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지만 몇 번의 서론을 거쳐 영화 이야기가 시작되는 안 좋은 글입니다. 양해와 선처를.



1. 



  게시판을 비롯, 온라인에 자기 자신의 생각을 게시하는 일은 페이스북을 제외하고 거의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만, 왜인지 오늘은 연휴의 한자락에 서서 한때 그랬던 것처럼 두서없이 이야기를 써보고 싶군요. 아마 길고 긴 쉬는 날들이 주는 편안함, 그리고 바람 잘 날 없었던 제 2014년 전반기의 근황 이후 간신히 정신줄을 잡은 스스로에 대한 애정에서라고 생각합니다. 

  요새 저는 어떤 멜랑콜리함에 빠져 있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스스로가 너무 급격한 변화를 맞았달까요. 전혀 변하지 않았으면서 동시에 아주 변한 그런 느낌입니다. 옛날에는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정념에 빠져 너무 쉽게 하는 자신을 보며 저는 저 자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저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만, 이젠 저 자신에 대한 기대도 접게 되었습니다. 최소한 이제 남한테 방해나 되는 일이나 삼가는 것이 그나마 나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 아닌가, 라는 나름의 자기반성도 하게 되었고요. 

  사람들과의 말을 통한 소통에도 완벽한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말을 하고 소통을 하려 하고, 심지어 서로한테 호감과 애정이 크다 하더라도,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결여를 인정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러기 위해서는 사상과 애정, 가치관, 그리고 미학적인 관점에서의 취향까지 동일해야 했습니다. 적어도 저라는 까타로운 인간이 말이죠. 심지어는 지금 당장은 누군가와 그런 것이 일치한다 하더라도 영원히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상대방이나 저나 변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요. 

  저도 어쩌면 지금까지 저의 외부, 그리고 내면에도 너무 기대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세상만사가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고, 이 세상에는 나를 위한 이유와 시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해나가는 것이 소위 말하는, '어른'이 되는 길 같기도 합니다.



2.



  역설적으로 다른 면이 더 눈에 들어오더군요.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위로' 아닐까, 라는 것 말입니다. 어차피 인간의 안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채우기 위해 사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 구멍을 채울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본질일 것입니다. 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큰 쾌감을 주는 것도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것을 채울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엄청난 기대감(그리고 그것은 환각적일 테지요)을 주기 때문일 거라 추측합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구멍을 채우려 하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면, 그 이룰 수 없는 목적을 향한 우리네의 시도들로 만들어진 결과물들이 주는 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인간 개체의 생존을 이끄는 동력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상에서 사는 건 끝나지 않는 무간지옥일 수도 있지만, 지옥을 살아나가기 위한 방법들로부터 서로가 위로를 받고, 그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죠.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일부분에 침투하여 나를 위한 시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창조의 길,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주체적으로 부여해내는 가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최소한 저는 스스로 이때껏 그러한 창조의 길들로부터 삶을 살아나가는 원동력을 배워왔고, 실제로도 즐거움을 느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예술(문학 포함)에 심취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창작품들에서부터 위로를 받아왔던 것일 테고요.

  인간이란 존재로서 우리는 흠도 많습니다만, 인간이 삶을 살아나가는 창조 행위, 그것에는 분명한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게 제가 이 의미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자살을 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그렇게 저는 다른 이들로부터 충분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3. 


  

  제가 특히 좋아하는 예술의 장르가 있습니다. 요새 그 경계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영역은 확장시키고, 원래 좋아했던 분야는 심화시키려 노력 중입니다. 다시 문학작품도 읽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머리가 굵어졌다고 생각했을 적에 문학작품에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오만한 생각을 했었거든요. 하지만 요새는 다시 기쁨을 누립니다. 글만큼 기쁨을 받는 예술 장르는 아무래도 영화죠. 마침 이런 때에 왓챠라는 어플을 통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저 자신은 영화를 잘 보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답니다. 체감에 저는 제가 무슨 1000편 넘게 본 줄 알았거든요. 전혀 아니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671편 정도 봤더군요. 최근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서 조금 올리기도 한 건데 나는 내가 나름 영화 꽤나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구나 싶어서 요새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합니다. 블루레이 시장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학생 신분으로는 좀 버거운 지출이라 덜컹덜컹 합니다만 ...

