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의 시대> <신을 위한 변론> <붓다> 등, 제가 즐겁게 읽은 책을 쓴 종교평론가 카렌 암스트롱의 자서전을 읽고 있습니다.

 

음, 정확히는 일요일날 거의 다 읽고 마지막 몇 챕터를 남겨둔 상황에서 감기에 걸려 골골 거리며 끝을 못 보고 있네요.

 

좋아하는 책을 쓴 사람이고, 뭔가 많은 고통 끝에 마음의 평화를 찾은 사람 같아서 자서전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아직 마지막 빛의 부분은 읽지 못해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건 맞겠지?) 음...책 내내 우울불안악몽경직 뭐 이런 톤의 이야기들이 줄줄줄줄.. 덕분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감기 덕인지 요새 불안불안 하다 싶더니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인지 과로 때문인지 하여간 제 상태도 매롱해졌습니다.

 

그래도 상당히 두꺼운 책을 하루 내내 손에 놓지도 않고 읽어 치운 것은 이 분 인생이 얼마나 흡입력이 있는가 하는 증거겠지요.

 

 아래는 카렌 암스트롱, 《마음의 진보, 교양인 2004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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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수녀원을 나온 것은 여러 사람 앞에서 참회를 하는 것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신을 찾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경지에 이르려면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고 위대한 영혼의 스승들이 누누이 강조했던 자아의 완전한 포기가 내게는 요원해 보였기 때문이다..

 

...[60년대 영국에서 '비틀즈'를 모른 채 파티에 갔던 사람으로써..] 처음 접하는 세상이 나한테 얼마나 낯설었는지를 털어놓고 나의 혼돈과 낙심을 드러내 사람들 앞에서 마음의 빗장을 열었더라면 훨씬 견디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도 미스 프랭클린이나 순교한 성녀처럼 누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면이 있었다. 나는 수녀원에서 나온 이후로 후유증을 앓기는 커녕 모든 것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사람들이 믿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감정의 토로 보다] 지적 관심을 보이는 쪽으로 나갔다..

 

(...)

 

한창 감수성이 민감한 나이에 나의 몸은 전혀 다른 리듬(1000년 전의 전통에 맞춘 수녀원 교육)에 길들어버렸고 좋든 싫든 이제는 그 리듬이 완전히 굳어버렸다.....이제 와서 보니 나는 정말로 즉은 것 같았다. .. 삶과 죽음의 경계구역으로 들어갔따가 소망했던 대로 환골탈태하여 나온 것이 아니라 두 세상의 안좋은 것들만 들고 나온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통과의례를 거친 부족의 소년처럼 용맹스럽고 두려움을 모르고 남들을 지키는데 나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목석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사랑도 못 하고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르고 덜 된 인간이 되어버렸다 나는. 머리끄에서 발끝까지 달라지고 넘치는 인간이 되기를 바랐는데 모자란 인간이 되어버렸다 나는. 강해진 것이 아니라 그냥 굳어버렸다 나는. "우리를 단련하기 위해" 고안된 [수도원 개혁 이전 수녀원에서 수련생들이 자아를 버리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냉정과 거듭되는 불친절은 나의 감정만 훼손시켜 그것을 질긴 스테이크 조각처럼 만들어버렸다. 나를 넘어서도록, 신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하게 만드는 자만심과 이기심을 우리가 버릴 수 있도록 설계된 훈련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나는 내 안에 갇혀서 어디로 달아나지도 못하고 남들에게 다가가지도 못하는 그런 꼬락서니가 되어 있었다....

 

(...생략...)

 

나는 정말로 나를 죽이기에는 너무 여렸다. 나는 사랑과 애정에 늘 목말라했고, 이 지독한 고행을 견디기에는 너무 약해서 울었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철없이 벌였다가 다쳤다.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 안달을 하다가 발이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너무 일찍 어려운 고난도 자세를 연습하는 바람에 평생 발을 절면서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된 어린 소녀처럼.

 

(...생략...)

 

사랑은 내 능력 밖이었다. 우정도 힘에 겨웠다. 하지만 적어도 공부가 있었다...아직 옥스퍼드에서 공부[영문학]를 썩 잘해내고 있었고 졸업도 우수한 성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하나의 도피처를 잃었으니, 공부에만 매달려서 또 다른 도피처를 만들어내면 그만이었다... 

 

(...생략...)

