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한 가지

2016.12.04 01:47

푸른나무 조회 수:1409

그 날은 조금 피곤했어요. 조금 이르게 맞춰놓은 알람은 꺼놓고 그 다음 울리는 알람을 기다리면서 다시 눈을 감았는데, 그 중간이 기억이 나지 않아요. 언제 알람이 울렸고 언제 껐는지. 그래서 눈을 떴을 땐 집을 나서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어느 회사가 안 그렇겠냐만은 출퇴근 시간 준수가 엄격한 회사라서, 정말 혼비백산했습니다. 이전 회사 다닐 때도 출퇴근에 세시간쯤 걸렸지만 지각을 해본 적은 없어서 이럴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거든요. 그러나 머리는 안 감을 수가 없어서 머리는 감았고 말릴 새도 없이 옷을 갈아입고 튀어나갔습니다. 다행스럽게 그 날 지하철은 제가 계단을 내려갈 때 문이 열려서 서둘러 탈 때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가 타고 나서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닫히긴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지하철을 타면 안되는 거긴 합니다만...그 전철을 타서 다행히 지각은 면했어요. 그 날은 운이 아주 나쁘진 않았던 거 같아요.


그렇게 하루가 흘러갔어요. 원래 이런저런 일이 터지는 것이 회사 특성이지만 그 날은 좀 더 그랬죠. 퇴근하면서는 다시 조금 피곤해졌습니다. 지하철 환승 통로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매일 그리는 동선을 따라 차근차근, 그랬죠. 에스컬레이터 핸드레일을 잡고 잠깐 멈춰 서 있는 동안 눈 앞에 아른아른거리는 것이 있어 시선을 집중했어요. 뭘까, 하고. 검은 핸드레일 위에 그려넣은 노란 리본. 에스컬레이터는 점점 올라가고 노란리본도 점점 올라가고 그리고 뒤로 밀려서 사라지고.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 4월과 관련된 책도 샀고 아직도 누군가 달고 다니는 노란리본을 숱하게 봤는데 그냥 그 순간의 리본은 유독 가슴에 남더군요. 핸드레일을 잡고 안전하게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자는 것보다 눈앞의 달아나는 노란리본을 따라 잠깐 기다림의 순간 먹먹해졌습니다. 그래피티가 흔한 주거지역에서 오래 살아왔지만 제가 본 그래피티 중에서 가장 좋았습니다.


.......


올해는 강을 보러 가야지 생각했는데 쉽지가 않네요. 하염없이 긴 강을 보러 가야지 생각했는데. 1월과 12월이 너무나 많이 달라지는 동안, 내가 평생을 알아온 사람들에게서 나는 점점 더 멀리 있고, 누구와도 제대로 닿아있지 않는 것 같아요. 회식에서 돌아오면서 카푸치노를 술버릇으로 혼자 한 잔 마시고, 당장 먹지도 않을 1인용 달디단 디저트 케익을 사와서 냉장고 넣고 잘 씻고 잠드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요. 그런 것들을 잘 간직해야지 생각하고 있어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3902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232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0729
508 26살 [4] soboo 2022.04.16 706
507 안녕하세요, 유령송 독짓는젊은이 2021.11.06 0
506 봉준호 감독이 극찬한 걸작인 <행복한 라짜로>가 오늘 밤 KBS 독립영화관에서 방영돼요! ^^ [8] crumley 2021.07.16 626
505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네요 [4] 타락씨 2020.08.12 1557
504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황금종려상 수상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가 담긴 글 [2] crumley 2019.05.29 1937
503 추석 전야, 개천절 [1] 칼리토 2017.10.03 753
502 영화 '리얼'이 분위기를 반전 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4] 닥터슬럼프 2017.06.29 2855
» 변하지 않는 한 가지 [4] 푸른나무 2016.12.04 1409
500 나는 행복합니다~~~~~ [3] 떼인돈받아드림 2016.06.08 1427
499 [최근 상영작 간단후기] 헤이트풀 8, 레버넌트,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샤이닝 [16] 프레데릭 2016.02.03 2341
498 2015 듀나 게시판 영화상 결과가 나왔습니다. [6] 물휴지 2016.01.19 1666
497 피곤사회 [12] Koudelka 2016.01.06 2356
496 점점 더 길게 사는 인간의 문제 [14] 칼리토 2015.09.18 3378
495 에일리언 vs 한국 해병대 [4] 로이배티 2015.07.20 1979
494 알라딘에서...알라딘에서... [25] 쥬디 2015.07.16 4450
493 영화일기 5 : 침묵(잉마르 베리히만), 8과 1/2(페데리코 펠리니), 경멸(장 뤽 고다르), 뉘른베르크의 재판(스탠리 크레이머) [3] 비밀의 청춘 2015.06.22 780
492 영화일기 3 : 나를 찾아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프렌치 커넥션, 거인, 5월의 마중, 액트 오브 킬링 [2] 비밀의 청춘 2015.06.20 1159
491 아듀! CSI Las Vegas [7] chobo 2015.06.01 1757
490 조경태 의원은 새정치민주연합이란 정당이 부끄러운 모양입니다 [7] amenic 2015.05.20 1681
489 홍준표는 아내가 은행원 출신이라는 걸 [3] chobo 2015.05.11 294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