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procrastinator 의 이야기: 


아아 저는 지금 지난 며칠간 마감이 코앞에 닥친 프로젝트(이하 P)에게서 도망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돌봐야하지만 돌보지 않았던 P 때문에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듯 지난 며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럼에도 도무지 P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지하철을 타면서도 잠들기 전에도 머릿 속은 마주하기 싫은 P를 마주해야하는 그 순간을 그리면서 그 순간에서 멀리멀리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도망칠수록 P를 억지로라도 마주해야하는 그날, 데드라인은 다가오고 있었지요. 그렇게 P를 보지 않는 동안에도 P는 제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P를 피하면 피할수록 내 머릿 속에서 그는 점점 더 거대해지고 다루기 어려워지는 검은 괴물 같았습니다. 더이상 머릿 속의 이 검은 괴물을 그대로 둘수가 없어진 오늘 저녁, 저는 P와 마주 앉았습니다. 

막상 눈 앞에 앉혀놓고 보니 P는 제가 생각했던 오물귀신 같은 검정 괴물이 아니더군요. 그는 작고 다루기 쉬운 꼬마 유령이었습니다. 주말이 지나기 전에라도 P를 만났더라면 이 꼬마 유령을 더 쉽게 요리할 수 있었을텐데 저의 미루는 습관, 도피하고 싶은 충동 그리고 이것이 시간을 끌며 미루면 미룰 수록 머릿속에서 커지는 괴물 같은 두려움 때문에 P를 오늘에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미루면 미룰 수록 머릿속의 괴물은 커져만가고, 그것을 마주하는데 필요한 용기의 총액도 늘어만 갑니다. 일을 미루는 날짜가 하루하루 더해질 수록, 미룬 일을 마주하는데는 더 큰 의지가 필요합니다. 일단 하기 싫은 그 일과 마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인데 말이죠. 


*** 


회사에 제출해야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마감의 압박이 다가오고 일은 풀리지 않아서 한번 적어봤습니다. 

저처럼 중대한 일을 차일 피일 미루는 습관 때문에 주기적으로 괴로움을 겪는 분이 계신가요? 

저는 사실 만성적인 procrastinator 는 아닌 듯 합니다. 팀 멤버로써 해야하는 일이나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들은 시간에 맞춰 집중해서 잘하는 편이에요. 특히 단기적인 집중력이나 판단력을 요하는 일은, 주위 다른 일에 시선을 둘 틈이 없기 때문에 미루지 않습니다. 제가 미루는 일들은, 긴 시간을 두고 홀로 오랜 생각과 연구를 거쳐 여러번 퇴고를 거듭해야하는 일의 경우 (즉 중요한 일) 입니다. 즉 명상처럼 1) 혼자서 해야하는 일이다 2) 다른 것에 시선이 분산되면 안된다 3) 긴 시간을 요구한다.. 대략 이런 요건에 맞는 프로젝트면 이번처럼 미루고 미루다 마감에 임박해서야 허둥지둥 끝내거나 마감을 놓칩니다.  그래서 긴 논문은, 짧은 논문 여러편으로 마감을 여러개 만들어야지만 (주로 데드라인을 넘겨서) 끝낼 수 있습니다. 이런 제 습성을 학부시절 부터 파악해서 더이상의 학업을 계속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좋지 않겠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습니다. 아직은 운이 좋아서인지 제 직업의 특성 때문인지 어찌어찌 이런 미루는 습관이 크게 나쁜 결과를 가져온 일은 없었습니다. (물론 학부시절 논문을 제출해야하는 과목의 성적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만..) 예를 들어 의사가 중요한 수술을 미루거나, 사장이 월급주는 날을 미루거나, 등등.. 이런 것은 미루는 것이 많은 이들에게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텐데, 저는 저런 경우는 아니었습니다. 뭐 대학생때 페이퍼를 마감을 넘겨서 낸다는 것, 설거지를 미루고 미뤄서 사용할 깨끗한 컵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 이런 정도였네요.. 