 

"...콜리지. 문학 비평은 절대로 읽지 마세요....자신이 생각하는 의미를 말해보도록. 남이 생각하는 의미 말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 나한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책이나 머리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나 혼자만 있으면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랬지만 이제는 시에도 무감각해졌다.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문학에도 둥감해진 것이다. 통과의례는 사람을 혼자 서게 만들지만 나의 통과의례는 나를 기대게 만들었다.......나만의 생각이 없다는 우울한 사실.....[그런] 교육을 집요하게 받았으니 당연한 일이다....우리는 신앙의 합리적 이유를 설명하는 변증론 수업을 한동안 듣고 있었다. 나는 "부활의 역사적 증거를 논하라"는 문제를 받고 에세이를 써야 했다. 나는 필요한 책들을 읽고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를 파악한 다음 부활절의 첫 일요일에 일어난 사건을 논하면서 예수가 무덤에서 일어난 것은 워털루 전쟁처럼 역사적으로 아무런 논란도, 문제도 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물론 그것은 엉터리였지만 변증론에서는 그게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잘했어요, 자매님. 아주 훌륭해요" 우리 공부를 지도하던 파리하고 고운 그레타 수녀가 에세이를 돌려주면서 나한테 미소지었다. "아주 잘된 글이에요."

 

"그렇지만 수녀님."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말이 있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요."

 

그레타 수녀는 한숨을 쉬더니, 머리에 꼭 맞는 모자 밑으로 손을 밀어넣고는 반갑지 않은 생각을 지워내기라도 하듯 이마를 쓱쓱 문질렀다. "아니지." 지친 듯이 말했다. "사실이 아니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런 말 하면 못써요."

 

.......내가 쓴 글은 진실이 아니었다. 신앙의 통찰은 합리적 분석이나 역사적 분석으로 요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란스럽고 두서없기는 했지만 이렇게 이른 단계에서 벌써 나는 그것을 알았고  그레타 수녀도 내가 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나이 든 수녀는 정신적으로 지치고 기가 꺾이고, 병아리 수녀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우리 두 사람은 일부러 빛을 외면하려 애쓰고, 그 장면을 지금 와서 다시 떠올려보면 그때 우리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던 것인지 궁금해진다.....나는 거짓말을 꾸며내고 있었다.

 

(...생략...)

 

나는 나 자신의 밖에 존재하는 초자연적 존재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나도 최선을 다했고 선배들도 나를 도우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렇지만 소용이 없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분은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것이고 이제 와서 내가 신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내 안에는 종교를 거부하는, 거룩한 것에 귀를 막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냥 보내자..... 주제넘은 영혼의 야심일랑 버리고 그냥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자. 너는 이제 세상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생략...)

 

그것은 냄새로 시작되었다. 향긋하면서도 유황기를 머금은 냄새. 상한 달걀... 수녀원에서 나는 여러 번 그 이상한 냄새를 맡았고 그 때마다 원인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세상이 산산조각나는 것을 보았다.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일어났고, 그리고는 끝이었다. 길고 긴 공허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런 졸도를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경험했고 그때마다 윗사람들은 아주 짜증스러워했다....."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해서 그런거야."....나는 어떻게 해야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윗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일부러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나도 정신을 잃는 것이 무서웠다. 또 올 것이 왔구나 싶은 느낌이 들면 끝까지 버텼다. 왜 자꾸 그런 일이 생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윗사람들이 내가 감정을 추스리지 못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심란할 때 졸도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 내가 병원을 가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절은 오직 하나. 히스테리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공주병에서 벗어나라는 노골적인 비아냥...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이런 해석을 받아들였다.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특별히 혼란스러운 데는 없다 하더라도 관심과 사랑과 정에 목말라하는 잠재 의식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신은 관심을 끌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나는 결론지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무의식은 이만저만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쓴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토록 갈망하는 따뜻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그저 짜증과 경멸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아차릴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대책 없이 기절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결국...나는 포기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갈등이 무의식 속에 줄곧 도사리고 있다가 기어이 겉으로 떠올라 나를 수녀원 밖으로 끌어내려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제 나는 세상으로 나온 몸이었다....자유를 누렸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학에 다니는 행운아였다...그런데 왜 싸움이 끝났다는 통보를 내 몸이 받지 못한 것 처럼 같은 증세가 거듭해서 일어났던 것일가? ...수녀원이 아니라 머튼 칼리지의 아득한 도서관에 앉아 있는데....[그리고 수업시간에 기절..]

