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부인의 말이 웃겨요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5대 의혹'
항복하는 장군 모습, 일본도, 중국갑옷, 얼굴
독전고(督戰鼓)에 대한 문제점


문상모 서울시의원은(민주당, 노원2)
23일 서울시가 ‘짝퉁’ 이순신 장군 동상 재설치를 기념하는 행사에
해군 의장대와 군악대가 참석하는 것을 비판했다.

문 의원은 비판 내용은 이렇다.

“해군이 서울시의 ‘짝퉁’ 이순신 장군 동상 재설치 기념행사 참석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해군은 오히려 패장의 모습을 취한 이순신 장군 동상을 안타까워하고,
본래의 승리한 장수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성웅 이순신 장군은 세계 해군사에 전무후무한 불패의 영웅인데,
동상은 칼을 뽑지 못하도록 검을 오른손에 쥐여 놨고,
승전을 고무했던 격전고는 넘어뜨려 놓았다.
해군은 해군 의장대와 군악대의 서울시 행사 참석을 수치로 알고,
병사들이 바른 민족역사관 및 국가수호정신을 되새길 수 있도록 지휘해야 한다.

군의 ‘충성’은 국가보위를 최우선 순위에 둔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건전한 군대의 윤리의식은 ‘조건 없는 복종’을 충성으로 보지 않는다.
때문에 상급자가 불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명령을 내릴 경우
하급자는 상관에 대한 불충 때문이 아니라 더 큰 가치,
즉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할 수 있다.

해군은 이런 진짜 충성을 상기해야 한다.
불의한 역사 청산, 곧은 국가정체성 확립과 거리가 멀다면 한사코 거절해야 한다.
서울시의 행사참석 요청을 단호히 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이순신 장군은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한치라도 훼손하는 항해에는
절대 나서지 않음으로써 그의 충성을 드높였다.
대양 해군의 선구자였던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분명히 왜곡됐음에도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대한민국 해군으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문 의원은 비판에 그치지 않고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 관한 5대 문제점을 제시했다.

◇ 이순신 장군은 항복하는 장군의 모습?

이 문제의 핵심은 칼을 오른손에 들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칼을 뽑을 수 없는 모습이고
이는 항복한 장수로 오인될 수 있다.

김세중 측은 이 점에 대해 “장군이 왼손잡이일 리는 없지요.
왼손에 칼을 쥐고 있다 오른손으로 뽑는 게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쟁 때의 상황입니다.
동상의 개념은 전쟁이 끝난 뒤 이긴 자의 모습입니다.
오른손으로 뭔가를 쥐고 있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해명은 광화문 동상이 아닌
이순신의 다른 동상 혹은 영정 등과 비교할 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발언이다.

이당 김은호가 그린 한산도 충무사 영당에 봉안됐던 이순신 영정 중
유일하게 갑옷을 입고 있다.
977년에 정형모 화백이 그린 그림이 한산도 충무사에 봉안되면서
김 화백의 그림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전된 상태다.
김세중은 동상 조성 당시
“갑옷의 모양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이순신 장군 영정을 참조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영정에는 칼이 왼손에 들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갑옷만을 참조했다’는 김세중의 진술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왜 이당의 영정과는 다르게 오른손에 칼을 잡은 모습을 표현했는가 하는 것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과연 김세중 측의 말처럼
“전시가 아닌 평화의 시기”를 상징하기 위해 그렇게 된 것인지,
“단순한 작가의 불찰”로 인한 것인지는 생각해볼 문제이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의 5대 문제점

◇ 이순신 장군의 칼이 일본도?

이순신 장군의 칼이 일본도라는 지적에 대해 김세중 측은
“현충사의 칼은 일본도가 맞습니다. 197.5㎝나 되는 긴 칼에 대해서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에 끌려갔던 도장(刀匠) 태구련(태귀련 혹은 태귀운이라는 설도 있다),
이무생이 장군에 잡혔어요. 장군은 “첩자가 아니냐”고
문초한 뒤 칼 두 자루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일본에서 일본도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일본도는 당시로서는 최신예 검(劍)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상의 칼은 현충사 칼을 모델로 했지만 실제 비율보다 축소한 것”이라라고 대답하고 있다.
또 “칼이 한국의 검이냐 일본도냐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칼 자루에 석자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의 색이 변하도다.
한바탕 휘둘러 쓸어 없애니
강산이 피로 물드는구나(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라고 적혀 있다”고 말한다.
현충사의 이순신 장검이 지닌 본연의 의미,
‘일본을 물리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강조되어야 하지
‘일본도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현충사에 소장된 보물 제326호 이충무공(李忠武公) 장검은
조선식 쌍수도(雙手刀)에 속하며 무예도보통지에 의해서
장검·용검·평검이라고도 불리며,
칼날의 길이 5척, (동호인 1척), 자루 1척 5촌. 7척짜리도 볼 수 있다.

