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지난 글 둘러보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길래 글을 쓰고 갑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렇겠지만 심층신경망, 흔히 말하는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은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로부터 시작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정말 애석하게도, 바로 그 시점에 대중을 상대로 심층신경망 기술에 대한 오해가 너무 많이 퍼졌습니다. 알파고가 브루트 포스 메커니즘을 이용하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실제로 인간을 뛰어넘은 건 아니라는 얘기가 대표적이었죠. 그리고,그 뒤로도 분야 전공자들이 딱히 그런 오해를 적극적으로 바로잡지는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인공지능이 그냥 빅데이터 비스끄므레한 고도의 통계장치라는 정도로 전반적인 이해가 형성됐죠. 그리고 그건 크나큰 오해입니다.


 심층신경망은 여러 단계의 퍼셉트론을 쌓아올린 인공지능체계의 일종입니다. 퍼셉트론은 인간의 뉴런을 전자적으로 구현한 물건입니다. 기준 이상의 입력이 들어오면 다음 단계로 신호를 전달하는 구조죠. 여러 층의 퍼셉트론을 데이터가 통과하면서 점차 추상적이고 집합적인 데이터를 원본데이터로부터 파악합니다. 패턴 파악이라고 하는건데요. 인물 사진을 예로 들면 1단계 퍼셉트론은 각각의 픽셀이 무슨 색인지 파악합니다. 2단계 퍼셉트론은 앞단계의 데이터로부터 조금 더 고도화 된 패턴을 읽죠. 손가락처럼 보이는 것, 코처럼 보이는 것, 입처럼 보이는 것, 눈처럼 보이는 것... 3단계 퍼셉트론은 다시 전 단계보다 고도화된 패턴을 읽습니다. 얼굴, 팔, 다리, 몸통 따위의 것을요. 그리고 이러한 학습 과정을 통해서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인간의 인지과정을 재현하는 것이 심층신경망기술입니다. 아마 짐작하시는 것에 비해선 훨씬 인간의 인지과정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셔도 될겁니다.


 AI 판사는 자연어 처리(NLP) 기술을 이용하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제일 높습니다. 이건 뭐냐면, 말 그대로 사람이 쓴 글을 이해하는 인공지능입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요. 가능한 모든 단어에 대해서 정해진 갯수의 차원을 설정합니다. 제가 접해 본 것 중 가장 큰 건 300개 정도 됐던 것 같네요. 인공지능에게 인간의 텍스트를 학습시키면 인공지능은 300개의 측면에서 개별 단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할머니는 노인/여성/가족구성원/단수, 컴퓨터는 무생물/기계/전자제품/단수 따위의 식이죠. 실제로는 더 미묘한 뉘앙스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한 단어장들을 통해서, 기계는 인간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법조문 전부와 해당 사건의 양측 입장문이 입력되면 기계는 사건을 이해합니다. 이런 이해는, 본질적으로 판사가 수행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합니다. 나아가서 증거법정주의에 따라 제출되지 않은 모든 맥락이나 사회적 압력을 무시하는 것은 인간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죠. 애초에 그런 걸 입력하지 않으면 되니까요. 헌법재판소 수준의 가치관에 따른 이익형량을 다루는 수준까지는 현재로서 기대하기 힘듭니다만, 정해진 것으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작업인 이상 인공지능이 못 할 이유는 없습니다. 도입이 안 되는 건, 대부분의 인공지능 기술이 그렇듯이 책임 주체로서 인공지능을 인정할 수 있느냐는 부분이 오히려 크죠.


 이런 AI에게 특정인 혹은 집단이 자신의 편견을 심는 건, 실현 불가능한 수준으로 복잡하고 힘든 일이 됩니다. 입력되는 모든 데이터에 일관되게 편견을 심지 않는 한, 학습 과정에서 이를 노이즈로 보고 걸러내거든요. 그리고 입력되는 데이터의 단위는 인간이 손대긴 힘든 수준의 크기입니다. 보통 앞서 말한 단어장(wordvector)를 구성하는데만 영문 위키피디아 전체 페이지나 몇 년치 인터넷 기사가 입력데이터로 주어지는 경우도 왕왕 있거든요. 또, 메커니즘 수준에서 편견을 심으려는 시도는 학습 과정 자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정상학습을 방해하게 됩니다. 어느 쪽이든, 실효성이 굉장히 떨어지는 방법이죠.


 저는 AI가 2심 수준의 민형사 판결을 대리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런 방식으로 법률 서비스의 가격을 혁신적인 수준으로 저렴하게 만드는 것 역시 법률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을 높이는 복지의 일종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구요. 저는 강인공지능에 의한 특이점 도달이 인류를 다음 단계로 끌어올릴거라고 생각하는 기술낙관론자이긴 합니다만...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부당한 압력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법률의 판단자라는 건 꽤 오랜 인류의 이상이었으니까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19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6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04
558 파친코를 읽으면서 작가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렇게 유명해지다니?) [7] dlraud 2022.04.17 1285
557 최고의 ‘밀당’ 영화로서의 <위플래쉬>에 관한 단상 [3] crumley 2020.11.22 556
556 몇몇 깨어있는 시민들의 판단 중지 [11] 타락씨 2020.07.15 1127
555 에드워드 양의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자 걸작 <하나 그리고 둘> 초강추합니다! (오늘까지 온라인 무료 상영) [8] crumley 2020.06.29 958
554 국민과의 대화 [18] 타락씨 2019.11.20 1292
553 여기가 법무부장관을 배출했다는 댓글 맛집 듀게입니까 (내용없음) [5] 룽게 2019.09.09 1049
552 영화사 최고 걸작 중의 한 편인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 초강추! (한국영상자료원 상영) [2] crumley 2019.05.21 1056
551 책을 만들고 있고, 또 만들고 싶습니다. (텀블벅) [6] 사이드웨이 2018.11.22 642
550 놀랍도록 조용한 올림픽 [12] 칼리토 2016.08.04 2543
549 EBS 고전 극장 <장고> [12] 김전일 2016.07.01 1354
548 심상정 의원님 자수하세요 [7] 데메킨 2016.06.29 3858
547 젝스키스, 그 옛날의 오렌지족 [1] 칼리토 2016.06.13 1851
546 세계영화사에 남는 거장 나루세 미키오 예찬 [1] crumley 2016.03.06 1319
545 EBS 고전극장 <애수> 제목만 들어도... [7] 김전일 2015.12.18 1391
544 그림을 배우고 있어요 18 + 하반기 결산 [6] 샌드맨 2015.12.05 1121
543 파리 테러, 민중 궐기, 세월호 [5] 칼리토 2015.11.16 1678
542 영화제의 묘미 중 하나는 레드카펫 드레스 구경이지요 [10] 쥬디 2015.10.01 2719
541 인이어 이어폰 바낭_포낙 PFE 022 [4] 칼리토 2015.09.11 984
540 등산, 청계산, 패셔너블한 등산 [6] 칼리토 2015.08.31 1720
539 [내용 있음] 셀마 [12] 잔인한오후 2015.07.28 132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