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오늘 이키루를 끝으로 이번 특별전에서 꼭 봐야겠다고 다짐했던 영화들을 다 봤네요

큰 스크린으로 다시 보리라 마음 먹었던 7인의 사무라이를 필두로

멋진 일요일, 쓰바키 산주로,  이키루, 란-까지가 제 목록이었어요

스무 편도 넘는 작품이 들어왔는데 못 해도 열 편은 반드시 보리라,던 각오도 지켜졌군요

아무튼 예술의 전당 지하방 시절부터 영상자료원을 들락거렸지만

여러모로 이번 특별전이 최고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 아직 안 끝났지만)

 

2000년대 초반에 떼아뜨르 추라고, 추상미씨 아버지를 기념하는 곳이라던가 아무튼 스크린에 디비디 상영해주는 씨네마떼끄가 있었죠

거기서 심야영화로 라쇼몽과 꿈을 봤었는데, 라쇼몽은 그 전에 해적판_-으로 이미 봤으니 논외로 치고

꿈을 보았던 기억이 아주 특별하게 남았습니다

영화가 충격적이었다던가 뭐가 대단했다던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건데

만약 내가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다면 이 영화를 보고 엄청난 질투와 좌절을 느꼈을 것 같다는,

실제로 느낀 것도 아니고 만일 그랬다면 그랬을 것 같다는 간접적인 자각조차가 너무 강렬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던가, 무엇을 찍고 싶다던가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을 본 순간 아,하고 알았던 거예요

내가 영화감독 지망생인 어떤 가능세계에서, 내가 만일 단 한 편의 영화를 찍고 싶어한다면, 그게 바로 '저' 영화일 거라는.

그런데 저 영화를 이미 구로사와 아키라가 찍어 놓았으니 그 세계에서 그 론건맨은 얼마나 좌절했겠으며 얼마나 질투했겠습니까

그 모든 구로사와 감독의 걸작들을 다 놔두고 고작 '꿈'이냐고 되물을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 그 영화가 가장 좋았다거나 가장 걸작이라거나 제가 정말로 그런 영화를 찍고 싶어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었어요

다시 생각해도 정말 묘한 느낌이지만 틀림없이,

'나는 영화를 찍고 싶어하지도 않고 저 영화가 특별할 것도 없지만, 내가 영화를 찍고 싶어한다면 그건 틀림없이 저 영화다'하는 돈오의 순간을 맞았을 뿐

 

멋진 일요일은 평일 낮에 봐서 그런지 박수 타이밍에 박수가 별로 안 나오더군요. 전 생겨먹기가 촌스러워 그런지 눈물 콧물 쏙 뺐어요, 아주 그냥.

이키루의 문제적 후반부에선 반 쯤은 라쇼몽이, 반 쯤은 12명의 성난 사람들이 떠오르더군요, 그리고 그 둘의 단순한 합보다 좋았어요, 울다 웃다 눈물 콧물 쏙 뺐네요, 아주 그냥

개인적으로 이번 특별전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요짐보-산주로 연작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스럽나요

어쩌다보니 란을 이제야 처음 봤는데요, 영화가 끝나고 저도 모르게 아아-하는 탄식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초,중반기 영화들과 한 자리에 놓고 보니 일말의 정의와 희망을 남겨두던 시기와 대비가 돼서 그런지 후반기의 그 어둡고 절망적인 세계관이 한층 더 사무치더군요

정말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걸음씩 어긋나면서 모든 게 어찌 손쓸 수 없는 파멸로 치닫기 시작하는데 아아- 감독님,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이후 대담에서 나카다이 다쓰야 옹께서 말씀하시길, 그 시기에 감독님께서 진지하게 인류 멸망설을 논하셨다지요) 

 

그리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치아키 미노루!!!

운좋게 매표소에 30석 정도 남았을 때 티케팅해서 개막전 라쇼몽을 봤는데요

세 번째 보는 건데,  빅스크린에 복원판에 좋은 화질로 보니 또 남는 게 있군요

이전에 볼 땐 별 감흥을 못 느낀 부분이었는데, 재판씬 한 쪽 구석에서 동상처럼 앉아있는 사무라 다카시, 치아키 미노루가 눈에 밟히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치아키 미노루! 뭐라 딱 꼬집어 설명할 순 없지만, 그건 제 평생 보아왔던 중 가장 완벽한 방청객 연기였어요!

나중에는 정작 앞에 나와있는 주인공들이 안 보일 지경, 혼자 웃음 참느라 어찌나 혼이 났던지

마침 개막작에서 배우 하나 얻는 바람에, 이후 작품들에도 재미가 하나 늘었지요, 아아, 치아키 미노루!

 

다음주에 인셉션 보러가기 전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을 보는 걸로 제 구로사와 아키라 특별전은 대강 끝이 날 듯 합니다

사실 란이 지나치게 좋았어서 란다큐도 볼까싶긴 한데, 혹 보신 분 계신지, 무리해서라도 봐둬야 할 작품인지 묻고 싶네요

 

시네마테크에 들어서며 7월을 시작했는데 암전이 걷히고 나니 7월 중순이네요, 영상자료원 덕에 이건 뭐 신선놀음이라도 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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