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를 만나고 왔어요.

2011.01.28 00:38

말린해삼 조회 수:1909

택시를 타고 삼만원을 내면 골목과 골목을 지나서 한라산 중턱 쯤 가면, 고개 꼭대기에 집 하나가 있습니다. 암자 같이 있는 집.

외할머니를 만나고 왔어요.

 

엄마,아빠가 어릴 적부터 일을 하셔서 외할머니가 저를 키웠죠. 이모들이 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다른 손자들은 별로 좋아하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그리 살가운 성격도 아니시고 말이 많으신 분도 아니셨다고. 그래도 해삼이에게만큼은 온갖 정성을 다 쏟으셨다고. 하긴, 제가 어릴때 외할머니 집에 간다고 하면(제가 국민학교 입학하고 나서는 다시 외할머니는 자기 댁으로 가셨습니다.) 집 뒤편에 키우는 닭을 미리 잡아서 손질만 해놓으시고 물어보셨죠. 볶아줄까, 삶아줄까.

 

어린 입맛엔 볶아서 먹는게 맛있어서 볶아 달라고 하면 늘 볶아주시고 옆에서 먹는 걸 보시면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시던 할머니.

 

저에겐 친할아버지,친할머니가 안계셨고 외할아버지도 안 계셨기에 외할머니가 제겐 할머니죠. 그런데 할머니 집에 가는게 어릴적엔 싫었어요. 너무 산 중턱이라 올라가려면 힘들었고,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화장실 가기 무서웠거든요. 양변기로 화장실이 바뀌자, 밤에 소변가러 간다면 할머니가 미리 앉아서 변기를 뎁혀 주셨어요. 어린 손자가 밤공기에 추울까봐. 어쨌든, 오늘 오랫만에 집에 가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군요.

 

무릎 아래로 오는 얕은 담 아래는 절벽 비슷해요. 고개 아래로는 귤 과수원들이 펼쳐지고, 마을이 보이고. 바닷가 펜션들과 바다와 섬이 다 보여요. 옛날 양반집 마루에서 마당을 보면 머얼리 산 까지 다 보이듯, 훤하게 다 보이는게 왜 이걸 이제 알았을까.. 싶더군요. 밤이라서 언뜻언뜻 보이는 과수원과 펜션의 불빛. 밤바다의 고깃배들의 불들이 반짝반짝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어요. 삼촌한테(지금은 삼촌이 사세요.) 나중에 이 집 저한테 파세요. 반값에.ㅎ

하니까 엄마도 옆에서 거듭니다. 어차피 아들도 없으니 해삼이한테 팔아라.. 나중에 별장으로 쓸 수 있게, 빨리 돈도 벌어야 겠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담배를 피시면서 커피믹스에 설탕 한 스푼을 더 넣으신 커피를 그렇게 좋아하셨죠.

 

 

 

오랫만에 보러간 할머니는 저를 보고 어떠셨을까요? 할머니 앞에서 절을 하고 술을 올리면서 왠지 눈물이 날것 같았습니다.

보고 싶어서.

 

할머니 거기선 어떻게 살아?ㅎㅎ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이틀전, 사람들을 못 알아보는데 제가 찾아갔을때 제 손을 팔을 뻗어 잡아주시던게 기억나요.

할머니가 준 100원으로 인디언밥 한봉지 사고 `할머니!!!`하며 할머니에게 달려가던 그 때가 갑자기 뚜렷이 기억나더군요.

 

 

또 언제쯤 뵈러 오게 될지. 섭섭해 하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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