 

...기절을 하는 바람에 좋은 일..제인과 가까워진 것이다 [기절했을 때 병원에 데려다 준 친구]...제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전축을 사기로...베토벤의 <황제 협주곡>...종교에서 내가 찾았던 경험이 바로 이것이구나...영혼이 기워지는 느낌...세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세상이 다시 부서졌다. 초져녁...에세이 비상..밤새도록 방마다 불이 환하게...이날따라 눈이 욱신거리고 피곤했다. 그 낮익은 악취가 어느새 나의 코를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마치 우주처럼 거대한 감자 빻는 기계가 나의 뇌를 갈고 뭉개서 거기서 스파게티처럼 길다란 감각의 다발을 뽑아내는 것 같았다. 멀리서 구슬픈 종소리가 들렸고 누군가가 내 옆에 서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곁눈질로 그의 얼굴까지 힐끗 볼 수 있었다. 눈이 휑한 늙은이의 얼굴이었다...한편으로는 아무도 없고 만져보려고 손을 뻗으면 내 손은 허공을 휘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과 유령을 연결시킬 수는 없었다. 유령이 워낙 실감나게 당당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막힐 듯한 공포에 순간적으로 짓눌리는 바람에 나는 찬찬히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내가 시인이라면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히에로니무스 보슈가 그림에서 전달하려던 것이 바로 이런 공포라고 확신한다. 마음을 달래주던 허깨비의 망사가 벗겨져 나가고 형체도 없고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고 속속들이 맹목적이고 하찮고 심술궂고 추한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T.S.] 엘리엇의 <재의 수요일>...'계단의 마귀'...침을 질질 흘리는 늙은이의 도저히 손볼 수가 없는 이빨 빠진 입처럼, 혹은 늙은 상어의 이빨 박힌 아가리처럼 축축하고 들쭉날쭉하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맨 밑바닥에 도사린, 말하자면 의식의 아랫배다.

 

 공포가 물러가고 세상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도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세상의 '실상'을 우리가 보통 때 하는 경험을 덮어주는 달콤한 장막이 벗겨져 나갔을 때 모습을 드러내는 그 텅 빈 두려움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수가 없다. 까발려진 현실은 영혼에 깊숙이 박혀 우리가 느끼고 보는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친다. ...말로 표현하다 보면 왜곡이.... 차라리 시로...콜리지...

 

인적 없는 길을

공포와 두려운에 떨며 걸어가는 사람처럼

한번 돌아보았기에

다시는 고개를 안 돌리고 걸어가는 사람처럼

무서운 악취가 뒤에서 바짝 쫒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

 

... 공포 경험은 그때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장을 보다...세상에 의미와 일관성을 주는 근본 법칙과의 연결 고리를 몽땅 잃어버린 듯한 경험을 했다. 마치 기괴한 만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초자연적 경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그저 몸이 안 좋았구나...스트레스....여겼다.내가 거부했던 세상이 나한테 덤벼들어 복수를 하는 바람에 나를 둘러싼 상황이 주기적으로 악몽처럼 낯설게 바뀌는 것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하지만..불안...의사를 찾아갔다.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서 사람을 바보라 만들어버리는 이 공포와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할까? 세상과 나는 물과 기름처럼 영원히 겉도는 사이라서 그 안에서 살아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의사는....'불안 발작'...쉽게 요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그러면서도]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상담을 한다..' ..의사가 대뜸 상투어 뒤로 몸을 숨긴 것은 그들이 나를 치료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고백...전문가가 필요...하지만 내 삶이 남에게 까발려진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움츠러 들었다. 누군가가 나의 삶을 임상적으로 진단하고 평가하는 것도 싫었고 내가 정신병자로 취급받는다는 것도 싫었다.

 

내가 옜날보다 사람을 더 피하고 내성적으로 변한 것은 그렇게 보이기 싫다는 방어 의식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다가 그런 증세가 나타날까 봐 겁이 났다. 나는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전에는 그냥 사교성이 부족..수줍음 많은 정도...이제는 나의 몸과 마음을 모두 믿을 수 없었다. ... 그래서 세상으로 더듬이를 막 내밀려고 하던 그 무렵에 나는 다시 더듬이를 말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무서운 경험은 나를 바꾸어놓았다. 겉으로 보면 유쾌하고 순수해 보이는 평범한 일상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인식은 나의 일거수 일투족에 영향을 미쳤다. ...나만이 아니었다...반 고흐....조지프 콘래드..<어둠의 속>.....학생들..대부분 명랑했고..기대와 희망...그렇지만 나는 이런 타고난 낙천주의를 나눠 가질 수 없었다..세상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막 같은 것이 자꾸 느껴졌다...사람들과 어울리기가 더 힘들었다...

 

이번에도 나를 살려준 것은 공부였다. 공부를 할 때는 그나마 정상이라는 느낌이 돌아왔다...

