거고 그렇게 해서 남들과 벌어진 간극을 도저히 채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되자 나는 내가 마치 문명 세계에 적응을 못 하는 늑대 소년이 된 것 같이 느꼈고 다시 문명 세계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즉 다시 영화의 세계로 영원히 빠져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그렇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나는 영화의 한계를 알고 있었고 그럼 남은 건 현실에서의 죽음뿐이었다. 수없이 자살 충동을 느꼈으나 두려워서 죽지는 못 했다. 죽을 수 없으니 다시 살아가야 했다. 나는 결코 현실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지 못 하고 영화 속에서 영원히 살려고 했던 원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야 했다. 나와 함께 영화를 봐왔던 지인들과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현명했다. 수많은 영화들을 나와 같이 보면서도 영화와 현실과의 적절한 균형감을 잃지 않아서였었는지 몰라도 세월이 흘러 그들 중 몇몇은 어느새 영화평론가가 되거나 영화감독이 되어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일들을 잘 하고 있었다. 오로지 나만 출발선상에 서 있는 것처럼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영화제에서 일을 했고 아주 가끔 매체에 글도 썼으나 97년에 코엔 형제의 <파고>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처음 가진 이래 당시에 미래를 떠올렸을 때의 나에 비해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 이럴 거였으면 애초에 내가 왜 그리 영화에 미쳐야 했었던가에 대해 후회가 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위에서도 말했듯이 애초에 나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영화에 매혹된 것이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첫 단추부터 잘못 낀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그런데 영화에 본격적으로 빠져 들었을 때 영화감독이나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사심은 없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는 결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세상은 그 이외에 나에게 다른 것도 요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현실과 직접 부딪히면서 괴로워하며 세상이 냉정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이다. 영화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으나 이제는 현실 부적응자로서 사는 게 괴로워서 자살하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 하고 영화로 다시 돌아가 그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그럴 수 있을 것 같이 부질없는 꿈을 꾸고 있는 나를 볼 때마다 나는 다시 <현기증>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볼 때 <현기증>은 환상에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남자를 그린 가장 강력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히치콕 스스로가 본인의 처지를 자조하고 있는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이때에 내가 <현기증>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단순히 이 영화를 좋아하는 감정이라기보다 내가 영화라는 대상과 맺고 있는 애증의 감정선상에서일 거라고 본다. 나보다 훨씬 어린 필자들이 쓴 영화에 대한 훌륭한 글들이나 내 주변 사람들이 만드는 영화들을 보면서 절망감을 느끼는 현실이지만 여전히 나는 영화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벗어날 방법을 모르겠다. 이제 와서 영화 말고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실제로 관심사가 기독교를 제외하면 영화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어떻게 됐든지 영화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경쟁자들은 너무 막강하고 나는 많이 부족하다. 이런 영화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가운데 내가 사랑하는 <현기증>을, 그 강력한 환상을 때려부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나를 집어삼키고 점점 환상의 힘은 강력해진다. 현실 속에서 영화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운데 2016년 1월에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애증은 더 깊어져만 갔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영화에 미쳐있었던 나는 두 분께 효도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 하고 두 분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솔직히 부모님께도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두 분이 말년에 나에게 보여주셨던 진심은 두 분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했고 뒤늦게 나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2016년 8월 25일에 켄트 존스의 <히치콕 트뤼포>라는 알프레드 히치콕에 관한 다큐가 개봉했고 개봉 기념으로 CGV에서 히치콕의 걸작들을 모아서 상영하는 기획전이 열렸다. 상영작 명단에 <현기증>이 포함되어 있었다. 위에 적은대로 이제 이 영화를 생각하면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게 사실이지만 여전히 너무 사랑하는 작품은 맞다가 보니 나는 뛸듯이 기뻤다. 스케쥴표를 살펴보니 <현기증>의 상영이 여러 번 잡혀 있었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번 기회에 이 영화와 끝장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가능한한 최대한 많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겠다고 결심했다. 이미 나는 <현기증>을 12번 정도 본 상태였다. 그런데 앞으로 히치콕 영화들을 상영할 기회가 있더라도 그 기획전만큼 여러번 <현기증>을 상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시네마테크에서 <현기증>을 상영할 경우 기껏해봤자 2-3회만 상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CGV 알프레드 히치콕 기획전에서 상영하는 <현기증>은 디지털 복원판이었는데 그때까지 나는 디지털 복원판으로는 이 영화를 보지 못한 상태였다. 