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거를 받아들인 후, 현재는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미래는 온전히 내맡긴다. 이 셋 중 뭐가 제일 어려울까요.

 

 

 

 

2.

 

 

제가 현재를 '수용'하는 것의 효과를 경험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제시간 안에 깔끔하게 끝내는 일을 몇 배가 넘는 시간이 흘러도 해내지 못해, 몸을 질질 끌고 그 일을 하러 가던 언저리였어요. 그때는 우울증이 재발을 반복하던 무렵 집착하던 다이어트같은 '자기 억압적인' 시도는 포기한 지 오래였고, 좋은 몸매니 군살이니 몸에 좋은 식단이니 칼로리나 GI 지수니 각종 운동법이니 하는 지식도 놓아버린 상태였어요. 덕분에 과거 빈번했던 식이장애 (전 주로 폭식증.)는 발생하지 않았고, 몸도 적정한 수준에서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었죠. (순전히 제 경험에 비추어 말하는데) 심리적으로 문제가 심한 사람일 수록, '다이어트 따위 하지 마라.'는 말은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울, 불안 무드가 지속되고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몸이 단 음식, 높은 GI 지수의 탄수화물을 갈구하는 현상은 여전했어요. 제가 스트레스 받을 때 단 음식을 먹는 양은 남들이 '너 미쳤냐?' 할 정도로 과했어요. '단 거 먹으면 어때서? 남들도 그래.' 하고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죠. 머리로는 뇌 속에 부족한 세로토닌과 기타 기분 좋아지는 호르몬을 보충하려는 신체의 자연스러운 방어기제겠거니 이해하면서도,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 식욕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한심함에 심하게 괴로워지곤 했죠. 그날 아침도 (아마도, 자신의 한심함과 멍청함을 한탄하다 수치심에 꽉 쩔어 있다가 자동적으로) 탄수화물 폭식욕구에 시달리며 또 그걸 자학하며 길을 걷고 있었어요. 그러다 참다못한 저는 생각했죠. '아...됐다. 이제 식욕 평가하는 거 포기할래. 이건 먹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쁜 것이다 생각하는 거 그만 할래. 좋고 나쁘고 떠나서 몸이 원하잖아. 안 된다 생각 하지 않고 먹고 싶어하는 욕구 그대로 받아들일래. 그게 내가 생긴 그대로인걸.' 설탕을 너무 많이 먹어서 정서가 더 불안해지든, 살이 급속히 찌고 피부가 나빠져서 또 트롤형상이 되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우선 먹고 싶어하는 욕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로 했어요. 난 원래 그런 사람이고 생기는 욕구는 그냥 받아들일 거라고. 하면 안된다 나쁜 것이다 따위 생각 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욕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순간, 저를 계속 괴롭히던 탄수화물 폭식 욕구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가던 길을 멈추고 '뭐야?? 어디갔어??' 한동안 머리 속을 뒤지다가 깨닫게 되었죠. 아..이게 '수용'의 효과군.

 

 