 

(...생략...)  [중간에 수녀원의 친했던 수녀 한명이 거식증으로 3x kg으로 말라가는데 수녀원에서는 병원에 보내지 않는 것에 분노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소개받은 정신과 의사....실력 좋기로 소문...한 명이 아니라 이 의사 저 의사에게 넘겨졌다...'수다 박사'라 하자....(이후 노인 유령에 대해 이야기 하자, 노인의 얼굴만 보이고 성기는 안 보이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고보니 수녀였구나. 부모님과의 관계를 살펴야한다. 공포발작은 어릴 때의 충격이나 상실감 같은 것의 발현일 것이다. 등등 그녀가 코웃음치는 분석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나는 기어이 효과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최대한 협력했다...하지만 수녀원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고독에 대해, 마지막 2,3년 동안 느꼈던 심적 갈등에 대해, 성직 생활에 대해서 내가 느꼈떤 모순된 감정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더라면...지혜롭게 처러리하는 길로 들어섰을지도..하지만 수다 박사는 그런 문제는 토론을 왜곡...삼천포로 빠지는 것이라 생각했고 진짜 문제를 호도하는 연막이라고 믿었다. "수녀원에서는 안전했잖아요... 위협을 안 느끼니까요. 안전하고 조용한 곳이지요. 악다구니를 쓰는 인간들이 들끓는 세상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 문제나 감정의 문제를 직시한 적이 없지요. 생을 보류했다고나 할까요. 말하자면 자궁으로 다시 기어 들어간 셈이지요."

 

나는...속으로 비웃었다....내가 현실 도피를 했다고 말하는 것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우리가 지닌 문제의 핵심은 결국 자아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수도 생활에서는 바로 이 자아를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마주 보아야 한다. 나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하는 자각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깥 세상에 훨씬 더 많은 법이다. 골치 아픈 주제는 바꿀 수 있고...전화...텔레비전...독주...수녀원에서는 하나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에 대해 쓰라린 자각을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기댈 데라고는 수다 박사밖에 없덨다. 그 사람마저 없다면 나는 평생을 이 소름 끼치는 공포의 발작과 함께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하루 아침에 기적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나 자신을 다그치면서 수다 박사에게 되돌아가곤 했다. 내가 정신의학에 대해서, 마음의 오묘한 세계에 대해서 도대체 뭘 안단 말이낙? 끝까지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언제 그랬던가 싶게 모든 게 제자리를 찾겠지. 그런데 그럴 때 마다 왠지 낯익은 논리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그것은 수녀원에서 내가 우려먹었던 논리였다. 그리고 그 논리의 결과는 보시는 대로였다.

 

(...생략...)

 

최우등졸업...

 

(...생략...)

 

...대학원생...삶은 달걀 한 알, 과자 두 조각, 멀건 요구르트 한 통...허리띠를 졸라맬 대로 졸라매어...의도적으로 시작한 일..거식증은 물론 아니었다...스스로 안 먹는 쪽을 택했다...돈을 모으고 싶었다. ... 나는 내 손으로 벌어서 먹고 살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미래는 암담해보이기만 했다. 나는 사회로 돌아와서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가슴이 죽어 있는데 어떻게 인생을 헤쳐 나갈 수 있겠는가?...사실 알뜰이 챙겨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별로 안 들었다. 머리와 가슴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졌는데 뭐가 좋다고 먹고 싶은 마음이 나겠는가. ...나는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나한테 참 잘한다, 잘 지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잘 지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걸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살이 빠지니까 제니퍼 같은 사람이 알아채기 시작했고...나는 비뚤어진 만족감을 느꼈다. 그렇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따. 나한테는 이런 심리가 있었구나. 나 좀 봐주세요, 도와주세요.

 

 

(...생략...)

 

...수다 박사가 말을 이었다. "(거식증에 걸려 입원한 전직 수녀 친구와) 비슷하잖아요. 방 안에 혼자 틀어박혀 지내죠, 불안 발작이 일어날까 봐 겁이 나서 외출도 잘 못하죠. 연애한 적도 없죠. 여자처럼 꾸미고 싶은 마음도 없죠, 그리고 일부러 가슴을 없애고 몸매를 없애고 월경도 없애고 결국에 가서는 중성이 되는 겁니다. 아직도 자기가 만든 수녀원 안에서 갖혀 살고 있어요. 두 사람 다 이런 억눌린 감정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겁니다."

 

"그럼 저더러 어쩌라는 건데요?" 나는 울먹였다. "저도 이러기 싫어요."

 

"그런 억눌린 감정의 뿌리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생략...)

 

일상이 심상치 않게 굴러간다...내 행동에 대한 장악력을 잃곤 했다. 아주 잠깐씩. ...건망증이 아니라 일종의 무의식 상태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커피 물을 끓이고 안전하게 길을 건널 만큼 정신이 말짱하면서도 막상 그걸 하는 동안은 기억을 못했다. .

 

"..[수다 박사는] 흔한 건망증이에요... 이 모든 증세는 연막..진짜 문제를 가리는 물 타기에요. 뭔가 극적이고 색다른 곳으로 숨으려는 건 그래야 자기가 중요하게 느껴지기 때문이거든요. ... 흥미로운 정신 상태를 계속 만들어내는 한은 막상 난관에서 벗어나면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달갑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을 미룰 수가 있거든요. 똑똑한 여학생일수록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해요. 미안하지만 그런 여학생 쌔고 쌨습니다... 지연 작전이에요. 회피하는 거에요....대단한 일도 아니었잖아요. 커피를 탄다든가 도서관에 간다든가.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다음에는 뭔가를 좀 보여줘요. 재미가 없잖아."