얼마 안 있어 이 영화를 여러번 극장에서 다시 보기로 마음먹은 상태에 더 불을 붙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내가 쓴 나루세 미키오에 대한 글을 실어줬던 문화 잡지측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는데 내가 <현기증>에 대한 글을 한번 써보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현기증>을 처음 봤을 당시 이 영화는 영국 영화잡지인 'Sight and Sound' 역대 베스트 영화 10 명단의 중위권 정도에 머물고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 2012년에 발표된 같은 설문조사에서 이 영화는 드디어 <시민 케인>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내가 감히 1위까지 평가가 격상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한 것이다. 이미 수많은 평이 있고 수없이 연구가 된 이 영화에 대해서 솔직히 글을 잘 쓸 자신은 없었다. 그런데 영화에 대한 글을 쓸 기회가 주어진 상황에서 이번만큼은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한 복잡한 감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예전부터 이 영화와 관련된 실험적인 영상물이라도 만들어보고 싶었던 나이기에 이 영화에 대해 뭐라도 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 대한 글쓰기에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현기증>에 관한 글은 작년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어떤 이유로 인해 올해 봄호까지 미뤄졌고 미뤄진 시간만큼 나는 <현기증>을 보고 또 보면서 이 영화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부터 쓸 내용을 보면 아마 나보고 미쳤다고 할 것 같다. 그런데 나도 내가 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현재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나는 CGV 알프레드 히치콕 기획전을 시작으로 올해 서울아트시네마에서의 상영까지 총 12번 <현기증>을 관람했고 집에서 자막 없이 한번 더 보았다. 그렇게 13번을 몰아본 탓에 <현기증>은 내가 지금까지 가장 많이 본 영화가 되고 말았다. 총 25번이나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다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대략 작년 9월부터 이사를 가던 작년 11월 정도까지 귀가하면 <현기증> 블루레이 파일을 거의 매일 같이 틀어놓고 있었다. 심지어 자동 반복 기능으로 밤새도록 틀어놓고 있었다. 어쩔 때는 사운드를 없애거나 사운드를 켜놓거나 하면서 말이다. 영화를 안 보고 다른 걸 하고 있을 때에도 이 영화는 재생되고 있었다. 그래서 밤에 자고 아침에 눈을 뜨면 내 눈 앞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질 때가 많았다. 내가 아버지와 수년간 살았던 정든 집을 떠나면서 이사갈 짐을 쌓아놓은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봤던 유일한 영상도 <현기증>이다. 심지어 이사를 와서도 처음 봤던 영화가 <현기증>이다. 이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현기증> 디지털 복원판과 집에서 반복 재생해놓았던 디지털 복원판이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굳이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밤새도록 <현기증>을 반복 재생해놓는다고 해서 글이 더 잘 써질 거라고 믿는다면 그건 미신에 가까울 것이다. 사전을 외우기 위해 종이를 씹어먹는다거나 배우들이 대사를 외우기 위해 대본을 머리맡에 두고 자는 행동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런데 나는 그 당시 복잡한 감정을 품은 채 어떤 절박함 속에서 그 미친 짓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글쓰기와는 별도로 적어도 내가 왜 이렇게 이 영화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스스로 알고 싶어했으며 <현기증>의 인물들에게 빙의가 되어서라도 절절하게 그들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 역시 미친 짓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런 노력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난생 처음으로 딱 한번 이 영화를 보면서 스코티와 완전히 빙의가 되는 순간이 있었다.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인데 아마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스코티가 죽은 매들린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변한 쥬디와 마주 보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에서 욕실 문을 열고 매들린으로 변한 쥬디가 등장했을 때 나는 마치 내가 스코티가 된 것인냥 감동을 받아서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나를 보면서 나도 좀 놀랐다. 그 장면을 보면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도 났던 것 같다. 글을 잘 써보기 위해 이 영화를 재관람할때마다 이전과는 다른 어떤 것을 하나라도 더 발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당시에 내가 이 영화에 얼마나 미쳐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일도 실제로 있었다. 당시에 초록색을 볼 때면 곧바로 이 영화 속에서 초록색 옷에 초록색 차를 몰고 다니는 매들린이 떠올랐고 한번은 현실에서 한 여성을 다른 여성과 혼동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을지는 몰라도 내 딴에는 이 기간 동안 <현기증>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이런 미친 짓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오로지 <현기증> 하나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말이다. 인터넷에서 이 영화에 대한 글도 많이 찾아보았는데 내가 검색을 제대로 못 했었는지는 몰라도 국내 매체에는 이 영화에 대해 쓴 글이 거의 없었다. 학술지나 학위 논문까지 검색하지는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전부는 아니지만 도날드 스포토, 로빈 우드와 찰스 바가 쓴 <현기증>에 관한 글들도 읽었다. 유튜브에 올라온 <현기증> 분석 영상도 보았다. 