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먼 북소리



듀게 이 글 덕에 열심히 읽게 된 하루키 산문 중 한 권.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 <댄스댄스댄스>를 쓰던 37~40세 때 떠돈 이탈리아,그리스 체류기/여행기 되겠습니다.


이분 소설은 <상실의 시대>만 달랑 읽은 저에게, 하루키는 언제나 젊고 감각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정확히 그 소설을 쓸 때 경험을 쓴 글이고요. 덕분에 '하루키는 이렇다.'는 제 편협한 이미지는 더 강화됩니다. 작가들은 골치 아프겠어요. 사람은 계속 바뀌는데 글은 변하지 않으니. 멍청한 독자가 25년 전 자기가 쓴 책을 다 늦게야 찾아 읽고 '당신 이런 사람이었군?? 내 다 알아봤어' 아는 척을 하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세월과 세상에 쓸려 사람은 계속 변해가는데. 그래도 인간의 어떤 부분은 영혼의 지문처럼, 변하지 않고 남아있기도 하니까요.

 

생각보다 두껍습니다. 그런데 참 잘 읽혀요. 필력이 출중하기도 하지만, 책 분위가 낙관적이고 경쾌하며 반짝반짝해서 그렇기도 합니다. 이 분의 산문을 읽다 보면 '글' 자체보다 하루키라는 '사람'에 끌리는 저를 발견해요. 재미있는 일화나 재치있는 글빨에 즐거워하다가도, 쭉 읽다 보면 '하루키는 참 사람이 좋군.'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되거든요. 낙관적이고, 현실적이며, 능력 좋고 재능 있고 성실하고, 맛있게 먹고 재미있게 읽고 즐겁게 듣고 보는데도 열심이고, 타인의 삶에 깊은 흥미를 느낄지언정 간섭은 하지 않고, 무엇보다 자기만의 삶의 리듬이랄까, 페이스가 확실하여 자신에 맞는 속도로 충실히 삶을 살아가는. 더구나 이미 경제적으로 안정된 작가가 '시실리, 로마, 볼로냐, 피렌체, 미코노스, 로도스'같은 도시를 떠도는 남유럽 여행기라, 굉장히 럭셔리하고 부러운 삶으로 다가오거든요. 그런데도 그런 삶을 볼 때면 느끼기 쉬운 질투나 고까움도 그다지 들지 않고, 오히려 그런 생활의 즐거움과 고달픔, 풍요로움과 불편함을 같이 공유하는 듯 했어요. 덕분에 읽는 내내 팍팍한 일상에 뭔가 위로가 되는 느낌. 하루키가 왜 팬이 많은지 알 것 같아요. 


그리고 그의 산문이 가진 매력은, 하루키라는 사람이 가진 삶의 태도에 기인한 면도 있는 듯합니다. 인생은 괴롭고 뜻대로 되지 않으며 번거로운 일 투성이고 결국 허망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모르지 않음에도, 그 사실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도 해야 할 일은 착실히 하고, 정말 하기로 한 일에는 무섭게 몰두하며, 내 뜻 따위 무시하며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을 반짝이게 하는 음식, 책, 음악을 착실히 찾아 즐기는 습관이 몸에 밴, 삶에 대한 안정되고 성실하며 건전한 그 태도 말이죠.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제 느낌에는, 이런 건전한 삶에 대한 그의 태도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머릿속에서 폭주하는 생각과 고뇌를 따르기보다,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달리는' 걸로 도시를 맞이한다 할 정도로, 몸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한발 한발 전진해가는 사람이라 그런가 싶기도 하고요. 음, 타고난 기질일지도 모르죠. '나는 (원래) 낙관적이고 성실하다.'고 여러 차례 썼으니. 하여간 여러모로 저랑 너무 반대라서, 정말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장편소설을 쓸 때면 항상 머릿속 어디에선가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 언제나 그렇다. 언제나 같다. 소설을 쓰면서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라고 계속 생각한다. 적어도 그 소설을 무하시 끝마칠 때까지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 이 소설을 완성하지 않은 채 도중에 죽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분하다. 어쩌면 이것은 문학사에 남을 훌륭한 작품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은 나 자신이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 소설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내 인생은 정확하게는 이미 내 인생이 아닌 것이다. (...) 아침에 눈을 뜨면 우선 주방으로 가서 주전자에 물을 붓고 전기히터 스위치를 켠다.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리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원컨대, 저를 조금만 더 살려주십시오. 저에게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하고. 하지만-그렇다-나는 대체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 신에게 기도하기에는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을 너무 내 멋대로 살아왔다. 운명을 향해 기도하기에는 나는 너무 나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좋다...어쨌든 나로서는 기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 만약 100년 후에 내 소설이 죽은 지렁이처럼 말라비틀어져 사라진다 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별문제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영원한 삶도 아니고 불멸의 걸작도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지금 현재의 일이다. 이 소설을 다 쓸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 있게만 해달라는 것뿐이다.'