 

그래서 몇 주일이 지난 지난 1971년 가을 나는 뭔가를 보여주었다. 한꺼번에 삼킨 수면제를 게워내면서 병원에서 눈을 떴다. ....수다 박사가 불면증 때문에 처방해준 보라색 수면제를 한 움큼 삼킨 것은 기억이 안 난다. 이대로 끝장내야겠다고 결심을 했던 기억이 정말이지 없다. 의식을 하면서 또는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결국 도와달라는 호소였다. 그날 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얼마나 절박한 상태에 있는가를 똑똑히 알리고 싶었다.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무서움에 떨고 있는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문제는 자살 기도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도와 달라는 절규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런 호소를 못 들은 척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도달할 때가 자주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않는 쪽으로 방침을 정하기도 한다. 한두 번 받아주다 보면 자제를 못하고 자꾸만 그런 식으로 자기를 과시하는 못된 버릇이 들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어디 아픈데가 있으면 케케묵은 상징주의로 포장을 할 것이 아니라 아프다고 대놓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 딴에는 내가 느끼는 공포와 당혹감을 시시콜콜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날 아침 침대에 누워 있노라니...이런 반 수면 상태에서 다음에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착찹했고 걱정도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내 마음은 조금은 가라앉았다. 늘 어수선하기만 하던 마음이 지금은 차분했다. 별 소득은 없었지만 난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동안 느낀 공포와 절망을 다 표현했으니까 여햔은 없었다. 끝까지 가서 희망을 접으니까 묘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수다 박사는...전부 개인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뭔가 보여 달랬더니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가 자기한테 앙갚음을 했다는 것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상상이었고...그 사람은 중요한 사람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우울증에 대해 좀 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왜 자살충동을 느끼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충동을 느낀 적이 없거든요. ... 그놈의 약을 먹는 줄도 몰랐어요. 다른 때도 그랬어요...얼마나 저기압인지 그동안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지겹도록 말했잖아요..."

 

"그게 또 다른 회피 작전이라는 생각은 안 드나요?"

 

 

(...생략...)

 

"서러워하기 보다는 차라리 남은 것에서 기운을 얻으련다."

 

(정신과 입원 후 .. 퇴원, 재 입원 반복..) (의사 왈) "병원은 배운 사람한테는 있을 데가 못 되지요."  그 뒤로는 발길을 딱 끊었다.. 불안 발작은 평생 끼고 살아야 하겠지만 적어도 정신 병동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의사 말따나 나한테는 재능이 있었다. 나는 똑똑했다.  ...이 막다른  골목에서 내가 빠져 나오는 데 앞으로 요긴하게 쓰일 강력한 도구...

 

(...생략...)

 

 

이제는 도와 달라고 (무의식적으로) 울지 않았다. 기대를 접었으니까... 대학원 3년...정신과 상담도 받지 않았다....1960~70년 초..난공불락처럼 보였던 법이 심각한 도전...1970년 11월 동성애자해방전선이 영국에서 처음으로 시위....나를 속박했던 전체가 결코 철옹성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언젠가 나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반전 가요를 부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일단 자신감을 되찾으니까 앞날도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생략...)

 

 

엘리엇의 <재의 수요일> ...워즈워스가 쓴 '영생을 예깜하는 시'를 엘리엇이 자기 식으로 해석한 시...영혼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깨우침을 얻는 경험을 시인은 나선 계단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냈다고 갖오...

 

다시는 되돌아가리라 바라지 못하리니

바라지 못하리니

되돌아가리라 바라지 못하리니

이 사람의 재주와 저 사람의 그릇을 탐내면서

이제는 그런 데 아등바등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으리

몸에 밴 권세가 힘을 잃었다고

서러워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생략...)

 

시인은 거듭해서 "되돌아가지 못하리니" 하면서도 실은 돌아가고, 그러면서 자꾸만 새로운 통찰을 하면서 천천히 올라간다. 시인은 희망을 버렸다고 말하지만 나는 묘하게도 기운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나도 내 나름대로는 희망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엘리엇은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나는 되돌아가지 못할 운명이었다. 나와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여기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아야 할 입장이었다.내가 포기한 것은 또 있었다. 아니, 내가 포기했다기보다는 그쪽에서 나를 포기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앨리엇이 말하는 "긍정하던 날의 불안한 환희"를 이제는 "다시는 알게 되리라 바라지 못"할 것만 같았다. 세상을 아주 밝게만 바라보았던 건강한 마음을 나는 잃은 지 오래였다. 세상을 긍정하는 눈이 얼마나 '불안'하고 약한지를 나는 실제로 깨달았다. 깨어 있는 일상 의식으 바로 밑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공포를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설령 두 번 다시 공포 발작을 경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번 내 눈으로 본 것은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신도 가버리고 없었다. 그 "거룩한 얼굴"은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하건데) 그것은 신이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불멸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던 희망은 사그라들었고 우리하네는 오직 현재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깨달았다. "시간은 늘 시간"이고 자리는 "늘 자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워즈워스가 말하는 "영광과 꿈"은 시들었지만 내가 기운을 얻을 수 있는 힘은 "남은 것"에 있었다.