  영화 이야기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새로운 영역의 확장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요새 꽤나 힘든 시기라서 더 크고 다양한 위로가 필요하더군요. 스트레스 풀 방법이 워낙 없기도 해서요. 예술이라고 공감을 받긴 힘들겠습니다만, 담배도 시작했습니다. 커피와 담배라는 영화도 있잖아요. 그 조합은 환상적이더군요. 저는 진짜 제가 담배 피울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만, 이런 날도 결국 오네요. 냄새는 여전히 꽤나 싫어합니다. 엄청 신경 쓰는 편이기도 하고요. 담배 중 던힐과 말보로는 안 좋아합니다. 마일드 세븐 LSS만 피웁니다. ... 담배 예찬이 되면 좀 그렇겠죠? 낙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다 찾다보니, 이런 식으로 빠져버렸네요. 언젠가 끊어야 할 날이 오면 또 끊어야겠지요.

  그리고 사진도 무지 찍어댑니다. 전혀 관심이 없던 영역이었는데요, 순간을 나만의 방식으로 포착해내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고 해야 하겠네요...



4.



  요새 거의 하루에 한 두편씩 영화를 봅니다. 역시 위로를 받기 위해서죠. 가장 효과가 좋기도 하고요. 최근 본 것들 중  특히 좋았던 영화 몇 편들에 대해 간단히 공유하고 싶습니다. 


  저 유명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제가 기존에 매우 선정적인 영화라고 들었기에 조금은 '살로 소돔의 120일' 같은 것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만, 전혀 아니더군요. 저는 보면서 깔깔대며 즐겁게 관람했습니다. 개인사와 여러 겹치는 느낌을 받기도 해서요, 더욱 풍자적인 느낌을 받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말론 브란도의 섹시함과 그의 빈정대는 연기는 아직 젊고 풋내기인 마리아 슈나이더가 주는 느낌과 정반대라서 더욱 오묘했습니다. 까놓고 보면 보잘것없는 노른자인 중년 남성에게는 나름의 고민과 힘듦이 있었죠. 그러한 고통에서부터 나오는 분위기 그 자체는 어린 여성에게 매력적이고 농염해 보였을 겁니다. 중년 남성의 다소 엽색으로도 볼 수 있는 성적인 요구들도 섹슈얼하게 다가왔겠죠. 무엇이든 그 자체 본연보다는 그것이 주는 분위기와 이미지가 우리를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상징들이니까요.

  그렇기에 저는 그러한 것들을 다루는 영화의 풍자적인 요소에 즐거운 재미를 느꼈습니다. 중년 남성은 자신에게 닥치는 일들에 대해서 마리아 슈나이더에게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겪는 생생한 고통의 실체들은 다 알고 보면, 발화하고 나게 되면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것들로 전락하게 되죠. 후반부에서 죽은 부인에 대한 감정을 정리한 말론 브란도가 마리아 슈나이더에게 자신의 나이와 정체에 대해 쉽고 편하게 밝히는 장면, 이미 감정이 변해버린 아가씨에게 아저씨의 그런 고백은 부담스럽고도 부담스러운 대쉬로 전락해버리는 그 순간의 포착은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스스로도 모르는 새에 이용했는지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가씨나 아저씨나 서로를 성적인 대상물로 소비해버렸던 것이죠. 사랑이라고 생각도 했었던 것 같지만, 성욕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순간은 타이밍이 맞을 때 뿐이지요. 엇나가버리면 결국 누구 하나가 미친 변태, 집착하는 스토커가 될 뿐이고요.

