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모든 행동에는 경험치가 있고 그 경험치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사람들의 타고난 성격이라든지 그 사람의 혈액형, 별자리, 사주, 차 찌꺼기가 남은 형상이라든지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바라는 것의 크기에 따라 

형성된 경험치의 그릇이 가득 차고 넘치고 넘치고 또 넘치다가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늘상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지만, 막상 떠올리려고 하면 생각나지 않고 운 좋게 떠올리는 데 성공해서 막상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없는

그런 찰나의 순간이라 할 만한 사건을 만나면


펑-! 하고 그릇이 깨지고


라면물 끓이던 5분 동안 잠깐 떠올랐던 실없던 생각 혹은 평생 꿈속에서도 고민했던 그 생각.. 깨진 그릇의 크기, 지금까지 쌓였던 경험치에 따라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음 레벨로 오른다거나 열반의 경지에 오르거나 하지 않을까?

붓다도 분명 보리수나무 밑에서 그렇게 평생 채워온 그릇을 깼을 거라 생각합니다.




요즘 다시 느낍니다. - 나도 참 대다나다..-

30대 중반에도 아무것도 없는 백수라 생기는 우울함과 위기감을 온몸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온종일 바닥에 누워있다가 좀 더운 거 같아서 창문을 열고 다시 바닥에 엎어집니다.

그렇게 엎드려 집을 낮은 관점으로 보고 있자니 저쪽에 빈 생수병보다 다섯 배는 더 많이 쌓여있는 빈 맥주피쳐병이 보입니다.

그러자니 요 몇 달간 주중 주말 밤낮 무시하고 흡입했던 맥주들과 안주들이 떠오르고 우리 동네 재활용품 버리는 요일이 떠오르고

구태여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충실하게 증명한 내 몸뚱이를 만져보게 됩니다.

아무도 모르지만 내가 꽤 우울한 것은 사실이고 아무도 몰라서 그 우울증이 속으로 썩어들어가는 중인 것도 사실이고

나지막한 산을 오르면 에너지보전의 법칙에 따라 이 몸뚱이도 다시 조금 가벼워지고 썩어들어가던 내 속도 조금 회복될 것도 사실이기에

마침 집 뒤에 있는 나지막한 백련산을 오르리라 마음먹습니다.

지금은 해가 뜨거우니 느지막하게 해 질 녘에 올라야지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해! 질! 녘! 백련산을 등산이라기보다 산책을 하고 내려오는데 저기에 비범해 뵈는 개 한 마리가 엎드려 있습니다.

웰시코기나 비글같은 종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싸 보이거나 예뻐 보이거나 지랄 맞아 보이는 그런 비범함이 아닙니다.

강아지인지 성견인지 알 수 없는 작음 체구에 도통 종을 알 수 없는 하얀 믹스견이지만 약간의 고상함과 서글픔 느껴지는..

왠지 모르겠지만, 꼭 사람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개를 좋아했고 키워왔고 지금도 부모님 집에는 내 발소리만 들어도 지랄발광을 하는 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개를 함부로 만지지도 않고 먹을 것을 주지도 않습니다. 보통을 예뻐 죽겠어도 무심한 척 스-윽 보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이 개는.. 그 묘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쪼그려 앉았습니다.

다른 쪽을 보던 어쩌면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던 그 개는 내 인기척에 스-윽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스-윽하고 몸을 일으킵니다.

그러더니 그대로 계속 서 있습니다. 다시 엎드리거나 나를 경계해서 자리를 옮기거나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한참을 서 있습니다.

정말 어릴 때 말고는 이래 본적이 없는데 그 개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입으로 혀를 차 소리를 냅니다.

개는 여전히 나를 무시하고 그렇게 서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난 개무시당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포기하고 내가 일어서고 걸음을 옮기니 그제야 그 개는 다시 아까와 같은 자세로 엎드리네요.




산을 내려오면서 생각합니다.

그 개는 왜 그랬을까?

그냥  생각없이 날 무시한 걸까?

아님 내 느낌대로 날 배려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내가 요즘 우울해서 예민해서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은 걸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방금 그 찰나가 분명 그릇이 깨질만한 그런 순간이었고 아직 내 그릇이 차지 않아 깨지지 않았다는 것.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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