 

다시 되돌아가리라 바라지 못하리니

그래서 즐겁다. 즐거워할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니깐

 

(...생략...)

 

내가 특히 충격을 받은 것은 "나는 있는 대로 세상을 보는 것이 좋"다는 구절이었다..... 내 마음이 진리로 손을 뻗으려고 할 때마다 나는 일부러 거짓말을 하면서 마음을 내리눌렀다. 결국 내 마음은 뒤틀리고 무능력하게 되었다. ..이것은 과히 인기 있는 전술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불행한 일이나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사람들이 나서서 덮어놓고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을 나는 많이 보았다. 누가 보아도 그런 낙관론이 눈앞의 현실과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조차도. ..괜찮은 생존 전략일 수는 있었다...그렇지만....아무리 현실이 구질구질하더라도 그것을 직시하는 버릇을 들여야만 거기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망상에 대한 나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내 마음이 옜날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나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었다....

 

(...생략...)

 

그런데 마음을 버리고 운명에 순응하는 척하기는 했지만 가만히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삶이 나를 버리고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들었다. 모드들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혼자 뒤에 남은 듯했다.

 

(...생략...) (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얻고..)

 

이제 작품을 읽으면 무언가 반응이 왔다. .....다른 사람이 쓴 비평서를 먼저 보아야 자극을 얻을 때도 있었지만 일간 그렇게 해서 시동이 걸리면 나 혼자서 앞으로 밀고 나갈 수 있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 생각에 내 생각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생략...) (그런 와중 수녀원 생활은 타인에게는 농담따먹기 대상...) 종교라면 이가 갈렸지만 그래도 수녀들은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못 다 이룬 이상에 대한 애잔함과 아쉬움도 아직은 남아 있었다. 나를 성직으로 이끌었던 고매한 이상과 희망과 대책 없는 낙천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소녀 시절의 나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

 

(...생략...)

 

논문...지도교수는 좋아했고..다른 교수 두 사람도 좋게 말해주었다. 또 다른 교수 하나는 아주 무례한 반응을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지도교수는 그 사람을 문학 작품을 언어학적으로 꼼꼼히 분석한 나의 시도를 인정하지 않을 뿐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런 편견을 가진 사람이므로 논문 심사는 맡기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희망적이었다. 아직도 헛것이 보이고 무서운 발작에 시달리긴 했지만 논문을 끝낼 수 있었다는 것은 내 건강에 큰 이상이 없다는 증거였다. 논문은 자리를 잡고 경력을 쌓는 데 반드시 필요한 보증수표였다. 논문만 통과되면 한때는 영원히 불가능해 보였지만 이제 나도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생략...)

 

봉투를 뜯자마자 나는 글렀다는 것을 알았다. 옥스퍼드 대학의 쌀쌀맞은 공식 편지는 나의 학자 생활이 끝났다는 것을 통보했다. 내 논문에 적대적이었던 교수가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것이다. 주변인들...실망하기에는 이르다고 나한테 말해주었다. ....그것은 현실을 진단하는 발언이 아니라 현실을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아무런 일도 없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안이 없으니까.

 

 

(...생략...)

 

아니나 다를까 구술시험은 비참하게 끝났다.....불합격했다는 통보를 편지로....

 

(...생략...)

 

제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나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겠지만...나에게 일어난 일...운명으로 냉정히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충격도 받지 않았다. ... 예전부터 나를 한심하게 본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얼마나 철이 없었으면 나도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던 말인가. 허울 좋은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나는 그릇이 아니었다. 진작에 깨달았어야 옳았다. 이렇게 망가진 것은 일종의 폭로였다. ...

 

또 내가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신경 과민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다.. 3년 동안 수련자로 지내는 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없었다. 잘못했다고, 사고를 냈다고 얼이 다 빠질 정도로 야단을 맞으면 눈물이 앞을 가렸고, 그러면 운다고 또 혼났다. 그럼 울음이 더 나왔다. 악순환이었다.....결국 감정에서 거리를 두는 요령을 배웠고 나중에는 아예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내가 받았던 훈련은 아직도 그렇게 남아서 나를 망가뜨렸고 나는 아직도 그것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아직도 나는 감정 처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나중에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 내가 논문에 대해 안 좋은 소식을 전하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미소를 입가에 흘려서 섬뜩한 기분이 들더란다. "나 떨어졌대." 난 차분히 말했다. "그렇대."

