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5일 르네 클레망의 '금지된 장난'
2015년 3월 15일 김현석의 '쎄씨봉'
2015년 3월 17일 다미엔 차젤레의 '위플래쉬'
2015년 3월 24일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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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네 클레망의 '금지된 장난'은 꽤나 조용하고 잔잔하게 한 전쟁고아의 궤적을 쫓습니다. 저 보고 이 영화가 재밌었냐고 누군가가 질문한다면 저는 그다지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이 아이의 비극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느낌으로 다루어지고 있고, 꼬마여자아이가 우연히 맞부딪친 한 농가의 남자아이 집안은 전쟁에 휘말린 프랑스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죠. 아이들 특유의 순수함과 낭만성은 살아있지만 결국 그건 철저히 파괴되고 붕괴됩니다. 그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라서, 딱히 더 붙일 말도 없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견지하는 냉정한 시선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습니다. 왜인지 이 영화는 저에게 전쟁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같았달까요..? 딱히 이 영화를 비난하는 의도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2. 김현석의 '쎄씨봉'을 보면서, 젊은 3인방 역할을 한 사람들의 가창력에 놀라웠습니다. 어찌 그리 느낌도 비슷하고 노래도 잘 하던지요. 그렇지만 한효주의 연기는 영 별로였습니다. 배우 자체의 문제보다도 진부한 캐릭터를 준 제작진들의 잘못이 커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한효주 연기보다 제일 큰 문제는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진짜 그게 뭐야 결말이... 하도 진부해서 초중반의 노래의 감동까지 다 앗아갈 정도더군요;;

3. 다미엔 차젤레의 '위플래쉬'를 영화관에서 보았습니다. 아주 잘 만든 영화더군요. 사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초반부터 후반까지 강력한 긴장감으로 몰아가는 영화는 지쳐서 잘 못 보는 편입니다. 주인공의 또라이적인 근성과 끈기는 정말 감탄이 나오긴 하더군요. 저런 사람들이 진짜 예술의 경지로 갈 수 있겠구나 싶기는 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해도 기어이 기어 들어가서는 자기가 자기 능력을 보여줘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소리지르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주인공 한 번 엿먹이겠다고 난리를 치는 치사한 스승이나 살아있는 인물들이죠. 이 영화는 보편적인, 보기 좋은 사제 관계를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유의 매력점을 가집니다. 스승이 항상 군자여야 한다는 것은 공자님도 이상으로 이야기하신 거고, 실제 사제 관계는 그런 식으로 구현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의 선을 사이에 두고 복잡미묘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관계가 사제관계죠. 게다가 스승이나 제자나 둘 다 상식적이거나 흔한 종류의 인간들은 아닙니다. 스승은 예술의 경지로 다다르거나 아니면 인정 받기 위해서는 윤리적인 선 따위는 안 지켜도 충분하다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이고, 제자는 최고가 되기 위해서 여자친구도 마다않는 보통 기준에선 저 멀리로 날아가버린 인간입니다. 즉 둘을 붙여두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건데, 이 화학반응은 끊임없는 신경전과 불편함만을 양산시키죠. 이 관계는 전개 내내 불편하게 지속되고, 이 억압은 관객들로 하여금 갈증을 유발시킵니다. 대체 언제쯤 제대로 된 연주가 나오냔 말이지! 그렇게 관객이 수분에 목말라 할 때, 딱 맨 마지막에 제자가 기 센 스승을 역공격하면서, 그 둘의 더럽고도 치사하고 짜증나는 관계가 종점에 다다른 순간에도, 예술의 경지가 드럼연주에서 새어나오자, 모든 것이 잊혀지고 용서되는 공연이 시작됩니다. 드럼비트가 하나하나 연주되고, 경쾌하고 파괴적인 음악과, 인간적 감정마저 휘발시킨 채 집중한 스승의 얼굴표정, 희열 속에서 자신의 혼신을 쏟아붓는 그 모습이 바로 관객이 갈구해온 카타르시스를 영상화합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그 때 우리는 결과따위는 상관없이, 그저 그 자체에 만족하게 되죠.
  잘 만든 영화고, 좋은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제 취향과는 좀 거리가 있었어요. 개인적인 취향이라서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저는 죽은 듯이 관조하는 흑백영화가 좋아서요.

4.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은 진짜 왜 명화로 칭송받는지 알겠더군요. 잉마르 베리만 본인 성격이 원체 지랄맞았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거진 그의 영화들에서는 인간에 대한 굉장한 애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의 다른 작품인 '산딸기'도 매우 좋아합니다. 제7의 봉인 영화에서 초반의 사신과의 체스장면은 정말 기가 막히게 아름답습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사신과 두는 체스는, 어찌 되었든 결국 인간의 철저한 패배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을 상실한 기사는 신을 애타게 부르짖고, 그의 이유를 향해 고뇌하지만 그를 따르는 종자는 철저히 세속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그 모든 것들, 전쟁, 질병을 보아놓고서도 아직도 신을 찾냐는 식으로 회의적인 입장만을 견지하지요. 기사는 굉장히 고매한 사람이고, 고뇌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사신과 체스를 두는 이유도 단순히 자신의 죽음을 미루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끝나가는 삶에 마지막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상당히 고차원적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우연히 만난 광대 가족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데, 광대 가족은 소박하고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입니다.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고, 필요로 하고, 아이도 마찬가지죠. 기사는 광대 가족에게까지 사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도피시키고, 자신과 종자,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사신에게 손이 묶여 질질 끌려가게 됩니다. 저는 잉마르 베리만이 보여준 영화의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평화롭고, 안온하고,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미친 듯이 진지하기만 하죠. 이러한 그의 형식 때문에 영화가 재미없다고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저한테는 꽤나 아름다웠습니다. 한 여자를 마녀로 낙인찍고 괴롭히는 사람들과 그 사이에서 그 광기를 꿰뚫어보는 기사와 종자, 두 사람도 매력적인 인물들입니다. 숭고하면서도 세속적인 인물들이죠. 그들의 고민은 가치를 지닙니다. 그들은 니체가 비웃은 군중의 집단 속성에서 거리를 둔 채, 끝없이 회의하죠. 하지만 그 회의가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에서 이야기되는 그 '인간성'이 좋습니다. 우리는 욕망으로만 가득차서 이 인간과 자고, 그 다음에 남편에게 쫓기다가도 다시 용서받는 지지부진한 이야기에 갇힐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인물들이 실제로 영화에 나오기도 하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사와 같은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단순하거나 가볍지 않고, 무거워 질 수밖에 없지만 필연적으로 의미 있어지는 그런 길이요. 
  우리 모두는 죽음과 체스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시해버리고 있다가 죽음의 역습을 받기보다는, 끝없이 긴장하며 자신이 당연하다는 듯 갖고 있는 삶에 대해 질문하고, 그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삶이 더 잘 사는 삶 아닐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잉마르 베리만도 저랑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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