주변 지인들의 <현기증>에 대한 의견들도 자세히 참고하였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이 영화에 대해 나만의 의견이 담긴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25번이나 이 영화를 본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이미 이 영화에 대한 많은 분석이 나와있는 상황에서 나만의 독창적인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위에 쓴 것처럼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나름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나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해 쓰겠다고 말을 해놓은 이상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고 고민 끝에 이 영화가 높게 평가받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메타 영화로서의 <현기증>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이 영화가 절실하게 와닿았던 게 바로 <현기증>이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해석이었으므로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아주 독창적인 글은 아니었으나 결국 내가 쓰기로 한 게 이 영화를 소개하는 차원의 글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고 봤을 때 메타 영화로서의 <현기증>으로의 접근은 적절한 것으로 보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쉽게나마 글이 완성되었고 내가 나의 실력의 부족함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이 정도면 나름 해피 엔딩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글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나에게는 슬픈 일이 생기고 말았다. 나는 올해 1월 초고를 거의 완성한 상황에서 왠지 불안한 마음에 지인 몇 명에게 글에 대한 모니터링을 부탁했는데 그 중에는 꽤 가깝게 지내던 아는 여동생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 글을 모니터링하는 과정에서 나와 연락을 끊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녀와는 상당히 오랜 기간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그녀는 한때 매체에 영화 글을 기고하기도 했었다. 그녀와는 영화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눴으며 그녀가 잘 되도록 내가 나름 기회를 준 적도 있었고 그녀도 항상 나를 응원해주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좋게 지속되었던 관계가 <현기증>에 관한 글 때문에 순식간에 깨지게 된 것이다. 애초에 그녀에게 모니터링을 부탁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녀는 <현기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작 그것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일이 터지고 나니 그녀에게 많이 미안하고 너무 후회가 되었다. 그녀와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었는데 그녀는 내가 쓴 글이 기존의 것의 재탕에 불과하고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현기증>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그녀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 영화에 대해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녀에게 내 의견을 밝히기 위한 장문의 문자를 보냈고 그녀는 <현기증>이 역겹다는 말까지 하면서 나를 차단해버렸다. 나는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그녀에게 사과 문자를 보냈으나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생각치도 않았던 상황이 벌어져서 너무 속상한 가운데 이런 일로 두텁다고 느꼈던 관계를 한 순간에 정리해버린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늘 그녀를 아꼈고 더 이상 영화 관련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그녀가 재기하기를 바래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을 가만히 되짚어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나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내가 그 여동생에게 했던 행동이 <현기증>에서 스코티가 쥬디에게 했던 행동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스코티가 쥬디에게 그의 의견을 강요하며 폭력을 행사했던 것처럼 현실에서의 나도 그 여동생에게 부지불식간에 내 의견을 강요하며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니 그녀에 대한 원망은 점차 사라지고 뼈아픈 후회만이 남게 되었다. 내가 <현기증>에 대한 글을 쓰고자 했던 건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 대해 정리를 하고 이 영화를 떠나보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보는데 마치 영화가 현실로 옮겨진 것만 같은 이 일이 터짐으로써 또 다시 이 영화는 나에게 깊이 각인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앞으로 그 여동생을 떠올릴 때면 자연스럽게 이 영화가 떠오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가 <현기증>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면 지금보다는 덜 속상했을 것이다. 이런 슬픈 일을 겪은 끝에 완성된 글은 올해 문화 잡지의 봄호에 실렸다. 나는 나루세 미키오에 관한 글이 실렸을 때와는 다르게 아무에게도 문화 잡지에 <현기증>에 관한 글이 실렸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내 나름대로 수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만족할 만한 글을 쓸 수 없었던 내 자신이 부끄럽고 매우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에게도 글이 실린 걸 말하지 않았던 건 아마도 그 여동생과의 사건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나는 또 다시 좌절을 맛봐야만 했다. 내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던 것도 어쩌면 그 여동생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코티가 쥬디를 잃었듯이 나도 그 여동생을 잃었다.