  소개팅 전에 말로만 들었을 때는 무겁고 무섭고 마냥 진지한 남자일 줄만 알았는데, 만나서 이야기해 봤더니 너무 매력적이고 즐겁고 위트 있어서 더욱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 남자 같은 영화였습니다.



5.



  영화관에서 GV로 볼 기회가 있었던 '야간비행' 이야기도 꼭 하고 싶습니다. 


  이송희일 감독에 대해서는 인상이 좋은 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작 중 하나인 '후회하지 않아'를 우연찮게 한국영상자료원의 영상도서관에서 중후반까지 정도 보다가 말았었습니다. 재미없어서는 전혀 아니고요, 시간 문제상 때문이었죠. 지금도 끝이 궁금합니다. '야간비행'을 보고 전작과 비교하며 느낀 건, 이 감독이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일단 저랑 서울을 바라보는 미학적 관점이 동일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서울의 좋은 장면들을 아주 훌륭하게 포착해내는 비상한 재능을 갖고 계시더군요. 저는 서울만이 갖는 느낌에 대해 여전히 아직까지 언어로 형용할 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이송희일 감독의 작품들에 나오는 서울 거리의 장면장면들이 제가 갖는 인상들을 정확히 포착해내는 것에 감탄했습니다. 더욱 아름답게 보고 있기도 한 것 같아요. 비단 서울만이 아니라, 중간에 나온 여러 여행 장면들 같은 경우 동행한 사람과 감탄을 뱉어낼 정도로 아름다웠죠.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며 저는 '야간비행'에 나오는 두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바로 내가 요즘 가장 절실히 느끼는 사랑의 정의에 가장 가깝지 아니한가, 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최근 본 영화들 중에서 가장 마음을 울리는 영화였어요.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요소는 복합적이에요. 아무래도 저 같은 경우 이 영화 저 영화 보는데 주로 한국영화보다는 외국 영화를 많이 보는 편입니다. 물론 인류 공통의 보편 정서란 것이 있으니까 그런 쪽으로 다가가면서 보지만, 아무래도 대한민국 서울 사는 사람으로서 이송희일 감독이 펼치는 서울의 이야기가 더 감정적으로 와닿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이송희일 감독은 이 '야간비행' 한 편을 통해 서울 사는 사람들 중 특히 주변부의 문제들은 모조리 다 훑어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게 또 난삽해지거나 조잡해질 수 있는 위험성들을 다 피해가지 않았나 싶어요. 캐릭터들의 묘사가 다 어느 정도 현실성도 있고, 설득력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싸움을 잘한다든지, 공부를 잘한다든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유용한 장점도 갖고 있지만 동시에 확실히 주변부에 위치한 면을 갖고 있어요. 그게 그 사람들이 스스로 설정한 정체성이기도 하고요. 이송희일 감독은 그러한 주인공들이 서로를 향한 감정, 사랑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며 위로를 받는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저는 그게 너무 감동적이고 서정적이어서 정말 좋았어요. 

  


6. 