 

(...생략...) (카렌 암스트롱이 박사학위에 떨어진 것 때문에 학교 교수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고 논란의 소지가 많은 심사라는 항의가 오고가고..하지만 결국 학교의 전통을 위해 한번 내린 결정은 번복하지 않기로 결론.)

 

그것으로 끝이었다.

 

(...생략...)

 

태연하게 굴려고 했지만 최후 통첩 충격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테니슨" "박사" "논문" 같은 단어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되기까지는 다시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 교수한테 원한도 없었다. 난리가 벌어지긴 했지만 어쩌면 그 사람 판단이 맞는지도 모른다...능력이 안된다는 것을 그 사람이 까발린 것이다. 수녀로서도 실패했고 이제는 학자로서도 실패했다. 머리도 정상이 아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생략...)

 

우울..두려운...그렇다고 신세 한탄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가장 안 좋은 일이 일어났으니 더는 크게 잃을 것도 없었다......(중간에 유태교 예배에 참석하면서) 내가 아는 종교만이 종교의 다가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의 씨앗이었다.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드러내는 것을 껄끄럽게 여기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희망을 버리니까 한편으로는 속박에서 풀려나는 느낌.. 책 읽기가 다시 즐거워졌다...활자에서 다시 희열을 맞보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나한테는 은총이요 값진 선물이었다. ..통찰을 얻고 싶다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항상 무언가를 '건지려고' 들면 다시 태어날 수가 없다.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이용해서 이력을 꾸미거나 평판을 높이려는 생각을 포기하니까 마음의 빗장이 열리면서 글이 쏙쏙 들어왔다.단어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게 되고 작가의 혜안도 느껴졌다. 그야말로 엑스타시스,...나를 넘어서는 그런 느낌을 맛보았다.

 

1976년 2월..구술 시험 1년 뒤..값진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더 깊은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는 줄...

 

(...생략...)

 

검표대를 막 통과한 직후 그것이 나를 덮쳤다. 냄새, 시큼한 맛, 번쩍거리는 빛과 공포. 이번에는 정도가 심했다. 무언가를 피하려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방향을  튼 기억이 어렴풋하게 났다. 뭘 피하려 했던 것일까? 나는 난간을 움켜잡았다. 생각이 산산조각 나고 역사의 백열등이 얼마나 눈부시던지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는 달라졌다. 불현듯, 마침내, 파편처럼 나뒹굴었던 조각들이 의미있는 전체로 짜맞추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수한 기쁨, 충조고가 평화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 것이다. 세상이 갑자기 달라 보이면서, 너무나 자명하지만 좀처럼 표현이 안 되는 그 궁극의 의미가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신이로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다시 그 낯익은 컴컴한 터널로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두어 시간 뒤에 병원에서 깨어나보니 당직 의사가 나더러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수녀가 되려다가 중도 하차하고 교수직에서도 미끄러지고 정신이 늘 불안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간질'까지 얻게 되다니...

 

(...생략...)

 

'간질 맞나요?'

 

'....그렇네요..뇌파를 보니까 ... 분명히 이상한 데가 있어요. 심각한 문제는 아니구요..조기 치료 하면 완치도 가능해요. 요즘은 약도 많고....'

 

'간질이 왜 생겼을까요?'

 

'모르죠. 뇌에 손상... 머리를 어디 세게 부딪쳤거나 태어날 때 뇌를 다쳤을 가능서잉 있습니다만..'

 

....나중에 엄마한테 들으니 나를 낳을 때 아주 난산이었다는 것이다....나는 중요 순간에 잠깐잠깐 산소 공급을 받지 못해서 가벼운 뇌 손상을 입은게 아닌가 깊었다. ....

 

'한두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뇌의 어느 부위에 손상이 갔도 어느 종류의 간질인지 좀 더 확실히 밝히고 싶어서요....가끔 어지러울 때가 있나요? 정신을 잃는다던가 하는 뭐 그런?'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런 증세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열여덟 살 때 처음 그랬다...십대 후반에 자주 나타납니다. 호르면이 변하니까요. 그런데도 훌륭하신 수녀님들께서는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라고 권하지 않으셨나요?

 

'네 그냥 정서불안이라고만 생각했지요.'