이제 이 글을 마칠 때가 된 것 같다. 내가 평소에 글을 길게 쓰는 편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글이 길어질 줄은 몰랐다. 이건 정말 글이라기보다 잊혀져 가는 기억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붙잡고자 하는 안간힘에 의한 미친 기록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이렇게 긴 글을 도대체 누가 읽겠는가. 독자는 포기해야 될 듯싶다. 그냥 이 글을 쓴 것에 의미를 두련다. <현기증>에 관한 글이 문화 잡지에 실린 뒤에도 극장에서 특별 상영 형식으로 <현기증>을 몇 번 더 상영했으나 나는 그때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았다. 한번은 보러 갈까 했다가 다른 일 때문에 결국 보지 않았다. 집에서도 아직 보지 않고 있다. 앞으로 내가 어떤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게 되더라도 <현기증>에 대한 글을 쓸 때처럼 밤새도록 글을 쓸 영화를 틀어놓고 있는다던가 극장에서 12번을 몰아본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이런 말은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비록 옳은 방식은 아니었을지라도 나처럼 한 영화를 이렇게 절절하게 사랑한 사람이 과연 존재했을까.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한번도 못 봤던 것 같다. 나만큼 영화와 애증의 관계로 점철된 사람도 과연 있을까. 아마도 드물 듯싶다. 나만큼 영화가 가지고 있는 환상의 힘이 인간을 거의 파멸의 지경으로 몰아갈 수 있음을 느껴본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마도 이런 테마로 영화가 만들어질 거라면 내가 직접 연출을 하던가 혹은 기꺼이 많은 조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상황들에 대해 하나도 의도한 바가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내 삶이 이렇게 흘러왔을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환상 속에서 살아왔다. 앞으로 영화쪽 일을 계속 할 수 있을지는 요원한 상황이고 당장 나는 생존의 문제에 봉착해있다. 정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아무런 꿈도 꾸지 말고 그냥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에 머물렸어야 되는 게 맞았던 것 같다. 앞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맞부딪혀야 한다. 그러려면 나는 내 주변에 있는 환상들을 깨부숴버려야 한다. <현기증>은 영원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중의 한 편으로 남겠지만 현실에서 더 이상 나는 스코티에 머물러있어서는 안된다. 물론 앞으로도 나는 영화를 볼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지속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현기증>의 마지막 장면에서 히치콕은 스코티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쥬디가 떨어진 종탑 밑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화를 끝맺고 있다. 그런데 사실 스코티가 환상에서 빠져 나오려면 그 종탑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스코티는 영원히 환상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스코티는 영화가 끝난 이후의 삶이 주어졌다면 종탑에서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나도 이제 살기 위해서는 종탑에서 과감히 뛰어내려야 한다. 2018년이 다가오고 있고 나에게는 결단의 순간이 남아있다. 

(쓰고 보니 별 내용도 없는 글을 길게만 쓴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든다. 이 글을 쓰다가 울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나는 홀가분하게 2017년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긴 글을 끝까지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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