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듀게분들은 혹시 동네에 특별히 좋아하는 커피숍이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저희 집 근처 지하철 역 3번 출구 옆에 있는 2층 커피숍이지요.

친구와 함께 처음 그 커피숍을 갔을 때가 생각이 납니다.

이른 아침이었고 며칠간 잠을 설친 탓에 저는 매우 피곤하고 다소 예민한 상태였지요.

이 동네가 초행인 친구를 마중나간 지하철역 근처에 있던 그 커피숍에 들어간건 우연이었습니다.

별 생각없이 커피숍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이 말이 먼저 나오더군요.


나: ...우리 다른데 가자.

친구: 왜? (아침부터 저를 도와주러 여기까지 와서 피곤한 상태)

나: 왜냐고?

친구: 어. 왜?? 

나: 왜냐고?? 여길 봐봐. 여긴 끔찍해.

친구: 아 또 뭐가? (진절머리)

나: 커피숍 이름부터가 미국의 지명이잖아! 더 설명이 필요해?

친구: (또 시작이야) 

나: 게다가 넌 독일인이잖아! 미국 이름의 커피숍에서 독일 커피(도이치 커피)를 팔 것 같애?

친구: 도이치...커피...?

나: ...오! 미안. 더치 커피구나. (농담 실패)


갑자기 빵터져서 웃는 친구덕분에 한껏 날카로워진 분위기가 좀 잠잠해지고

유야무야 주문까지 해서 결국 우리는 커피숍 바깥의 하나뿐인 테이블에 앉아 담배나 피우며 커피를 기다리게 되었죠.

그러다 저는 화장실에 가기위해 커피숍의 2층을 할 수 없이 올라갔다 왔는데 이 말이 또 나오더군요.


나: ...우리 다른데 가자.

친구: 또 왜?!

나: 아까 너 저기 1층에 커다란 산토리니 전경이 프린트된 벽지로 벽면 가득 채워놓은거 봤지? 근데 이 커피숍 이름이 뭐였지? 'ㅇㅇㅇㅇ(미국 지명).' 난 산토리니가 미국에 있는지 몰랐지 뭐야. 하.하. 바닥엔? 테두리가 금박인 싸구려 프로방스 스타일의 타일이 덮여있어. 나머지는 창백한 히노끼 우드로 마무리하는 일본풍으로 데코레이트되어 있고. 근데 이 커피숍 이름이 뭐였다고? 'ㅇㅇㅇㅇ(미국 지명)' 오 이것 참 알맞는 이름이지? 거기다 그거 알어? 저 큰 산토리니 사진을 자세히 보면 엄청 많은 LG 에어컨을 찾을 수 있어. 와 낭만적이지!

친구: 너 손까지 떨고 있는거 아니 친구야. 나 좀 무서워지려고 그래.

나: 2층은 어떠냐고? 천장에는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에 나오는 펍에서 본 것같은 거대한 팬이 돌아가고 있어. 근데 여기저기에 있는 화분은 엘레강스한 푸른 도자기로 만들어져 있고 거기엔 난을 키우고 있다고! 근!데! 그 이상한 동양 무술 차이니즈 도자기 뭐시기 옆에는 캘리포니아라고 적힌 커다란 표지판이 서 있어! 

친구: 난이 뭐야?

나: 계단 뒤에는 빔프로젝터가 켜져있는데 거기에 뭐가 나오고 있는줄 알아? MBC!

친구: 알았어. 알았어.

나: 그 옆에 액자에는 무슨 그림이 있는지 알아? 흑백 꼴라쥬! 브루클린 브릿지랑 뉴욕 타임즈 프론트 페이지가 막 섞여있는. 그 옆에는? 에펠탑 사진! 


그렇게 시큰둥한 친구를 두고 가히 코스모폴리탄적인 인테리어에 대한 분노를 한참동안 늘어놓고 있는데 진동벨이 울리더군요.

쾡한 얼굴을 하고 비적비적 걸어가 커피 쟁반을 잡으려는데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고 그때 저를 보고 살짝 미소지어 주시더라구요.