 

울프 박사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이렇게 다들 똑똑한지 모르겠어. 정신과 의사가 따로 없어! ... 요즘은 어디 몸이 아프다 하면 하나같이 마음에서 생긴 병이라고 말하는 게 아주 유행이 되어버렸어. 간질은 정서적으로 심한 외상을 입었을 때의 효과가 흔히 나타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몸에 탈이 난 것이기 때문에 몸을 고쳐야 합니다. 말씀하신 공포라든가 그 역겨운 맛과 냄새 말인데요, 이걸 우리는 아우라라고 부르는데, 측두엽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국소 간질의 전형적인 증세지요. 측두엽은 기억과 맛, 냄새를 맡는 부위거든요.'

 

그러니까 그동안 나약한 의지력을 탓하면서 했던 그 모든 번민은 번지수를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이었다. 내가 나무늘보처럼 감성이 무뎠따 하더라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야 누명에서 벗어나는구나 싶었다가 울프 박사의 그 다음 질문을 듣고 나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셨으면...네! 라고 대답한다 해서...손가락질 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헛것을 보았다거나 환청을 들었다거나 한 적이 있습니까?'

 

...침묵만이 요동...조심스럽게...차근차근 대답...

 

'아주 이상한 걸 본 적은 없나요? 전혀 기억 나지 않는 행동을 한 적은 없습니까? 어디를 가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엉뚱한 데 와 있더라든지 하는?'

 

..급소를 찔린 기분...쭈삣거리다가...나중에는 욕심이 앞서서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울프 박사는 예상했던 대로라는 듯 고개를 끄덕..

 

'알겠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측두엽 간질의 전형적인 증상이군요...미안하지만, 정말 모를 일이군요.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하셨을텐데요. 왜 의사한테 이런 증상을 말하지 않았나요?'

 

나는 수다 박사에 대해서도 말했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떤 일 하며 상담과 약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울프 박사는 손을 이마에 엊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얼굴을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말씀하시는게....3년 동안 제대로 된 정신과 의사들한테 진료를 받으면서 이런 증상을 설명했는데도 뇌파 검사를 하자고 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건가요?'

 

'네, 없었어요.' 얼마나 통탄할 노릇인지 슬슬 실감이 났다.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화도 났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살았구나 싶으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울프 박사는 소설가들이 '허!'로 표현하는 그런 폭발음을 냈다.

 

'측두엽 간질이 무슨 대단한 증상이라고. 그건 국소 간질 중에서도 가장 흔한 거고 증상도 훤히 밝혀져 있어요. 그리고 환자분 것은 거의 교과서적인 사례라고요.'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는 찌푸렸던 얼굴을 펴면서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악몽도 아마 가실 것이라면서 약을 처방해 주었다.

 

내가 가려고 자리에 일어서자...그는 정색을 하며...'정신과 의사인지 뭔지 하는 사람들과는 더는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그는 마치 입에 담지 못할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증세를 놓고 아무리 떠들어보았자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적절한 의학적 도움을 진작에 제공하지 못한 점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그가 덧붙였다.

 

'재미있네요. 한때 수녀이셨다면서요. 측두엽 간질 환자분 중에 신앙인이 많거든요!'

 

(...생략...)

 

.....내 정신이 글러먹은 것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알았다. 나는 정신병자가 아니었다....정신병동에 갖혀서 여생을 보낼지도 모른다는 것은 기우였다. 나는 세상을 다시 얻은 기분이었다. 태어나서 어쩌면 처음으로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병 자체는 나한테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심한 간질 환자를 보살피며 숙식을 무료 제공받았음. 신-_-;;;의 섭리인지..] ..간질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간질은 또 아주 흔했다..또 유명...도스토예프스키, 반 고흐, 귀스타브 플로베르, ...에드워드 리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알렉산드로스 대왕...테니슨도...비현실의 막을 통해 삶을 응시하고 신이 들린 듯한 정신상태를 묘사한 그의 시에 내가 끌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간질은 수치스러운 병...성욕 이상이 간질을 낳는다고 믿은 사람도 많았다...할례하고 투옥했다...하지만...내 주며니에는 약의 처방전...측두엽 발작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원인을 아니까 상관 없었다. 정말로 무서웠던 것은 내가 돌아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으니까.

 

(...생략...)

 

친구들...은근 진단을 부정하려고..나는 은근히 놀랐다. ..고정관념은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간질은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병...자꾸 원인을 다른 데로 돌리려 든다...몸에 일어난 탈이라고..ㅐ어날 때 입은 상처라고 설명을 해도 친구들은 떨떠름한 표정..심리적 갈등이나 노이로제의 결과라고 생각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신경의학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라곤 쥐뿔도 없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사코 고집을 꺾지 않는다......

 

하지만...나는 이제 살았구나 싶어서 마냥 기쁘기만 했고 그 기끔은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따. 아직도 사면을 받은 듯한 착각 속에서 산다. 간질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믿기지 않는 운명의 반전 앞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거리를 걸었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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