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이후 마음 다잡기.

2012.12.20 02:51

멀고먼길 조회 수:1134

 사실 좀 조마조마하긴 했습니다. 지난번 대선과 비교하긴 좀 애매합니다. 그때는 정동영씨를 지지했던 쪽에서도 '그런데 왠지 우리 좀 망할것 같음 ㅋ'같은 분위기가 은근히 맴돌고 있었지요.

오히려 이번 대선은 노무현씨가 극적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 때의 공기를 따라가는 듯 했습니다. 극한으로 치닫는 레이스가 계속 되면서 사람들은 점차 평정심을 잃어갔고, 

승리에 대한 섣부른 기대와 함께 패배가 불러올 어떤 사태에 대한 공포감도 급속도로 퍼졌죠. 물론 그때는 어느 부자의 '현명한' 선택에 의해 노무현씨의 드라마틱한 승리로 끝났지만요.

조심스럽게 30만표 정도 차이로 박근혜의 신승을 예측하고 있었던 저는 김소연씨와 김순자씨 중에 누구를 찍을까 고민하다가, '그래, 가까스로 이기는 예측이라면 가까스로 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부재자투표를 통해서 결국 문재인씨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일찍 일어나 젊은 사람들이 투표소로 몰려가는 광경을 보면서 '뭐...잘하면 내 예상이 빗나갈수도 있겠네'라고 생각했지요.

들뜬 마음을 정리하고 차분히 [레미제라블]을 보러 갔다가 더 울컥해져서 나오기도 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고 궁시렁궁시렁...

여하튼 일말의 불안감과 일말의 기대감을 함께 가지고 개표를 지켜보았는데, 이게 뭡니까 도대체...뭐긴 뭐야 코스믹 호러지


 아무튼 이번 패배는 축출당한 권위주의 체제의 유산을 공식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재소환했다는 점에서 한국정치사에서 '기념비적인' 지점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국민의 수준'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야당의 삽질에 대해서 논하겠지요. 트위터에서는 섣부르게 "이게 다 표를 뺏어간 좌파때문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더군요(좌파 탓은 더 이상은 NAVER...)

캔맥주를 홀짝이면서 가만히 생각해 봤습니다.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싸움에서 시종일관 무력하게 끌려다니다 진 이유는 뭘까?'

제가 생각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시대정신의 부재'가 아닐까 합니다. (이념, 비전, 사회정의 등등 여하간에 비슷한 범주의 단어는 다 넣을 수 있겠네요.)

사람들이 이명박씨를 대통령으로 추켜세운 이유는 ys-dj를 거치며 축적된 민주정부에 대한 피로감에 민주화세대의 마지막 아이콘이었던 노무현씨를 필두로 한 열린정부가 결정타를 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긴 불황을 겪었고, 중간계급(계급이라는 범주로 정확히 묶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이 박살 났고, 정치적 혁신도 뚜렷하게 이루어내지 못했고,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도덕성마저도 흠집이 갔죠.

노무현씨가 퇴임이후에 운영하던 사이트 게시판에 "나의 정치는 실패했다."라고 글을 쓴 그 순간에, 87년체제가 함의한 시대정신은 라그나로크를 맞이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열패감과 기존체제에 대한 반발감에 강하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사회적 공허를 채워줄 새로운 시대정신을 요구하게 되죠.

'해봤는데 다 말아먹었으니, 그 말아먹은 걸 다시 되찾아올 누군가가 필요하다!' 라는 욕구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대선 후보가 아마 기업가 출신인 - 그리고 '성공한 기업가'로 알려진 - 이명박씨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죠, 잃어버린거 찾아오라고 일을 맡겨놨더니 이 분이 집안 기둥뿌리를 뽑아서 가출을 해버렸다는 겁니다.

'해봐서 안되길래 복구시킬 사람을 찾아왔는데, 얘는 더 막장이네...뭐가 뭔지 모르겠다 ㅅㅂ 밥은 먹고 다니냐 ' 가 된거죠.

멘붕에 빠진 한국사회에 세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과거의 권위에 다시 의존하느냐, 87년체제의 잔재를 긁어모아보느냐, 혹은 가지 않았던 길을 가보느냐 하는 것이죠.

그리고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문제는 이 '권위'가 작동하는 방식이 현재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민주주의체제와 아귀가 잘 맞느냐 하는 겁니다. 물론 여러가지 그럴듯한 디테일이 있죠.

생애주기어쩌고 하는 복지모델이나, 단계적 사회보호망 확충같은 공약들이 그것입니다. 

통합과 상생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죠. 뭐, 전 여전히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통합이 아니라 선명한 분열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뭐가 어떻게 쪼개져 있는지 알아야 접합점을 제대로 찾죠.

하지만 통합이나 상생이 그렇게 나쁜 단어는 아니거니와, 또 정치인이 그런 말을 하면 뭔가 있어보이지 않습니까. 통합하겠습니다, 통합할거에요, 통합하구말구요

안타깝게도 사람은 경험에 기반해 추론이란걸 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우리는 과거 이 권위의 수호자들이 복지와 사회보호망을 외쳤던 사람들을 뭐라고 불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복지왕?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통합이 사상의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들과 대화와 설득을 통한 민주적 통합이 아니라 국가보안법, 아청법, 집시법, 비정규직 등의 많은 필터들을 통해 걸러진 '국민'들만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죠.

이들의 부조리한 속성이 칼이 되어 내 삶의 터전을 난도질 할 것임을 알아버렸을 때 우리는 분노를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가 분노를 표했을때 그들은 기꺼이 그 칼날을 우리에게 겨냥할 것임을 알아버렸을때 우리는 공포를 느낍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음 5년동안 기꺼이 그들의 '국민'이 되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5년 내내 분노와 공포 사이의 어딘가를 배회해야 하겠죠. 그래요,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겨울은 언제나 끝이 납니다. 그리고 겨울이 끝나면 봄이 찾아오죠. 하지만 다음엔 김문수가 오겠지

87년체제가 남긴 뼈대는 여전히 공고하니, 아마 다음 5년 동안에도 우리를 지켜줄겁니다. 물론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틀이 우리를 권위주의로부터 적극적으로 지켜주는 보호처인 동시에, 우리가 지켜야할 최후의 보루인 걸 잘 알고 있죠.

하지만 우리가 언제까지고 열패감에 빠져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거나, 혹은 살아남는것만을 바라보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시대정신이고 나발이고 간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여전히 마음을 다잡고, 눈을 부릅뜨고, 때때로 싸우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문을 보고 책을 읽고 인터넷에 글을 쓰고 의견을 나누고 항의를 하고 거리에 나서고 투표를 하고 어떤 것은 사고 어떤 것은 사지 않고 하다못해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해야 합니다.

나는 국민이기 이전에 시민이고, 또 인민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똑똑히 각인시켜야겠지요.

우리가 자유인으로서의 의무를 기꺼이 짊어졌을 때, - 우석훈씨의 말을 인용해서 끝을 맺자면 - 우리는 결코 지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지는 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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