사장님: 시나몬은 여기 있어요. (제가 카푸치노를 시킴)

나: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 근데 이 시나몬 가루 더 뿌려 보시는건 어떠세요? 저희 시나몬 가루가 간이 되있어서 일반 시나몬보다 훨씬 더 맛있어거든요^^


엇! 앗! 잇! 옷! 핫!

아아니, 사, 상냥해...!


사장님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순간 모든 불만이 사라지더군요.

하지만 놀랍게도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저희 테이블로 카푸치노 한잔이 더 나오는게 아니겠습니까?


나: 이건...?

사장님: 아^^ 이번에 새로 제가 개발하고 있는 메뉴인데 카푸치노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한번 내와봤어요^^ 괜찮다고 하시면 본사에 말해보려구요^^


아아, 아아아! 이 비정한 카페 서바이벌 사회에서 이토록 아가페적인 고객사랑을 일전 경험해본적이 있던가?!

(근데 여기 체인점이었어?)

식당은 서비스보다는 맛이 제일이라며 살아온 제 인생의 가이드라인이 변해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커피숍의 커피맛이 없다는 건 아니구요)


좀 감동해버린 저는 주신 커피를 살뜰히 마시고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싶어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리뷰(?)를 사장님께 말씀드렸죠.

우유가 들어간 카푸치노 라지 사이즈를 두잔을 마시니 배가 불러 헛구역질이 나왔지만 좋아하시는 사장님 모습을 보니 제가 더 기분이 좋더라구요.


이 후 저는 동네에서 커피를 마실때면 꼭 이 커피숍을 고집합니다.

그때처럼 아침에 갈일이 없어서 그런지 다시 사장님 얼굴을 본적은 없지만

끔찍한 인테리어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이 커피숍을 진짜 좋아하게 되었거든요.




2.



[쪽팔림주의]


커피하니 생각나는 막간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수해 전 인디아 블로그라는 뮤지컬을 관람하러 갔을 때였죠.

공연은 인도여행의 여정을 무대위로 올린 본격 로드씨어터였지요.

벌써 세번째 관람이라는 친구가 재미를 보장하는 공연이었던지라 잔뜩 기대를 하고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밖에서 담배나 몇대 피우고 복도에 알짱대고 있는데 무대 입구쪽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힐끔보니 공연 측에서 커피를 나눠주고 있는 모양이더라구요.

저도 얼른가서 친구 것과 제 것 두 잔의 종이컵을 받아왔죠.

따뜻한 커피를 마시자 추워서 얼어있던 코 끝이 사르르 풀리면서 노곤해지는게 기분이 너무 좋더군요.

그런데 커피맛이 뭔가 신기한겁니다.


나: 와 이거 커피 되게 맛있다.

친구: (마시지 않았음) 그래?

나: (호로록) 어!어! 이거 진짜 맛있어! 뭔가 특이한 향에 우유의 고소한 풍미도 살아있고 기분좋은 단맛에 근데 이거 뭐지 라떼인가? 원두가 뭐지? (주절주절)


한참을 이 커피에 대해 호들갑을 떨고 있는데

커다란 호박이 달린 터번과 빤짝이 알라딘 바지를 입으신 배우분이 커피를 나눠주다 말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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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분: ...그거 짜이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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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그렇게 그분과 제가 눈이 마주친 채 3초정도 정지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신기한 맛의 커피의 정체는 짜이(인도지방에서 주로 마시는 향신료가 가미된 홍차)였던 겁니다.

순간 내가 이 물건을 커피라고 믿고 뭐라고 주절거렸는지 필사적으로 떠올렸습니다.
제발 커피에 대해 단 한단어도 아는척하지 말았기를 신에게 빌고 또 빌면서요.

사실 저는 코감기에 걸려있었고 담배도 많이 피워 후각을 잃ㅇㄴ ㅇ마ㅓㅣㅇ마ㅣ오마ㅣㅇ 으악 아니 이건 쉴드를 칠 수가 없네요 흑흑
그 날 이후 대학로 어느 골목에서 누군가 줄담배를 피우고 피우다 장렬히 산화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내려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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