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에서 보내는 머나먼 추석

2012.09.30 12:16

settler 조회 수:2315

명절을 원래 싫어해서 결혼 전에도 차례를 지낸 후엔 엄마를 졸라 명절을 잊기에 제일 좋은 커피 가게에 가서
차 한 잔 마시고 오는 게 버릇이었어요. 추석 전날 전 부치고 기름냄새 폴폴 풍기며 뛰쳐 나가서 친구랑 영화 보고 오기도 했구요
엄마한테 욕은 좀 먹었지만 참 좋은 명절 디톡스였어요


결혼을 하고 나선 다들 그렇듯이 어른들한테 인사도 많이 드려야 되고 간만에 착한 척도 제대로 해야 하는

명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구요 


그런 게 아니더라도 명절은 평소에 잊고 지내려고 애쓰던 것들이 택도 없다는 듯

주변을 압박하며 그 경계를 밀고 들어오는 게 진심으로 무겁고 답답했어요

안 만나던 사람도 만나야 하고 마음에 없는 말도 해야 하고 또 들어야 하고요.

그래서 처음 미국에 와서 남의 명절을 축하하고 놀 땐 생활감이 하나도 안 드는 명절이라

그냥 좋은 놀이 핑계 같고 좋았지요

쇼핑도 할 수 있고 기름진 음식도 많이 먹구요 


그런데 이짓을 3년째 올해 타지에서 축하하는 추석은 아주 조금 쓸쓸하네요

그렇게 탈출하고 싶었던 것들의 중앙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건 아닌데요

그냥 그렇게 나를 옥죄던 것들이 이렇게 멀어졌는데 그게 다 좋은 것만은 아니고

아주 조금 버려진 느낌 -_- (듀게도 텅 빈 것 같고 흑)


시댁에 갔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느끼던 해방감이랑 창밖 풍경 같은 게

그리운 것도 같고 그래욧 시댁에 갔다 친정에 놀러 가서 엄마랑 오빠랑 동생이랑 티비도 보고 과일도 먹고

친구들을 만나 명절 후일담도 하고 그랬던 별거 아닌 기억도 막 소중하게 느껴지구요

착한 척 예쁜 척하던 일박이일에서 해방되어 내 멋대로 드러눕고 말도 못되게 하고

동생이랑 겔겔대며 만끽하던 자유란 늘 주어지던 자유보다 훨씬 훨씬 달콤했어요


명절은 그냥 없었음 좋겠어요 아 마음 복잡해;

명절 연휴가 끝나고 회사에 가서 동료들을 만나면 아 드디어 일상으로 복귀했구나 싶어

덥썩 반갑기도 하고 그랬더랬죠. 


나이가 들고 또 고향을 떠나 있어서 그런지 그리움이란 감상이 점점 더 버거워요


이상 재외국민이 느끼는 추석 감상이었습니다.

다들 맛있는 거 많은, 좋은 명절 보내세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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