쉽게 말하면 그런 거죠. 하지 말라 계속 누르고 억압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나쁘다, 좋지 않은 것이다, 하면 안되는데 하는 라벨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붙여둔 행동은, 이상하게 더 매혹적으로 보이고 더 하고 싶어지고, 그걸 갈망하는 욕구가 커져서 어떤 경우 스스로 자제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는 것. 반면에 나쁘다 좋지 않다는 판단을 완전히 제거한 채, 그냥 그 욕구, 어떤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토록 통제하기 힘들던 욕구가 사그라지고, 통제하기 쉬워지고, 가끔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기까지 해요. 그게 제가 경험했던 '판단을 제거한 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수용의 표면적인 효과였어요. 실제로 중독, 충동적 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심리치료 과정에도 비슷한 연습이 있어요. '먹으면 안 된다.' '하면 안 된다.'는 자기검열적 생각은 물론, '그것은 사실 나쁜 것이다.'는 의식적인, 더 나아가 마음 깊은 곳의 내밀한 가치판단까지 다 버리고, 특정 욕구나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하죠. 나쁜 음식 따위가 어디 있나. 음식은 그냥 음식이다. 피자는 피자고 치킨은 치킨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 이렇게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들끓던 욕구들이 갑자기 약해지고, 훨씬 통제하기 쉬워져요. 막상 하라고 멍석 깔아주면 할 생각이 없어지는 것과 비슷할까. 또한 처리하기 어려운 감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분노 화 증오 등, 삶을 갉아먹는 특정 감정들은 명백하게 인지한 후, 가치판단 없이 억압 없이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 철저하게 수용할 것. 그리하면 그 감정은 가진 에너지를 발산하며 자신의 목적을 다 하고 저절로 소멸하지요. 그렇기에 감정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제 자아를 분열하게 하였던 문제도, 결국 '수용'으로 해결했어요. 돈에 대한 욕심, 남들이 선망하는 좋은 스펙에 대한 욕심, 성공, 명예, 타인들의 질시와 부러움에 대한 욕망을 '속물적인 것이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식으로 억눌러왔고, 그게 제가 우울증에 걸렸던 원인 중 하나였거든요. 그 욕심, 욕구를 '나쁘다, 옳지 못하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래. 나 돈 좋아한다. 정말 돈 많이 많이 벌고 싶다.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어두컴컴한 세상일 보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행복하게 좋은 것만 보며 살고 싶다. 남들한테 칭찬받고 남들보다 위에 서서 우쭐거리고 싶어한다. 그래. 난 그런 욕망이 있다.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냥 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욕구인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평가하지도, 억압하지도, 창피해하지도 말자. 제 경우는 '내면아이 치유'방법을 접하고 난 후였기 때문인지, 이런 욕구의 화신(?)이 제 고등학교 시절 모습으로 (머리 속에서) 나타났어요. 아마 그때가 '사회적으로 옳은 것, 옳지 않은 것. 속물적인 것, 고상한 것'에 대한 본격적인 개념들을 급격히 내면화하기 이전의, 내면의 갈등 없이 온 마음을 다해 스펙과 성공을 위해 달렸던 시기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성공과 욕심의 화신인 그 녀석이 등장했을 때 지켜보는 저는 현재의 저이며 동시에 비판단적으로 알아차리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주시하는 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그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든 절대로 평가하지 말고 토도 달지 않고 무조건 다 들어주고 긍정해주기로 했어요. 그 녀석은 오래 가둬나서인지 할 말이 참 많았어요. '돈 벌고 싶어! 성공할 거야!! 남들 다 부자되는데 나는 왜 안 되니? 스펙 향해서 자기 성공만을 위해서 달리면 좀 어떤데!! 돈 다 벌고 나중에 좋은 일 하면 되잖아!!' 부터 시작해서, 자기 검열 상 차마 쓸 수 없는 부적절한 내면의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져나오더군요. 그걸 있는 그대로 평가하지 않고 다 들어주면서 웃기기도 하고 눈물도 나고 그랬는데, 그 녀석이 차분해지고 저도 다 들어주고 나니 뭔가 훅 풀렸어요. 삶을 옥죄던 큰 매듭 중 하나가 갑자기 느슨해진 느낌?

 

 

지독하게 속물적인 욕구와 머리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이 앞으로도 무수히 생기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조절하고 다뤄야 하는지, 그 때 처음 몸으로 알게 되었어요. 좋다 나쁘다 평가하지 말고 억압하려 하지도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무조건 다 수용해 줄 것. 그러면 정말 기적같이, 모든 것이 저절로 조절되더라고요. 예전에는 아무리 원해도 나와 전혀 상관이 없었던 '현명한 지혜'라는 것이, 무비판적인 있는 그대로의 알아차림과 수용 속에 저절로 흘러나와 고민하던 문제들을 알아서 해결해주더군요. 그날 그토록 펄펄 뛰며 날며 그간 쌓아왔던 에너지를 방출해대던 그 녀석은, 그렇게 다 쏟아내고 나더니 속이 풀렸는지 많이 차분해지더군요. 그 후 그 녀석은 제가 원하는 길을 가는 데 필요한 '현실적인 기술'을 코칭해주기 시작했어요. 삶의 가치도 고상함도 우아함도 다 필요 없고 오직 돈 성공 스펙 명예만이 모든 것이라 노래 부르며 내 속을 썩게 하였던 욕심쟁이 아귀가, 진실된 내가 가고 싶어하는 길을 현실 속에 이뤄내는 데 필요한 일들을 생각하는 세속 브레인으로 승화되기 시작했달까. 참 신기하죠.

