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호주는 시차가 2시간 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해요.  도착후 만하루가 지난 오늘 오전까지 시간의 축이 뒤틀린 느낌이 좀 버겁더라구요. 


지난 토요일 인천발 시드니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은 오후 3시 즘이었고

어두운 밤하늘에서 적도를 지나 뉴기니를 통과할 즘 밖이 밝아오는데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일요일 오전에 도착한 낯선 나라의 낯선 도시 그리고 잠을 자지 못한 채 맞이하는 낯선 하루와 낯선 시간

아마 공황장애가 있었으면 산산조각 났을지도 모르는 상태였고  다시 또 불면의 밤을 보내고


그런데 놀랍게도....

월요일 오늘 오후 한달여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고 4시간이 넘는  미팅을 끝내고 나니  그제서야 긴장이 풀리고

컨디션이 회복되기 시작하더군요.


그 4시간이 시작되기 직전만 해도 엘리베이터 터치스크린을 누르면서 또 그 터치 스크린을 소독하는 사람을 보면서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마다 악수를 나누고  또 새로 소개 받은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권하는 커피를 마시고 물을 마시면서

내내 코로나19 노이로제에 가슴이 두근 구근하는걸 견디느라 이러다가 쓰러지는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는데


막상 미팅이 시작되고 익숙한 도면과 사진들 그리고 흥분되는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보기 시작하면서는

다른 아무 생각이 나지 않더군요.  


보통 이렇게 영어와 중국어가 난무하는 틈에서  두어시간만 미팅을 하고 나면 녹초가 되는데 이번에는 되려 충전이 막 되는 느낌이 들더군요.


아 이런게 일상의 힘인가 싶었어요.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은  찌질하고 남루했지만 코로나19가 창궐하던 한달의 시간을 보내고

맞는 일상성의 회복에서 조우한 ‘생활의 발견’은 감동적이고 아름다웠습니다.


* 어제 다른 분 글에 댓글로 썼던 것을 일부 따서 여기 추가합니다.

  그 내용에서 의식의 흐름대로 연결되는데 혹시 안본 분들은 좀 틈이 느껴질 지도 몰라서요


—————————


저 같은 경우는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현실이었어요. 

지난달 상해에서 귀국하던날 출발 당시에는 상해에서 확진자가 나오기 전이었고 

국내에서도 아직 환자가 나오기 전이었어요.  

그래서 귀국해 이 삼일 정도 원래 예정된 일정을 소화했는데 나와 같은 날 우한에서 상해를 경유하여

입국한 남성이 확진 판정을 받고 나서부터 지난 한달간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어요.  

말씀 하신 비난을 당할 걱정이 아니라, 

혹시라도 내가 감염이 된거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것일까 하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이죠.  


실제 14일간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가격리를 해버렸어요. 이미 잠복기도 한 참 지났지만 여전히 부담감이 따라 붙어요.

저 뿐만 아니라 상해에서 연락을 유지하며 가끔 보던 지인들 모두 설을 맞아 국내로 들어와서 다들 알아서 자가 격리를 했더군요.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 볼때 몇몇 무책임한 케이스를 보고 혀를 찰 수 밖에 없지 않겠어요?  


게다가 나는 현재 또 한국을 떠나 제3국에 들어와 있고 오는 동안  출발지와 경유지 포함 총 3개의 공항을 거쳐 왔어요. 

까놓고 말해 내일부터 진행될 일정에서 현지 파트너들이 나와의 미팅을 보이콧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입니다. 

지금 한국 역시 위태로운 상태니까요. 

일주일 사이에 500명이 넘는 환자가 새로 발생한 나라에서 온 사람의 여권을 맨손으로 받고 보딩체크인 해주고

호텔 카운터에서 나의 바우처와 여권을 또 맨손으로 받아주고 키카드를 내주던 분, 피니쉬한 접시를 치워주던 사람들의

얼굴도 아마 다시 또 이 주 넘게 절 짓누르게 될거에요. 

예정된 일정을 다 소화 하고 다시 귀국을 하더라도 한 일주일간은 여기서 만났던 사람들의 안위가 걱정되고 불안하여 또 다시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될거에요.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세상은 이렇습니다.  


—————————-


그저께만 해도 혹시 한국에 대해서도 호주 정부가 입국금지를 하는 바람에 출발조차 못하는건 아닐까

호주에 도착한 이후에 입국금지가 떨어져 격리되는건 아닐까 (이스라엘에서는 실제 벌어진 일입니다)

그런건 없더라도 오늘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모두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한국인은 저 한명) 피하지는 않을까, 두려워 하지는 않을까

아니 그런건 없더라도 내가 혹여 그들에게 피해를 주진 않을까 전전긍긍 했었어요.


저녁을 먹으면서 편하게 수다를 떨어보니 그들 모두 한국에서 코로나19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걸 이미 잘 알고 있더군요.

그러나 일부 지역과 집단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양상이고  한국정부가 매우 잘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중국인 파트너들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지역에 대해 ‘우한’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하니 바로 이해를 하더군요.

호주쪽 파트너들은 절대 이야기를 코로나19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요. 아마 비지니스 매너였을거에요.  

그들이 오늘 보여준 배려에 너무 감사했어요. 


덕분에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일을 하고 한달간 멈추었던 프로젝트에 대한 열정도 다시 켜지고


전세계에서 코로나19로 인하여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모든 사람들에게 건투를 빌고 응원합니다.

특히 전염병에서 최악의 ‘사고’가 터지고 여러 사회, 정치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뚜벅뚜벅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나가고 있는 우리나라 방역당국에 진심 감사하고 응원을 보내요. 


한편, 개인적으로 이제 한숨 돌리고 나니 가족이외의 사람들을 포함해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걱정을 하게 됩니다. 

차이나 타운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 오는 길에 기차역 근처를 지나면서 길바닥에 이불을 깔고 드러 눕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봤어요.

이미 가보았던 유럽에서도 흔히 보던 풍경이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는데...

문득 그 전부터 일상이 이미 충분히 힘겨웠던 사람들은 이 코로나19의 와중에 얼마나 더 힘들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건 분들에게까지 충분히 사회적 안전장치가 멈추지 않고 제대로 작동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왠지 그런거 같다는 기대도 들고요.

아니라면 찾아내어 목소리를 대신 내주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 믿어요.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저부터 그렇게 해야겠죠.


희망과 낙관은 빠르게 이 질병을 통제하고 더 이상 확진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것보다 

현재의 문제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이 흔들림 없이 올바르게 나아가는데서 느껴지는거 같습니다.


‘별일 없이 사는’ 날들이 어서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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