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는 영화와 함께......

2010.12.19 18:22

걍태공 조회 수:1428

영화는 걍태공이 대학 신입생일 때 과외를 했던 고3 여학생의 이름이에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나중에는 오빠로 바뀌었지만 사실 우리는 동갑이었어요. 제가 학교를 일 년 일찍 들어갔거든요. 태어날 때부터 낭중지추였던 태공의 주체할 수 없는 학구열을 외면할 수 없었던 어머니께서 일찌감치 저를 학교에 보내셨다고 친구들에게 얘기하지만 실은 만사가 귀찮으셨던 어머니께서 절 유치원에 보내는 대신 그냥 초등학교로 보내셨던거죠.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지만 피끓는 나이의 동갑내기 남녀가 일주일에 세번씩 두시간동안 좁은 방안에서 시간을 보내다보면 여러가지 사건이 생기게 됩니다. 네, 이쯤되면 짐작하셨겠지만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제 실화를 바탕으로 성역할을 바꾸고 이야기를 좀더 과장되게 풀어내서 만들어진 이야기일리는 없겠죠 (쿨럭 쿨럭).


영화는 우리가 동갑이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과외를 시작한지 석달여 남짓 지난 후, 선생님대신 오빠라 부르겠노라 영화가 선언했을 때, "영화야, 사실 나는 니 애비다 우리는 동갑."이라 고백할까 생각도 했지만, 안 그래도 위태롭게 느껴지던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더 위협할 수 없어 포기했지요. 수능 준비를 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틀에 한번 꼴로 빼놓지 않고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데 그런 일이 안 생기는게 이상한 것이었을까요. 여자라는 동물의 감정에 둔감하기 그지 없는 걍태공조차 영화의 태도가 차츰 변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거든요.


학교에서는 생리대를 수류탄처럼 투척하고 친구들에게 거침없이 이단옆차기를 날렸을지도 모르지만, 저와 함께 공부할 때 영화는 수줍고, 얌전하고 조금은 촌스런 뿔테안경이 잘 어울리게 귀여우면서 머리가 좀 나쁜 여학생이었습니다. 영화에게 제가 선생님에서 오빠로, 오빠에서 남자로 차츰 변해가는 동안 저도 좀 흔들렸어요. 어쩌면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 때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두고 있지 않았더라면요.


수능을 일주일 앞두고 영화는 시험을 잘 보면 크리스마스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영화가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는 점수를 얘기하고 그 점수를 달성하면 크리스마스를 같이 축하하겠노라 농담조로 얘기했어요. 영화는 굳은 얼굴로 입술만 깨물더군요. 결국 남은 일주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저녁을 사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영화와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영화의 수능 점수는 낮았던 기대치보다 더 낮았고, 저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실연을 했지요. 영화와의 약속은 까맣게 잊고, 술병이 난 상태로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침대에서 보냈습니다.


영화는 결국 재수를 결심하고, 다시 한번 과외를 해달라는 부탁을 그 부모님께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영화의 재수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제게도 있다고 느꼈고, 계속 과외를 한다면 좋은 영향보다는 나쁜 영향이 더 클 것 같았거든요. 영화의 소식은 건너건너 가끔씩 들었지만 그녀와 다시 보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게 벌썬 십년도 전의 일이로군요.


올해는 고3 영화대신 진짜 영화와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낼 생각입니다. 그동안 사다놓고 보지 못한 DVD만 집안에 열장이 넘게 굴러다니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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