 

 

 

 

 

3.

 

인지치료를 받으면서 명상을 동시에 배우던 그 무렵,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던 문제가 있어요. 어떤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인지치료와 명상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요. 전통적인 인지치료법에서는 '(완벽주의, 흑백논리 등등의) 문제를 인식하고, 언어화해서, 그 합리성을 판단하고, 반박, 교정한 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신념, 사고방식으로 교체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자동적인 사고, 역기능적인 신념을 지속적으로 교정하는 데 주안점을 두죠. 반면 명상에서는 불안도 두려움도 기타 다양한 모든 문제를 그저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알아차리기만 하라고 했어요. 나쁘다 좋다는 평가는 온전히 내려놓고, 더 좋은 방향으로 교정하려는 시도는 하지 말고, 이것을 잘 알아차리면 그 문제가 해결되겠지 (실제로 고통이나 우울이나 심한 분노 같은 특정 감정들을 제대로만 알아차리면, 절대 해결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감정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우도 많거든요. 물론 그만큼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져야 하지만.) 하는 은밀한, 혹은 노골적인 기대감도 접고, 비판단적으로 수동적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기리만 하라. 앞에 쓴, 탄수화물 폭식욕구나 세속적 성공에 대한 내적 욕망에 대해 제가 취한 태도가 명상에서 권유하는 태도죠. 있는 그대로 수용할 것. 하여튼 같은 문제에 대해 전자는 너무 적극적이고 후자는 너무 소극적이죠. 그리고 그 둘은 양립할 수 없어요. '내가 가진 사고방식은 나쁘고 이쪽 사고방식이 좋다'라는 명백한 가치평가와 적극적인 교정의지를 가진 전자와, 좋고 나쁘다는 평가는 물론이거니와 현 상황을 고쳐보려는 의도 조차 놓아버린 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는 후자는 병행할 수 없죠.

 

 

위빠사나 명상은 인지요법을 전공으로 하는 치료사들이 주류 심리치료요법으로 도입하기 시작했기에, 이 둘을 조화시키는 것은 치료자들에게도 고민인 듯했어요. 그래서 교정의 노력을 놓아버린 채 온전히 바라보는 연습에만 전념하는 '수용전념치료'같은 신 인지치료요법도 등장했죠. 하여튼 당시 환자였던 저에게도 저 둘의 조화는 큰 고민이었어요. 둘을 동시에 배우면서 두 요법 모두 제대로 된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결국 저는 '나는 내가 싫다.'라는 강고한 뿌리를 자기 사랑기법들로 뿌리뽑고, 인생의 커다란 테클이자 우울증의 직접 원인이 되었던 주요 신념을 잡아내 교정한 후에는, 명상 연습 중 자아와 분리되어 자아 관찰 능력이 조금 생긴 다음부터 명상쪽으로 급속히 기울었어요.

 

 

