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쿠 대잔치

2019.02.10 14:32

어디로갈까 조회 수:800

부모님 댁 옛방에 머무노라니 잊고 있던 책들을 발견하게 되네요. 그 중 할아버지의 오랜 손때가 묻은 하이쿠 선집이 마음을 띠링 건드립니다.
속장에 '봄 선물이다.'라고 쓰신 걸로 봐서 특별히 제게 주셨던 해석본인가 봐요.
일어를 모르는 손녀를 위해 돋보기를 쓰고 행마다 해석을 적어넣었을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이마가 숙여집니다. 
그 깊은 사랑이 후손에게 항상 따스한 햇살로 와닿는 건 아니었죠. 아니 햇빛이기는 하되, 기어이 '외투'를 벗겨낸다는 점에서 때론 몰아치는 겨울바람보다 매서웠던 기억이 있어요.

책장을 넘기며 꿈 속인 것 같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벼봤습니다. 가까운지 먼지, 거리를 잴 수 없는 곳에서 할아버지가 다가오셨어요, 당신의 진실을 반복하면서.

하이쿠는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를 예리하게 인식하는 순간에 터져오르는 불꽃이죠.  침묵에 근접한 기억의 에센스 같은 것. 
그 간결함으로 보자면 하이쿠는 비커뮤니케이션적인 시 형식이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읽는 순간 우리가 항상 알고(느끼고) 있었는데도, 알고 있음을 몰랐다는 사실을 가르쳐줘요.

# 우리 두 사람의 생애, 그 사이에, 벚꽃의 생애가 있다 
- 그 유명한 바쇼의 하이쿠. 정신의 미장센으로서의 시가 있는데 이 하이쿠가 바로 그런 것 같아요. 
미장센이란 인위적인 것이지만, 시란 것이 또 인위적인 것이죠. 그리고 미장센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 그럴 가치도 없는 이 세상, 도처에, 벚꽃이 피었네
- 잇사의 하이쿠. 여기에선 작위적인 미장센이 느껴지지 않네요. 발화자의 수동성 때문일까요?
그렇지만 시선의 선택은 있습니다. 벚꽃이 핀 것만이 세상의 유일한 사건은 아니기 때문이죠.
시가 미장센이 아닐 수는 있지만, 선택이 아니기는 불가능합니다. 이 책을 뒤적여도 선택이 아닌, 무심의 시는 발견하기 어려워요.
쓴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무심일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무심에 지나치게 집착하는(부르짖는) 몇몇 시인들이 저는 늘 의아합니다.)

이 세상, 지옥의 지붕 위를 걸으며, 꽃들을 구경하네
- 무심에 집착하지 않을 바에야, 아예 장렬한 것도 좋습니다.
이쯤이면 경계없는 파토스의 열혈적 노출이라고 할 만하죠.ㅋ  애초에 시는, ~해야 한다든가, ~가 좋다 따위는 통용될 수가 없으므로.

# 새벽이 밝아오면, 반딧불도 한낱 벌레일 뿐 
- 아온이란 이의 하이쿠.  한낱 벌레일 뿐인 반딧불의 배경에 펼쳐진, 드넓은 세상의 깊이. 그것은 신비이기 이전에 하나의 거대한 문제가 아닐런지.

# 꺾어도 후회가 되고, 꺾지 않아도 후회가 되는, 제비꽃

#국이고 반찬이고 모든 곳에, 벚꽃잎이, 떨어져 내리네

# 봄이 가고 있다, 새들은 울고, 물고기 눈에는 눈물이

# 여름매미, 나무를 꼭 껴안으며, 마지막 울음을 운다

# 너하고 친해졌지만, 이제 우린 헤어져야 해, 허수아비야

#밝은 불빛에서 보아도, 이 얼굴은, 여전히 추워보이네

# 첫눈이여, 글자를 쓰면 사라지고, 쓰면 사라지고

# 언 붓을 녹이려다, 등잔에, 붓 끝을 태웠다

# 부처에게 바친 꽃들이, 겨울강 위로, 떠내려오네

# 물고기는 무엇을 느끼고, 새들은 무엇을 느끼는가, 한 해의 마지막 날

좋은 시편들이, 참 많기도 하다, 이 세상. ㅎ
<하이쿠는 하나의 신비다. 단지 일상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사물의 본질을 분명히 한다.>고 로버트 스파이스가 말한 바 있죠.
 그런데 '사물의 본질을 분명히 한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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