더구나 읽는 이를 즐겁게 하는 이 책의 훌륭한 분위기에는 하루키의 건실한 태도에 더해, 독자에 대한 프로작가로서의 배려도 일조한 듯하였어요. 읽어 보면 남유럽 방랑생활 동안 괴롭거나 힘든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거든요. 오히려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일을 자세히 묘사하며 당시의 부정적인 감정 -화, 불안, 괴로움, 고통, 짜증을 나열하여 읽는 이도 덩달아 지치게 하는 부분은 드물어요.  이 분 정도 필력이면 자신의 고난을 드라마틱하게 포장하여 전할 능력이 없을 리 없는데, 그냥 안 한 거에요. 소설가 하루키가 아닌 생활인 하루키가 애초 네거티브에 몰입하다 땅 파는 성향과 거리가 먼 탓도 있는 듯 하지만, 프로작가로써 독자를 고려하여 자신의 고통이나 짜증을 펼치는 것을 자제한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나만 힘들면 되었지 꼭 읽는 이들까지...'이런 느낌?  고생담 등을  전할 때면 짧게 쓰고 끝내고 서둘러 음식기행으로 넘어가거나, 유머감각이나 풍자적 재치를 발휘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주더군요.  덕분에 독자로서 배려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 부분이 참 좋았어요. 더불어, 주체할 수 없는 괴로움과 아픔을 글로 풀어내는 것이 습관이 되었던 저는,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며 반성도 좀 했고요. 




결정적으로 이 책의 매력은, 당시 하루키가 놓였던 절묘한 위치와 관련이 있는 듯 해요. 


'유럽에서 지낸 3년 동안의 일을 생각해 보면 무척 신기하게 느껴진다. 돌이켜보면 거기에는 묘하게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질감이 있는 공백. 일종의 부유감 혹은 유동감. 그 3년간의 기억은 부유력과 중력 사이의 골짜기를 흐르며 방황하고 있다.(...) 나는 그 질감의 의미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기억의 질감을 전할 만한 적당한 언어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마음가짐이 그렇듯이, 아마도 비유적인 총체로서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우리의 입장은 모든 의미에서 매우 어중간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볼 것만 보고 그대로 지나쳐가는 관광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생활의 터전을 일구어갈 사람도 아니었다. 또한 우리는 어떤 회사나 단체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굳이 표현하자면 상주하는 여행자였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그곳에서 부엌이 있는 아파트를 빌려 몇 개월간 생활하고, 또 다른 곳으로 가고 싶으면 장소를 옮기는 것-그것이 우리의 생활이었다. 그렇게 고립된 이국생활(결국은 스스로 원했던 것이지만) 속에서 나는 묵묵히 소설을 써나갔다.' 


하루키가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던 그 때, "소설이 10만 부 팔리고 있을 때는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호감을 받으며 지지를 얻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상실의 시대>가 백 몇십만 부나 팔리고 나자, 나는 굉장히 고독했다. 그리고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쓴 그 절묘한 과도기에, 그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삶은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마땅히 살 집을 찾이 못해서 본의 아니게 남유럽의 이곳 저곳을 떠돌게 된 것이지만, 결국 완전한 내부자도 그렇다고 완벽한 나그네도 아닌, 한 세계의 많은 것을 경험하고 상당히 깊은 곳까지 알 수 있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결국에는 타인이기에 풍자하듯 스케치할 정도로 초연할 수 있고, 혹 너무 힘들면 훌쩍 다른 곳으로 가면 되는 그런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덕분에 외롭고 힘들긴 해도 몸과 마음은 홀가분하고, 또 낯선 곳에서 충분한 자극을 받는 동시에 자신을 가만히 관조할 시간도 얻을 수 있었고, 그 시간 속에서 당시 삶의 느낌이 '이국의 그림자'로 배어 있는 <상실의 시대>와 <댄스 댄스 댄스>를 써냈고요. 그리고 이 소설들은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지요. 그만큼 당시 하루키의 삶의 질감이 매력적이라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먼 북소리>는 당시 3년간의 삶의 질감을 '비유적 총체로서' 있는 그대로 전하기 위해 하루키가 써내려 간 책이에요. 매혹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행 충동이 거의 없는 편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기회만 된다면 이렇게 해외를 떠돌며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좀 했습니다. 음,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빼고. 여기는 잠깐 여행하는 것으로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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