후에 생각이 어찌 바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제 판단은, 정좌명상이 가능한 수준까지 우울, 불안, 무기력, 강박, 폭식 증세 등이 개선되고 나면 비판단적인 알아차림과 철저한 수용을 연습하는 것이 낫다는 거에요. 다만 명상이 가능하기 전까지는, 명상이 가능한 수준까지 인지치료 요법의 생각바꾸기 기법들로 지나치게 뒤틀린 자동적 사고, 비합리적이고 부정적 신념을 빠른시간 내에 교정하거나 더 깊이 들어가, 정신역동치료의 다양한 요법들로 과거의 중대한 문제를 직면하고 해소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고요. 심리 상태가 안 좋으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자신의 기준, 세상은 내 삶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세계관 따위가 너무 강력해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수도 없으며 그러고 싶은 생각도 생기지 않죠. 그리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수용하는 연습의 극한인 위빠사나 명상을 제대로 수련하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잡념과 상념이 너무 많아서 집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고, 명상만 하면 심리 상태가 심하게 악화되거나 몸이 덜덜 떨리는 등 부정적 증세들이 속출하는 경우도 있고,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들숨 날숨만 가만히 지켜보기를 한 시간 넘게 지속해야 하는 지겹고 따분한 일을 매일 꾸준히 습관들이며 연습하는 인내와 자기조절 능력 자체도 없고 등등. 즉 본격 명상 수행이 가능한 수준까지 전통적인 '개선, 교정' 위주의 치료를 한 후, 그 후로는 개선하려는 의지도 교정하려는 시도도 놓아버리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 최선인 것 같아요. 그러다가 과거의 처리하지 못한 문제들이 떠오르고, 그것이 철저한 알아차림 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혹은 당시 시점에서 알아차림 힘이 약해서 스스로 처리할 힘이 없다면,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 다시 정신분석가나 심리치료사와의 동업이 필요할 테고요. 하지만 에너지의 큰 부분은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는 쪽에 실려야 할 것이라 생각해요.

 

 

또 하나 고민했던 것. 나쁜 것을 제거하고 좋은 쪽으로 나를 상황을 개선해가려는 의지를 놓아버리면, 지금보다 더 좋은 삶, 현재보다 더 훌륭한 미래를 향한 희망을 놓아버리면 성공을 향한, 혹은 계속 발전하고자 하는 동기를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돈 벌 생각도 성공하고 싶은 생각도 놓아버리면 그토록 고통스럽게 일할 필요도 없고 욕먹어가며 위험을 감수해가며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할 필요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자족하다 소인배적 마음의 평온 속에 주저앉은 인생의 루저로 전락하는 것이 아닐까. 이 고민은 지금도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어요. 사실 지금 저는 세속적 성공과 지속적인 상승에서 내면의 투명함과 매 순간의 충실함 쪽으로 삶의 목표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이 고민은 현재의 저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하고.

 

 

다만, 빈약한 수준이나마 알아차림 경험하면서 알게 된 것은,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와중 생기는 지혜나 좋은 방향으로 자신을 가꿔가려는 동기와 에너지는, 그 이전의 제가 자그마한 자아 속에서 억지로 억지로 짜냈던 그 어떤 지혜와 동기, 에너지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방대하다는 사실이었어요. 써도 써도 끝이 없어 보였달까. 특히 지혜의 경우, '이게 내 머리로 생각한 것 맞나?' 싶은 내용들, 경전에나 훌륭한 책에 쓰여 있는 내용들이 저절로 떠오르기도 했고, 자기통제, 자기조절에 필요한 동기와 의지력도 있는 알아차림 상태에서 몰라보게 강해졌어요. 아니, 알아차림 상태에서는 형편없이 무너지고 주저앉고 무언가에 중독되고 푹 퍼지는 것이 불가능했어요. 주저앉으려면 알아차림을 그만둬야, 아니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놓아버려야 했고요. (그러면 신속하게 번개와 같은 속도로 우울 불안 자학 분노 흥분 조급함 중독 찌질함의 자동조정 상태로 돌입할 수 있었어요.)

 

 

자기 것 같지 않은 현명한 지혜와, 자기통제능력과 의지력과 정신 에너지의 증대. 이 정도면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한 조건으로 훌륭하지 않을까요. 저 같은 사람에게는 가난에서 이런 비참함에서 탈출하겠다, 돈 벌고 싶다,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 등의 아득바득한 집착, 목표의식보다, 지혜와, 자기통제력과, 의지, 정신에너지가 훨씬 필요해요. 전자는 이제 가지려고 해도 맘대로 가져지지도 않을뿐더러, 짧다면 짧은 제 삶을 돌이켜볼 때 원하는 일을 이루어내지 못했을 때는 언제나 지나친 욕심이나 성급함, 노골적인 이기심 등 지혜롭지 못한 처신과, 자기통제력의 현저한 부족, 빠르게 고갈되는 정신에너지(그리고 체력) 탓이었거든요. 그래서 현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성공하려는 동기, 삶을 개선하려는 목적 의식을 소멸시키고, 그래서 인생이 발전 없이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쓸데없는 기우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오히려,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4.