  히치콕 영화들을 항상 봐야지 봐야지하고 있다 최근에 보았습니다. 대표작들 중 하나인 '이창'과 '현기증'들에 접근했죠.  '현기증'과 '이창'을 같이 묶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히치콕 영화의 경우 예전에 '새'를 보긴 했습니다만, 이번에 본 '현기증'과 '이창'을 본 느낌은 참 기술적으로 안정적인 구조를 갖는 영화들이다, 라는 것이 가장 강했습니다. 흥행과 같은 대중적인 요소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는 느낌이 있었어요. 특히 '이창'이 그랬습니다. 이건 물론 좋다 나쁘다의 문제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냥 그런 인상을 받았다, 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뻔할 수 있는 스토리로 사람 심리를 이렇게 쫄깃하게 만드는 연출력에 대해서는 확실히 거장이 거장 소리 듣는구나 싶었어요. 여전히 제가 가장 선호하는 감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인정 받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두 개를 일괄 비교하기는 좀 힘들죠, 아무래도. 고로 무엇이 더 낫다고 쉽게 평가하긴 힘듭니다. 나름의 매력과 개성들이 있는 것 같아요. '현기증'을 먼저 보았는데, 저는 캘리포니아를 너무나 아름답게 담아내는 미장센에 감탄했습니다. 색감도 예쁘고요. 하지만 히치콕의 가장 놀라운 예술적 능력은 여자배우를 원하는 대로 아름답게 연출해내는 능력 아닌가 싶습니다. 킴 노박의 금발머리일 때의 아름다움은 정말 갈색머리의 킴 노박의 아름다움을 누릅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금발머리 아가씨의 이미지가 환상이라는 점을 고려해보았을 때 우리는 킴 노박 캐릭터가 갖는 열등감을 이해하게 되잖아요. 게다가 '이창'의 그레이스 켈리는 정말 화사하고 매력적이고 순수한 아가씨로 분합니다. 제가 그레이스 켈리였으면 이렇게 예쁘게 찍어주는 히치콕이 너무 고마웠을 것 같아요. 맨 처음 등장할 때의 그 연출은 그레이스 켈리에 대한 애정 없이는 절대 찍어줄 수 없는 연출이었다고 감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현기증'의 경우, 단연 제가 보았던 모든 영화들 중 가장 무서운 영화였습니다. 어설픈 귀신들이 떼로 줄지어 나오는 공포 영화들보다 더 무서웠던 이유는 바로 현실의 이야기라서 그런 것 아니었나 싶어요. 우리는 환상, 이미지들, 자신이 만들어 낸,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것에 스스로를 옭아맵니다. 오디세우스는 적어도 세이렌의 유혹을 피해 돛대에 자신을 스스로 결박한 것이었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범인들은 유혹이라는 강렬한 감정에 빠지기 위해 스스로를 결박하는 습성이 있죠. 그리고 그것은 가끔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합니다. 저 자신도 몇 번 그런 식으로 크게 데인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갖는 집착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요소죠.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결국 자신의 집착의 끝에서 자신이 사랑을 느끼는 이미지의 물질적 실체인 갈색머리 킴 노박을 '정말로' 죽이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는 결말의 장면은 히치콕의 냉소 그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킴 노박이 떨어지면서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은 정말 서릿했어요. 

  '이창'은 결말이 참 어떻게 보면 뻔한 것 아닌가 싶은데, 그래도 저는 후반부에서 결국 맞은편 아파트 아저씨와 대면하게 될 때 정말 어떻게 일이 풀려가나 너무 궁금해서 손에 땀을 쥐고 봤습니다. 이거 진짜 대단한 재능 같아요. '이창'의 경우 영화 그 자체가 갖는 구조가 환상적인 아이디어에 기반하잖아요. 그리고 영화 스토리상 사용되는 여러 설정들은 정말 그 시대에 통용되는 것들이라 심지어는 어떤 풍속적인 느낌도 갖는 영화 아닌가 싶었습니다. 스릴러적 요소를 갖는 한편 재기나게 매듭 지어져나가는 로맨스 이야기도 적당히 가벼우면서 사랑스럽기도 했고요. 

  역시 고전은 고전이다, 싶었습니다.



7. 



  왓챠로 분석한 제 영화취향을 보면 제가 가장 선호하는 감독은 라스 폰 트리에입니다. 실제로 맞아요. 요새 라스 폰 트리에에 꽂혔습니다. 님포매니악 보고 전율하기도 했고요. 김기덕이랑 어떻게 보면 비슷한 느낌이 있는데, 조금 조심스럽게 김기덕보다 한 차원이 더 높지 않나 주장해봅니다. (물론 조금 다른 느낌이긴 하기도 하고, 작품 별로 다르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요새 김기덕 작품은 좀 애매하다는 게 제 느낌이거든요. 라스 폰 트리에는 요즘 갈수록 더 좋아지는 것 같고요. 개인적으론 아쉽기도 합니다. 원래 가장 좋아했던 감독들인 카트린 브레야랑 김기덕 작품들이 요새 좀 별로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새로운 감독과의 연애에 빠진 건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지만.) '브레이킹 더 웨이브'와 '유로파'를 봤습니다. 이것도 묶어서 이야기 할게요.


