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다른 곳에 먼저 올렸었기 때문에 말투가 이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국내 언론에서도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님의 타계 소식이 많이 다뤄지지 않은 것 같아서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에 추모글을 올려요.)

 

얼마전 코로나19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거장,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님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2018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솔라나스 감독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었다. 그해 영화제에서는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님의 마스터 클래스가 진행되었고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님의 대표작인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가 상영되었다. 그때까지 솔라나스 감독님의 영화를 거의 본 적은 없었으나 굳이 따지자면 내가 영화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된 것과 관련되어 솔라나스 감독님의 영화와 인연이 있기는 하다. 

 

나는 이와이 슈운지의 <러브레터>를 보고 큰 감동을 받은 나머지 우연히 신문에서 이와이 슈운지의 영화들을 상영한다는 정보를 얻고 문화학교 서울을 처음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수많은 영화사에 남는 작품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경험이 내가 영화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큰 자산이 되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는 영화 상영뿐만이 아니라 올해 개봉했던 에드워드 양의 <공포분자>를 비롯해서 세계영화사에 남는 대표작들을 해설해놓은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라는 책을 자체적으로 출간해서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영화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시기에 그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 책의 제목이 솔라나스 감독님과 관련이 있는데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라는 제목은 솔라나스 감독님의 대표작인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1968)에서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2018년 영화제때 나는 드디어 말로만 들었던 장장 4시간 20분에 이르는 3부작 다큐멘터리인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를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소문대로 영화사에 길이 남는 기념비적인 걸작이었다. 남아메리카를 잠식해가는 제국주의에 맞선 민중의 저항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혁명 정신을 고취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탁월한 몽타쥬 기법을 활용하고 있으며 잘 짜여진 구성을 갖추고 있어서 4시간이 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내레이터가 이 영화를 보고 있을 관객들에게 저항을 멈추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는데 그 내레이션이 영화를 보고 있던 나 자신에게도 여전히 생명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게 다가와서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제국주의가 어떻게 남아메리카를 잠식하고 착취해가는지에 관해 치밀하게 분석하고 그에 맞선 저항들을 기록하며 종국에는 이 저항에 연대할 것을 관객들에게 촉구하면서 끝나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는 이러한 구조로 인해 교육적인 기능도 충실히 해내고 있다. 그리고 영화답게 제국주의가 이미지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석하는 부분도있는데 저항을 기록한 바로 이 매체에 대한 사유를 통해 제국주의의 전략을 분석해내는 것이 매우 탁월하게 느껴졌다.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님의 마스터 클래스는 내가 수없이참석했던 마스터 클래스 행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인상적인 경험은 솔라나스 감독님이 시종일관 뿜어내셨던 강력한 에너지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에너지가 얼마나 강력했냐면 나로 하여금 감독님의 말에 완전히 몰입하고 빨려들도록 만들었으며 급기야는 감독님이 하시는 말씀이 전부 옳고 영화를 만들 거면 반드시 감독님의 영화 철학을 답습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마저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도 감독님으로부터 받은 좋은 에너지를 바탕으로 뭔가 당장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감독님의 말을 들으면서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한 영화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감독님의 매력에 완전히 반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독님은 당시에 아르헨티나 상원의원으로도 활동 중이셨는데 대통령에 출마를 하셔도 납득이 갈 정도로 뚜렷한 정치 철학과 그와 관련된 자신감을 갖고 계셨다. 이러한 분이라면 나로서는 한없이 존경스러운 마음이 생겨서 감독님으로부터 사인을 받고 감독님과 눈이라도 마주치고 싶은 마음을 버리기가 힘들었다. 나는 감독님의 대표작인 <불타는시간의 연대기> DVD를 현장에서 구입해서 그 DVD에 사인을 받았다. 감독님은 잠깐 동안이었지만 나를 너무도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1936년생이신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님은 2018년 당시 이미 80세가 넘으신 고령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이 일반 젊은이들보다 훨씬 열정적이시고 혈기가 넘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나는 솔라나스 감독님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좋은 영화들을 만드시면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행보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감독님이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뜻밖의 소식에 나는 깜짝 놀랐고 많이 슬펐다. 솔라나스 감독님은 내가 잠깐이라도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최초의 희생자가 되셨고 코로나19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솔라나스 감독님의 영화들은 앞으로도 영화가 무엇이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양한 갈래 중에) 하나의 답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짧지만 너무나 강렬하고 의미가 있으며 감사한 순간을 선사해주셨던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님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그 분을 기리기 위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솔라나스 감독님의 영화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남쪽>(1988)을 EBS에서 본 적이 있는데 솔라나스 감독님은 이 영화의 음악 파트에도 참여하셨다. 오랜만에 <남쪽>의 구슬픈 음악을 들어봐야겠다. 그리고 감독님에게 받았던 에너지를 바탕으로 비록 작지만 내 일상에서의 ‘혁명’이라도 실천해야겠다. 페르나도 솔라나스 감독님, 잠깐이었지만 만나뵙게 되어서 진심으로 영광이었고 정말 감사했어요. 이제 아픔이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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