 

 

현재를 선입견이나 알음 알이나 가치판단 없이 비판단적으로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지만, 절대로 쉽지는 않은 일이에요. 이 것을 매 순간순간 지속하며 깊이를 더해가기 위해 (이미 정신력이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강한) 수행자들이 머리를 깎고 산으로 동굴로 들어가서 수행에만 몰입할 정도죠.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대강 감이라도 잡아야 그쪽으로 가도록 연습하지 않겠습니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즉 알아차림을 하는 것의 주체가 되는 '주시자'에 대해, 최근 재미있게 읽은 <모든 것의 역사> 에서 켄 윌버가 전하는 말을 옮겨보죠.

 

 

(생략)...당신은 이 순간 자신을 알아차리고 있지요...'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자신에 대해서 진술하기 시작할 것입니다...(직업, 역할, 취향, 선호도, 욕망, 세계관, 생각, 감정 등등)...'자신에 대해 아는 것들'을 다 열거할 겁니다...그러한 것들 모두는 당신의 인식 속에 있는 대상들입니다...그러한 대상들 모두는 정확히 말해 주시하고 있는 '자기'는 아닙니다...'보는 자' the Seer는 아니고 단순히 보여질 수 있는 것일 뿐입니다...궁국적으로 여기서는 당신이 아닌 것들의 목록을 보여 줄 뿐입니다..그렇다면 이 참 '보는 자'는 누구입니까? 주시하고 있는 '자기'는 누구이고 무엇입니까?...이를테면 무엇이 자연과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고, 신체와 그 지각을 바라보고 있고, 마음과 그 상념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있는 참 당신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작은 객체적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자 말입니다....당신이 이 순수한 '주체성', 이 순수한 '보는 자' 속으로 계속 되밀고 들어갈 때에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그것은 당신이 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이 주시하고 있는 각성인식 속에서 조용히 안식을 취하고 있을 때 - 이리저리 떠다니는 마음과 몸과 자연을 지켜보고 있을 때 - 당신이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은 단순히 자유감, 해방감이고, 당신이 조용히 주시하고 있는 어느 대상들에 대한 무속박갈이라는 것을 당신이 알아차리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특별히 아무것도 보지 않고, 단순히 이 광대한 자유 속에 안식을 취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당신 앞에) 구름들이 오가고, 감각이 오가고, 상념들이 오갑니다 - 그래서 당신은 그들 중의 어느 하나가 아닙니다....그리하여 당신은, 이제 이러한 모든 대상들을 주시하고 있는 당신 안의 "보는 자" 그 자체가 곧 아주 광대한 '공'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합니다'...이 순수한 주시자는 모든 이러한 객체적 주체와 객체들이 일어나서 잠깐 머물다가 사라지는 순수한 '공'입니다...주시자는 [의식의] 흐름에서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흐름이 일어나는 '자유'의 광대한 팽창입니다....당신이 이 '주시하고 있는 것' Witnessing안에서 안식할 때에 지각하는 모든 것은 정말로 광대한 공, 광대한 자유, 광대한 팽창인 것입니다...완전한 해방...소란..욕망..공포..희망에 사로잡히지 않은 완전한 '자유'입니다...(이하 생략)

캔 윌버, <모든 것의 역사> 대원 출판, pp. 362~365 에서.

 

 

저 '주시자'의 알아차림을 미약한 형태로나마 현실 속에 끌어들여 이를 지속시키기 위해 연습하는 것이 현재에 존재하며 그대로 수용하는 것, 혹은 순수한 알아차림을 훈련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러니 생각, 신념, 가치판단, 개념, 세계관도 모두 배제한 채 (이것도 알아차리려야 할 대상일 뿐이니까.) 그저 유일하게 실존하는 '현재'에 의식적으로 존재하며, 지금 하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있에 집중하며 있는 그대로 바라 보는 연습을 하는 거죠. 이 중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알아차림 자체를 집중적으로 연습하는 것이 마음챙김 명상(=위빠사나 명상)이고.