  '브레이킹 더 웨이브'는 제가 본 라스 폰 트리에 작품들 중 가장 라스 폰 트리에답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조금 냉소적인, 회의적인, 비관적인 느낌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은 뭔가 오묘한 신성함을 가지고 있달까요. 여자주인공이 갖는 순수함은 때묻지 않았고, 그녀의 사랑이 정말 남편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죠. (실제로 그렇다고 묘사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나름 보면서 울기도 했습니다. 감동적이긴 했어요. 이 작품을 통해 라스 폰 트리에가 여자를 막 대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욕 먹었다는 것도 알고서는 조금 놀랍기도 했습니다. 이 감독이 김기덕과 비슷한 느낌이 없진 않은데, 김기덕 감독이 욕 먹는 것처럼 여자를 막 다룬다는 느낌을 전 받은 적 없거든요. 오히려 저는 이 감독이 여자에 대해 갖는 애정이 증오보다 더 크게 느껴졌거든요. 

  여자주인공에게 감독이 부여한 시련들 때문인가 싶기도 해요. 아마 그러한 시련들 때문에 여자를 안 좋아한다는 평을 받는 것 같은데, 저는 오히려 그러한 시련들이 역설적으로 마치 신앙을 검증 받을 때 필요한 것과 같이 꼭 제시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증오보다는 애정을 더 느꼈습니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남성적인 욕망이나 가부장적인 제도에 관해 할 말을 하고, 버림받더라도 자신이 믿는 길을 가는 사람들은 다 여성들이니까요. 여성만이 갖는 어떠한 강함이 라스 폰 트리에가 반복적으로 여러 영화들에서 보이는 복합적인 테마 아닌가 싶습니다. 그 강함은 여성을 비난받게 하고, 죽게 하기도 하지만 그건 어떤 자연적인 것이고 어쩔 수 없는 숙명적이고 본능적인 것으로 다루어지니까요. 안티크라이스트에서도 그렇고, 님포매니악에서도 그렇고요. 

  '유로파'의 경우, 정말 마음에 드는 영화 중 하나였습니다. 이건 좀 옛날에 만든 작품이긴 하죠. 91년 작이니까. 그런데 굉장히 '영화'에 천착한 영화였다고 생각해요. 독특하고 개성있는 미장센들이나 실험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러한 연출들이 많아서 굉장히 좋았어요. 물처럼 번지는 느낌이라든지, 마치 최면으로 유도하는 것과 같은 설정들, 특히 결말에서 물에 빠져 죽는 장면이 맨 처음 영화가 시작할 때 세는 숫자 10의 카운트다운과 함께 수미상관의 구조라는 점은 '영화'가 주인공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는 점에서 드디어 관객들이 최면에서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바로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은유적인 요소가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기술적으로 굉장히 세련되고 아름답고 공이 많이 들어간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감독이 이 작품으로 영화제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자주인공의 아버지가 자살하는 장면도 추가적으로 기억이 나네요. 그 장면도 정말 아름다웠어요. 


  저는 앞으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로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일정하게 뽑아내고 있는 것도 하나의 큰 재능이라 생각해요.



8.



  가장 최근에 본 영화 중 가장 좋았던 영화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귀향'입니다. 이 작품 정말 좋게 봤어요.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를 세 편 정도 봤는데 그 중 가장 좋았습니다. 영화적으로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아름다움, 내용에서 무엇 하나 빠질 게 없달까요? 페넬로페 크루즈를 다시 보게 된 영화이기도 합니다.


