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 길게 그림자를 끌며 붉은 노을이 깔린 지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를 보며, 저 기차에는 어떤 사람들이 타서 어디로 가고 있을까 궁금해했었어요. 지평선을 막 넘어서는 순간 기차는 둥실 저무는 태양을 향해 살짝 떠오르곤 했지요.
  • 파리의 뒷골목에서 만난 230살 정도 먹어보이는 집시 할머니는 제 손을 꼭 붙들고 눈을 빛내며 얘기해주었지요. "젊은이의 사주는 말 두마리, 돼지 한마리로 구성되어 있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먹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게야." 그 날, 집시 할머니의 몸 주위로 피어오르던 강렬한 보라색 오오라를 생각하면 지금도 배가 고픕니다.
  • 등산의 등자도 몰랐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를 따라서 시작했던 설악산 완주. 일주일간 쏟아지는 장마비를 맞으며 흐느적 걸어가며 겨우겨우 완주를 끝냈어요. 1차대전 당신 참호속 병사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완주가 끝나고 내려다보이던 남원 시내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왔지요.
  • 캐리비안의 각종 섬들을 점점이 건너는 유람선의 카지노에서 텍사스홀뎀이라는 포커 게임을 처음으로 배웠어요. 이제는 스포츠화되어 ESPN에서 중계도 한다는 포커 게임. 일곱장의 카드에서 다섯장을 골라 패를 만들고, 상대의 눈치를 보아 하이(높은 패로 승부), 로우(낮은 패로 승부)를 거는 방식의 전략적 사고를 요구하는 포커 게임이지요. 돈을 따지는 못했지만 그날의 진지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배가 고파요.
  • 티벳의 라사에서 총칭을 통해 광저우까지 연결되는 중국 횡단 열차는 극심한 배고픔이 무엇인지 맛보게 해주었어요. 차츰 강렬해져가는 공복감은 고산병에서 오는 두통마저 잊게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만두 한 점 사기에도 부족한 100위안짜리 동전 하나뿐.
  • 며칠간 굶어가며 아낀 돈으로 근사한 프랑스 요리를 먹기로 했어요. 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마르세이유의 식당에서 가져다준 메뉴에는 알아볼 수 없는 프랑스어만 난무할 뿐. 웨이터는 한국말을 모르고, 저는 프랑스말을 몰라요. 서로 얼굴을 멀뚱이 쳐다보다 웨이터가 문득 메뉴를 하나 하나 가리키며 동물 흉내를 내기 시작했어요. 푸득푸득 닭. 음매음매 소. 꿀꿀 돼지. 저는 꿀꿀 돼지를 시켰고, 잠시후 나온 접시에는 소복한 감자튀김 위에 소세지가 몇 점 올려져 있더군요. 이런걸 먹으려고 며칠을 굶은게 아닌데하는  뜨억스런 표정으로 웨이터를 돌아보자, 웨이터는 윙크를 하더니 토마토 케쳡을 주었습니다.

아무리 고생스러웠던 여행의 기억도, 약간의 시간만 지나도 완벽히 왜곡되어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잡는 것 같습니다. 그게 가벼운 역마살을 떨칠 수가 없는 이유인 것 같고요. 어떤 역마살, 어떤 추억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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