 

 

 

 

5.

 

 

MBSR을 만든 존 카밧진은 <마음 챙김 명상과 자기치유>에서 마음챙김 명상 수련에 필요한 태도를 강조하고 있어요. 정리하면 이래요. 순수한 알아차림, 현재에 존재하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수용함으로 이끄는 태도란 다음과 같다. 판단하지 말고, 기대나 희망이나 불안 등 개념과 욕망등도 다 내려놓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지나치게 애쓰지도 말며,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믿음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조급해하지도 말라. 오직 지금에 집중해서 초심자의 마음을 유지하며, 모든 사물과 자신의 몸과 마음의 변화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 온전히 수용하라. 명상에 필요한 이런 태도가 현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노력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거죠.

 

 

물론 아무리 놓으려고 해도 끈적거리는 집착은 너무 강고하고, (잘 되어야한다는) 기대나 (적절한 때를 참을 수 없기에 지금 빨리 무언가가 이루어져야한다는) 조급함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일은 쉽지 않죠. 바로 그렇기에 우리가 괴로운 것이고, 바로 그렇기에 알아차리고 수용하고 놓아버리는 연습이 더 많이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태도로 나를 싱크로하는 것이, 명상 수행이 도무지 되지 않는다? 할 마음 조차 들지 않는다? 내 속에 갈등과 트라우마와 비정상적이고 헛된 기대감과 신념이 난무하고 있다? 그럼 우선 집중적인 심리치료를 병행하며 지나치게 강력한 그 갈등부터 처리를 해야겠죠. 그래야 자아와 바라보는 자가 분리되고, 그 후에야 본격적인 알아차림도 명상수행도 시작하는 것이 가능할 테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하기 싫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앉아서 눈을 감고 숨에 마음을 모으기 시작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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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밧진이 언급한 7가지 태도 요약은 아래와 같아요. 예전에도 한번 썼어요. http://djuna.cine21.com/xe/?mid=board&search_keyword=%EC%9A%B0%ED%96%89%EA%B8%B8&search_target=title&page=3&document_srl=1801873

 

1) 판단하려 하지 말라 (non-judging) - 자신의 체험 속에서, 편견 없는 공평한 자세를 취하라. 치우치지 않은 관찰자 입장에 서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평가를 하더라도, '평가를 한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판단'이 떠오르면, 그 존재를 알아차리고, 판단을 보류하고, 그저 고요히 지켜만 보라. 호흡만 지켜만 보라.

 

 

2) 인내심을 가져라 (patience) -인내심은 곧 지혜이다. 사물이란 변화하는데 나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 즉 인내심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의 순간에 완전히 개방되어 있으며, 순간의 충만성을 받아들이며, 번데기가 나비로 되는 것과 같이 모든 일은 그 나름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3)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간직하라 (begginer's mind) '지금'이라는 이 순간의 경험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 곧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그러므로 초발심-모든 일을 처음 볼 때와 같은 마음자세로 보는 것-을 가져라. 같은 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매 순간은 독특하며,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가능성을 가진다. 초발심은 바로 이 진리를 상기시킨다.

 

 

4) 믿음을 가져라 (trust) -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느낌에 대해 깊은 믿음을 키워라. 자기 직관을 믿다 실수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라 하는 것 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 당신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오직 당신답게 되는 것 뿐이다. 스스로에게 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를 믿는 것을 '배워야' 한다. (안되면, 훈련해야 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자신을 믿으면 믿을 수록 타인에 대한 신뢰감도 살아난다.

 

5) 지나치게 애쓰지 말라. (non- striving) - 명상은 어떤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명상이란 '무언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다. '당신다워질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은 없다. 목표의식은 장애가 된다. 역설적이겠지만, 당신이 원하는 곳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특정한 결과를 얻으려고 허둥거리는 노력을 거두고, 오직 순간순간 있는 그대로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그대로 사려 깊게 보고 수용하는 데 있다.