  '나쁜 교육', '내가 사는 피부'에서도 느낀 거지만 이 감독은 자신이 생각하는 에스파냐의 느낌을 정말 잘 살려요. 이게 에스파냐 그 본연의 느낌에서 유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저는 적어도 감독이 갖는 고국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느낄 수 있어 정말 좋습니다. 이 감독은 에스파냐 문화, 음악, 전통을 삽입하는 걸 좋아해요. '귀향'에서도 페넬로페 크루즈가 립싱크하는 노래 부르는 장면도 나오죠. 여러 에스파냐 음식도 나오고, 특히 인상적인 건 아마도 묘사하려고 했던 에스파냐의 시골문화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냥 시골문화가 아니라 강한 애정과 보살핌으로 묘사되는 (과장된 도스 베소스의 진한 쪽쪽소리로부터 추출되죠) 시골의 '여자들'이 향유하는 그 문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가 표상하는 모성이라는 이야기에 정말 강한 초점을 맞추는 강렬한 기법으로 승화됩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첫째 딸이 귀신이 무서워서 막 돌아가신 이모 집에서 방황하다가 갑자기 남자가 득시글대는 방으로 들어간 순간, 깜짝 놀라 서버린 장면이에요. 그 장면 이전과 이후에서 '귀향'에서 남자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가 테마에요. 여성성, 여성, 모성, 모녀관계만이 나오고 그것을 제외한 이야기에 나오는 남자는 거의 아버지들 밖에 없는데 죽거나 죽임당한 채로 분량이 거의 없죠. 게다가 그들은 자신이 갖는 '더러운' 욕정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기도 하죠.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식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여자들에게 상처를 입힌 것밖에 없는 사람들로 나오기도 합니다. 사실 기괴할 정도로 남자가 안 나오는 영화에요. 강박적으로요. 그런데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형상화하는 여성들의 사회는 이상하게 아름다워요. 이 영화가 남자에 대한 적대심을 딱히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물론 말한 것처럼 이 영화에 나오는 남성인물들은 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남성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 영화는 여성성과 모성이 갖는 힘에 대해 더욱 열렬히 이야기하는 효과를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또 무언가 단순하지 않은 구석이 있어요. 페넬로페 크루즈는 딸이 이야기한 것처럼 히스테리를 부리는 등, 굉장히 불안정하죠. 사실 초반에서 특히 드러나는 페넬로페 크루즈의 억센 모습이라든지, 파코의 살인을 다루는 모습에서 그녀는 정말 광기에 차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녀의 인생굴곡을 생각하면 사실 당연한 일이죠. 후반의 결말을 본 사람들이라면 특히 초반을 다시 보았을 때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게 이해가 됩니다. 그 점에서는 어떻게 보면 페넬로페 크루즈는 자신의 어머니와 똑같았던 것 같아요. 이 여성들은 충격적인 상처를 입었지만, 거기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해요. 그 대처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새끼에 대한 보호, 혹은 복수라는 단순하고 동물적인 요소 때문이죠. 그렇지만 그렇기에 가장 강한 이유가 됩니다. 이들의 모성은 어떻게 보면 '야간비행'에서 제가 말했던 것과 비슷한 류의 '위로'가 됩니다. 마지막 죽어가는 아우구스티나에게 이레네(페넬로페 크루즈 엄마)가 유령으로서 해주는 보살핌도 그렇게 볼 수 있죠. 

  자식이라는 이유로, 그 자식의 정체성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아픔이었어도, 그리고 그게 가끔 살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정신적으로 압박해서 딸과의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될지라도, 이 영화에 나오는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해 어떠한 짓도 감내해냈습니다. 저는 모성을 다루는 영화를 보통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클리셰적일 확률이 너무 높아서입니다만, 이 영화는 그러한 함정들은 죄다 피해가고 오히려 아름답고 비릿하게 승화해냈습니다. 엄마라는 존재도 어떻게 보면 문제가 많기도 하고, 거칠고 잔인한 현실을 견디지 못해내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기도 합니다만, 이 영화의 그녀들은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모성을 위해 가장 아름다워집니다. 


  정말 좋은 영화였어요. 보고 정신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을 정도이기도 했습니다.



9.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좋은 추석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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