이 칼은 실전용이 아닌 의전용 칼이므로 길이가
1미터 97센티, 칼집에 넣었을 때는 2미터를 넘는 크기이다.
만약 이 칼을 집었다면 당연히 키보다 높은 칼을 묘사해야지
허리 정도까지 오는 칼로 표현될 수 는 없다.
허리에 차는 칼, 혹은 그보다 작은 칼을 묘사하려면
이순신 장군이 패용한 실전용 칼 ‘쌍룡검’을 묘사해야한다.
그럼에도, 이순신 장군의 장검의 길이를 축소, 일본도를 만들어 놓고
‘현충사의 칼’이 일본도 라는 변명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이 들고 있는 장검(長劍)은
보물 제326호 이충무공(李忠武公) 장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길이뿐만 아니라 칼날의 곡률(曲率)을 보더라도 이충무공 장검이
상당히 큰 곡률을 갖는데 반해서 세종로 동상의 장검은
거의 직선에 가까울 정도로 곡률이 작다.
동상의 칼은 일본도 혹은 일본도의 변형일 뿐이다.

◇ 이순신 장군의 갑옷은 ‘중국 갑옷’?

조선식 갑옷은 두루마기처럼 입는 형태로 만들어지고,
중국식 갑옷은 덮어쓰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어깨 부분이 조각으로 덮여져 있다는 점을 볼 때,
조선식이 아니라 중국식 갑옷인 점이 명백하다.

김세중 측은 자신의 과오로 이순신 장군의 갑옷이 중국식으로 표현된 것을
‘갑옷의 모양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이순신 장군 영정을 참조했고
복식 전문가인 석주선씨의 고증도 얻은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김세중은 정확한 고증과 연구를 거치지 않고
그저 조선 왕릉의 무인석(武人 石) 몇점을 참조했을 뿐이란 소문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복식 전문가의 조언을 얻었다면 이당의 초상이 중국식 갑옷임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 동상이 얼마나 ‘객관적 고증과 연구’ 없이
진행되었는가를 바로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 이순신 장군의 얼굴은 왜 표준영정과 다른가?

광화문 동상의 얼굴을 놓고도 지적사항이 많았다.
특히 현충사에 걸려있는 국가 표준영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김세중 측은 “장군의 실제모습을 전해오는 영정은 없으며,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께서 그리신
이충무공의 영정이 1968년 광화문 충무공동상이 제작된 지 5년 후인
1973년 이순신장군의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김세중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서 인용)”고 변명했다.

나아가 조각가인 김세중과 비슷하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이에 아내인 김남조 시인은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가 다빈치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예술가들은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한다고 하지만
작가와 닮았다는 말은 가족 입장에서 할 수는 없는 겁니다.
나라의 큰 인물과 비교할 수 없지요”라고 대답한다.


김세중 측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현충사의 이순신 장군 초상이 ‘표준 영정’이 된 것은 동상이 제작된 지 5년 후인
1973년의 일이므로 참조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표준영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김세중은 조각상을 건립하면서 당시에 존재했던 이순신 장군의 영정 중
아무것도 참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밝힌 것이다.


조각가가 얼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영정도 참조하지 않았다는 점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철저한 고증과 연구’를 거치지 않고 본인 임의로 판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상, 초상화와 같은 작품은 ‘작가의 개성’을 억제하고 역사적 고증에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임이 다 아는 사실이다.
당시 유명한 영정들과의 비교연구 없이
1973년에야 ‘표준영정’이 지정되었기 때문에 참고하지 않았다는 말은
옹색한 변명에 불과하지 않을까.

나아가 김세중 측이 “예술가들은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초상화 혹은
동상을 제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적절치 않은 듯하다.

안중근 혹은 유관순의 얼굴을 그리거나 제작할 때,
제작자의 얼굴과 닮아 버린다면
사실을 전달하려는 제작의 목표와 심각하게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순신 장군의 얼굴이 김세중의 얼굴과 닮았다’는 질문에 대해
“예술가들은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한다”는 답변은 받아들일 수 없다.

◇ 장군이 지휘하는 북은 왜 누워 있는가

전장에서 북은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의 지시이다.
이에 전장의 북을 ‘독전고(督戰鼓·전투를 독려하는 북)’라고도 부른다.
평화 시에도 북은 전쟁을 예고하거나 사람들을 불러 모을 때 쓰인다.
설화에 나오는 ‘자명고(自鳴鼓·스스로 울리는 북)은
낙랑국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주는 국방의 상징이다.
그런데 광화문 동상 앞의 북은 옆으로 누여져 있다.
따라서 전쟁을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모습을 연상시키지 못한다.


이는 전장을 독려하고 군사를 호령하여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낸 ‘용맹한 이순신’의 이미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군의 탄환을 맞은 뒤,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한 뒤,
조카인 이완에게 ‘계속해서 북을 쳐 전쟁을 독려’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일 새벽, 이순신이 한창 싸움을 북돋우다가 문득 지나가는 탄환에 맞았다‥‥
때에 이순신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곧 시체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직 이순신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와 회와 완, 세 사람만이 알았을 뿐
비록 친히 믿던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그대로 기를 휘두르면서 독전하기를 계속했다.(충무공 전서의 이분 행록)


민족의 가슴 속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 최후의 모습,
혹은 불패의 장군으로서 지휘하는 모습을 형상화하지 못하고
북을 뉘어 놓은 것은 ‘최악의 실수’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세계일보.박찬준(기자)2010년12월23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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