 

6) 수용하라 (acceptance) 수용은, '만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 대신, 다른 상황이나 느낌, 생각, 견해를 강요하며 지금 이 순간을 부정하거나, 저항하거나, 회피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것을 용인하라거나, 목표를 포기하거나, 당신의 원칙이나 변화와 성장에 대한 욕망을 무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지금 여기서 사물이 진행되어 나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7) 내려놓아라. (letting-go) - 명상에서 우리는 경험의 어떤 측면은 부둥켜안으려 하고, 또 어떤 것은 거부하려 하는 것을 알아챈 후, 이를 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노력한다. 우리는 체험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순간순간을 그대로 관찰한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곧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말한다. 집착이 생기면, 그저 놓아버린 후, 가만히 관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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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림을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위빠사나 명상법은 (적어도 초기 시작은) 너무 간단해요. 우행길 초반에도 줄곧 썼고, 그 이전에 시중에 나가도 인터넷을 뒤져도 위빠사나 명상법에 대한 훌륭한 책이나 좋은 글, 명확한 강의들은 많고도 많죠. 그걸 찾아보는 것도 도무지 귀찮다 하시는 분들을 위해 새로운 글을 다시 옮겨 써봐요.

 

 

Q. 위빠사나 수행법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A. 허리를 곧게 세우고 (가부좌를 틀고, 보통은 눈을 감고) 앉아 주의를 집중하고 수행을 시작하십시오. 방이나 마루, 혹은 걸상에 앉아서도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집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배나 혹은 코 끝에 마음의 자리를 잡고) 들숨, 날숨에 마음을 모으십시오. 혹시 도움이 된다면 호흡의 출입을 관찰하는 동안 '붓도' '담모' '상도'(혹은 들이쉼, 내쉼)를 반복해 외워도 좋습니다.

이처럼 숨이 들어오고 나감을 알아차림에 있어 억지와 무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호흡을 억제하려 들어도 안 됩니다. 호흡이 너무 짧거나 길게, 너무 부드럽거나 거칠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호흡이 제대로 들락거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나 편안하지 못한 느낌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부디 그대로 놓아두십시오. 저절로 자리잡게 두십시오. 언젠가는 호흡이 자유롭게 들어오고 나가게 됩니다. 그대가 알아차리고 있는 가운데 들숨, 날숨이 잘 자리잡게 되면 제대로 된 것입니다. 간혹 마음이 산만해질 때면 어떤 식으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이전에 마음이 산만해졌다는 사실 자체도 모를 것임. 그 생각 속에 빠져있어서.) 그러나 억제하지 말고 안달하지 마십시오. (그저 잡념을 알아차린 후) 단지 호흡에 주목하면서 그대로 두십시오. 계속 그렇게 하십시오.

그런 식으로 수행을 계속해 나가면 호흡이 멈출 때도 있습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안 죽어요)... 때가 되면 전과 다름없이 호흡이 되돌아올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마음을 평온하게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의자에 앉아서든 차안이나 보트 속에서든, 수행자는 어디에서든지 집중을 이루고 즉시 평온한 상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짠 차 지음, 김열권 옮김, <붓도 위빠사나> 솔바람, pp.74~75

 

(좀 더 자세한 방법을 보고 싶으시면 http://djuna.cine21.com/xe/?mid=board&search_keyword=%EC%9A%B0%ED%96%89%EA%B8%B8&search_target=title&page=1&document_srl=2084587. 위빠사나 명상법도, 그 근본은 동일한데, 표면적인 방법들이 꽤 다양해요. 그래서 이 책 저 방법 찾아보다 보면 약간 정신이 없고 그래요. 막상 꾸준히 하면 결국 같은 것인데. 하여튼 그 방법들 중 제일 간단하고 깔끔해서 저는 아짠 차 스님의 책들을 좋아해요.)