그런데 지난 며칠과 오늘은 지난 몇달간 겪은 것 중에 가장 좋지 않은 미룸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무지 이 프로젝트는 정말 하고싶지가 않은 겁니다. 


미루는 기간과 그 동안 느끼는 심리적인 부담의 크기는, 프로젝트의 중요성, 내가 이 프로젝트를 얼마나 훌륭히 완성해내고 싶은지 같은 기대 등과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도 그런 성격이 있고요. 주위 사람들의 기대도 컸습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 생각만큼 프로젝 초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고민이 많았는데 그 고민을 적극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해결하려고 일찍일찍 애쓰지 않았던 것이 (= 머릿속의 괴물을 키워온 것이) 오늘의 이 상태로 이르게 하지 않았나 뒤늦게 생각해봅니다.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욕심을 버리고, 지금 갖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서 (= 딴짓 안하고) 끝내는 것이겠지요.. 이제 두시간 좀 있으면 해가 뜨겠네요. 

 

학창시절 써야하는 논문은 안쓰고 새벽까지 놀다가 새벽 2시부터 허둥지둥 페이퍼를 쓰던 경험을 통해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미루고 딴짓할 그 시간에는 그냥 잠이나 자두는게 낫다는 거네요 ㅎㅎ 그래야 아침에 일어나서라도 다시 페이퍼를 쓸 수 있을테니까요. 제가 만난 교수님들은 그리고 관대한(?) 분들이 많아서인지 하루 이틀 페이퍼 늦게 내는 걸로 학생을 혼내거나 점수를 깎지는 않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무튼, 일을 미루고 딴짓을 하려면 그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자던가 원기를 보충하라! 이것이 제가 느낀 것입니다. 


*** 


몇달전에 저같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어주는 글이 뉴욕타임즈에 실렸었는데요. (그나저나 미국에는 the Art of Procrastination 이라는 책도 나왔네요ㅎㅎ) 

http://www.nytimes.com/2013/01/15/science/positive-procrastination-not-an-oxymoron.html?_r=0 


미루는 사람들은 사실 하기싫은 일을 미루는 동안 상당히 많은 다른 일을 끝내는 생산적인 사람이라는군요.. 

저도 유독 페이퍼 마감이 닥치면 책상정리를 해서 책상이 깨끗해지고 빨래에 방청소까지 싹 다 끝냈던것 같습니다. 다음 방학 때는 뭐할까 계획도 짜고 평소 읽지 않았던 신문기사들이 갑자기 너무 재밌어지고, 책이 읽고 싶어지고 등등..  

저 기사에 나오는 어떤 전문가는 저런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 미루는 습관을 생산적인 과정으로 바꾸게 해준다고 하는군요. 즉 한가지를 미루기 위해서 어떻게든 다른 업무를 찾아 끝내는 심리를 이용하면, 생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거에요!!! 이 얼마나 역설적인 생산성인가요. A를 미룬다 = B를 끝낸다 의 선순환 고리를 만든다는 역발상이네요. 

저런 선순환이 항상 잘 작동하지는 않겠지만 (예를 들면 프로젝트 A가 밥줄과 관련된 업무인데 내가 그것을 미루는 동안 하는 프로젝트B는 밥벌이와 상관없는 휴가계획짜기라면?)  제 경우를 생각해보면 말이죠. 저도 회사에서 제가 해야하는 프로젝트 A가 너무 하기 싫어서 현실에서 도피중일때 상사가 프로젝트 B를 할 사람 손? 부르면 제가 할게요 라며 반갑게 자진했던 것 같아요.  프로젝트 A를 미뤄도 나는 B를 끝냈다는 핑계거리가 생기니까요.. 


그리고 지금 

내일까지 끝내야할 P를 미루기위해

듀게에 이 긴 글을 후딱 끝내버리고 말았습니다. 일기도 요새는 잘 안썼는데 말이죠..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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