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마음의 고향 듀게인데, 오랜만에 들어와서 상반기 결산 겸 생존신고 하고 싶은데 제목 그대로 가영님의 저 글을 클릭한 이후 맥북 멈춤 5일째. 가영님 뭘 어떻게 하신 건 아닐 텐데, 저만 이런 건지? 핸드폰으로 글쓰고 있습니다.

저는 지내고 있습니다, 잘은 빠졌지만 잘못도 아닌 채로. 작년에 새로 들어간 직장은,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 만난 격으로 단 하루도 몸고생 맘고생 개고생을 면해본 적 없지만, 해외 어딜 가든 단독 출장으로 미친 불독처럼 해댔더니 가시적인 성과들이 나타나고, 그랬더니 이 더럽고 옹졸한 회사에서도 인정이라는 걸 해주네요. 지금은 해외 지사장으로 나가보면 어떤가 하는 제안이 들어온 상태입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덥썩 받아들이고 두 번 다시 한국엔 안 들어오고 싶습니다만...가지 않더라도 열심히 돌다리 두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늘 내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어쩌면 나는 되지도 않는 예술가 기질보다 비즈니스 기질이 더 뛰어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꽤 흥미롭습니다. 나는 별다른 영업행위를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예상보다 훨씬 더, 나를 그리고 내가 몸 담은 회사 제품에 호감을 갖고 먼저 다가와 기꺼이 신규 바이어가 되어주니 신기하고 고마울 따름이죠.

일전에, 내가 아직도 문학이나 출판 언저리에 잔존하는 줄 아는 누군가로부터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지난 2010년 이후 단 한권의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았던 나는 아무 감흥없이 답변했습니다. 읽지 않았다고(그리고 말은 안 했지만 굳이 읽고 싶지도 않다고) 하지만 그 작가가 너무 잘 쓰고, 매우 성실하며, 많이 겸손한 작가라는데는 이의가 없다고. 큰 상 받을만 하다고.

그 작가와 비교조차 불경스럽지만, 한 때의 나도 그 작가처럼 고된 직장생활에도 퇴근 후면 집에 돌아가 글을 쓸 생각에 부푼 마음 터질 것 같이 언덕배기를 뛰어오던, 밤새 잠을 3시간 이상 자지 못하고 다시 출근을 하던, 내 인생 두 번 다시 살아볼 수 없을 만큼 치열했던 시기가 있었지요.

난 지금 아무것도 되지 못했지만 설령 내가 재능이 없거나, 세상에 하고픈 말이 없거나, 말할 용기가 없었다고 해도, 그래도 그 시절은 내 인생의 가장 큰 훈장이라고, 못 따먹은 신포도를 추억하는 늙은 여우가 지금 내모습이라고 해도 후회는 없어요.

이렇게 하루하루, 의미 없지만 현존하고 있는 걸요. 소설보다 문학보다 더 치열한 현장에서 살아 있는데요. 죽어도 타협 안 될 것 같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양보 못할 것 같았던 사안에도 눈을 질끈 감으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금쪽같은 내 가치들은 마지막 발톱으로 숨겨둔 채, 능구렁이 같이 , 이제야 진짜 어른이 되어갑니다.

가끔 뭐라 종잡을 수 없는 이상한 슬픔과 서러움이 몰려오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요. 인생에 오는 모든 변수는 영국이 탈퇴한 뒤의 유럽연합의 수습멘트처럼 '견딜 만한 충격' 이예요. 나는 지금은 그냥 그래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3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9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85
5918 드레스의 아가씨들 (인형사진 주의) [4] 샌드맨 2016.06.13 761
5917 이번달은 나도 힘들단 말이야... 좀 봐줘라...ㅠ_ㅠ [8] 샌드맨 2016.06.12 2431
5916 캉캉드레스의 아가씨(인형사진 주의!) [6] 샌드맨 2016.06.12 975
5915 [바낭] 좋아하는 록키 엔드 크레딧 둘 [1] 로이배티 2016.06.11 586
5914 듀나게시판 성소수자 모임 '듀게비사이드'가 올해 퀴어 퍼레이드에서 부스를 운영합니다. [12] lgbtaiq 2016.06.08 3390
5913 [바낭] 사상 최강의 에일리언 게임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 잡담 [11] 로이배티 2016.06.08 1593
5912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18] 데메킨 2016.05.31 3687
5911 [섬세하신 분은 스포일 수도] 아가씨 봤습니다 [4] 독짓는젊은이 2016.05.28 3791
5910 출격! 2호냥 Mk-II ! [4] 샌드맨 2016.05.28 1001
5909 광주 1박 2일 여행 후기 (부제: 듀나인 감사해요) [13] 13인의아해 2016.05.14 1876
5908 한달만에 재개된 그림을 배우고 있어요 30 [8] 샌드맨 2016.05.12 1032
5907 좋아하는 배우- 로빈 라이트 [5] 계란과자 2016.04.22 3014
5906 날 보러와요를 보고... 라인하르트백작 2016.04.12 843
5905 EBS 고전 극장 <십계> [6] 김전일 2016.03.25 1024
5904 오늘 넷에서 가장 유행할거 같은 짤 [3] soboo 2016.03.24 2410
5903 4월은 작가와의 대화, 탁재형PD [6] 칼리토 2016.03.23 1063
5902 오랜만에 이것저것.. [3] 라인하르트백작 2016.03.13 1536
5901 [gif] 바닷마을 다이어리 자작 움짤 [7] 셔럽 2016.03.12 1800
5900 연휴 끝, 일상으로.. [14] 칼리토 2016.02.10 2171
5899 [최근 상영작 간단후기] 헤이트풀 8, 레버넌트,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샤이닝 [16] 프레데릭 2016.02.03 234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