 

 

 

 

6.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수용한다는 것은, 저런 주시자의 바라봄, 혹은 마음챙김(위빠사나) 명상의 '알아차림'의 일정 부분을 현재 모든 상황에 대해, 나의 감각과 생각과 느낌에 대해, 내가 바라보는 세계 전체에 대해 적용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이를 위해 내면에서 들리는 자기평가의 목소리 (면박꾼이나 자학꾼은 물론)는 물론이거니와 객관적으로 통용되는 좋다 나쁘다는 가치판단도 개념도 세계관도 놓아버려야 하고, '나는 이러이러해야 한다. (ex. 지금쯤이면 돈을 얼마 정도 벌어놓고 집도 몇 평짜리를 사 놓아야 적절하다.)' '나의 자식은 이러이러해야 한다.' '내 삶은 이렇게 흘러가야 한다.'라는 내면, 외면적 기준, 기대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온전히 바라보다 결국 놓아버려야 하며, 그것에 따른 희망, 바람, 불안, 두려움도 가지지 않는 것이죠. 그래야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으니까.

 

 

이렇게 현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며 수용하면, 현재의 고통도, 풀 길 없는 감정의 응어리도, 지독한 갈등도 복잡한 내면의 문제도 저절로 풀리는 경우가 많아요. 설혹 그것이 그대로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전처럼 죽을 것 같이 괴롭거나 힘들게 느껴지지 않아요. 생활고는 생활고이고, 고통은 고통이고, 사회의 혼란은 혼란일 뿐이고, 우리는 그 속 한가운데 지금 현재에 온전히 존재하며 있는 그대로 고요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문제는 여전히 문제이지만, 훨씬 덜 아픈 문제가 되어요.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사라지죠. 생성된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현재를 수용하는 순간, 미래에 대한 걱정도 불안도 저절로 사라져요.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며 존재하는 순간은 현재뿐이죠. 그렇기에 높은 가르침들은 언제나 오직 현재에 존재할 것을 주문하죠. 과거도 미래도 허상이니까. 특히 미래는 우리 머리속에서 바람과 계획과 희망과 걱정과 근심 등, 상념 속에 그리는 가상의 무엇이죠. 그렇기에 그 상념과 기대를 놓아버리면 미래도 없고, 그러면 미래에 대한 희망도 불안도 사라지죠. 그리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수용한다는 것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기준, 기대 등 생각과 신념을 알아차린 후 놓아버리고, 그에 따른 희망과 그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 두려움도 단지 알아차린 후 놓는 것이에요. 그렇기에 현재의 온전한 수용은 미래에 대한 불안, 두려움의 소멸로 이어져요.

 

 

물론 이렇게 손쉽게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라질 리는 없죠. 그런데 이것은 현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그 결과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일이 쉽지 않은 것과 똑같아요. 현재의 수용, 비판단적인 알아차림이라는 방법 자체가 간단할 뿐, 그것을 직접 행하기가 쉽다는 것은 아니죠. 특히 평범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억압과 투사를 반복하고 기대와 희망, 불안과 자학이 요동치다 우울증, 불안증, 강박증 따위에 걸려버린 우리는 더더욱 요. 오직 필요한 것은 현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비판단적 알아차림을 유지하려는 반복적이고 꾸준한 연습 뿐이죠.

 

 

판단하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초심자의 마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지나치게 애쓰지 말고, 수용한 후, 내려놓을 것. 명상할 때 필요한 7가지 태도는 현재를 알아차리는데 필요한 태도와 동일해요. 결국 명상은 알아차림을 집중 수행하는 특수한 방법일 뿐, 어느 정도 알아차림의 힘이 길러지면 결국 모든 삶의 자리가 다 수행이 장소가 된다고 위대한 스승들은 가르쳐왔으니까요.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현재에 오롯이 존재하며 알아차리는 것뿐. 지금 바라보고 듣는 것, 행하는 것, 느끼는 것, 떠도는 생각, 느낌 기타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각종 일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며 그것을 모두 온전히 수용하는 것. 판단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감싸 안을 것.

 

 

p.s. 현재의 수용에 대해 심리학적인 프로그램을 찾고 싶으시면 '수용전념치료'를 소개하고 있는 책인  <마음으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 (학지사), <우울증 치유를 위한 마음챙김과 수용 워크북> (시그마프레스) 등을 참조해보세요. 저는 사놓고 읽어보지는 않아서 책에 대한 평가는 내릴 수 없지만 ^^; 어떤 분에게는 분명 도움이 되실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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