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지칩니다

2010.10.13 18:54

그루터기 조회 수:1805

이상하게 눈팅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 글 하나 씁니다.

오늘은 게시판에 유독 남자와 여자에 관한 얘기가 많네요.

가을이라 그런지

마음 한구석이 바람이 드나드는 것처럼 시려서

옷을 덧입어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저녁이에요. 

 

스무살에 만나 3년을 정말 좋은 친구로 지냈고

사랑을 느껴 결혼하자 했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그렇게 그냥저냥 살고 있습니다.

사랑한다 말해주길 기다리고 결혼하자 말해주길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라 느껴서 먼저 사랑한다 말했고

이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되겠다 싶어 먼저 결혼하자 했습니다.

두사람이 만나 하는 결혼인데

수동적으로 기다리고만 있는 게 별 의미없이 느껴져서

조건에 주저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

공부도 하게 했고 취직도 하게 했고 어쩌면 결혼도 하게 했을 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제 조건 여러가지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기에

그가 먼저 배려하지 않고

그가 먼저 염려하지 않고

늘 좋은 사람 있으면 가라고, 가도 된다고 한번을 잡지 않았어도

그만큼 나한테 손 내밀 자신이 없나보다

그만큼 사는데 여유가 없나보다

그래도 당연히 그도 나만큼 나를 사랑은 할 거라고

그리 믿었고 그렇게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가끔.. 그게 아닌가? 그게 아니었나? 갸우뚱하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말이죠. 결혼한지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말이죠.

지나간 세월을 거슬러 생각하니

자꾸만 더

확실히 그런 맘이 듭니다.

그 사람이 나를 대했던 그 모든 것이

그저 무심한 성격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나는 어쩜 보고픈 것만 보고 산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의심에 사로잡혀 버린 거지요.

내 사랑이 너무 크고 내 욕심이 너무 커서

청춘에 계획한 것들을 그저 이루어내는데 급급해서

이제껏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그런 의심까지도 들구요. 

 

그에게 나는 많은 의미란 걸 압니다.

하지만 내가 될 수 있는 그 많은 의미중에 불행히도 그가 사랑하는 한 여자는 아닐 것도 같습니다.

옆에서 늘 쫑알거리며 나한테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 잔소리를 해도

그는 언제나 늘 똑같이 무신경합니다.

그를 변화시키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그 맘을 느끼고 싶어서일 뿐인데

그리고 지금 나에겐 그게 정말로 절실히 필요한데

어찌해도 그게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일입니다.

왜 그 맘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요?

왜 한번도 나는, 나에게 향하는 그의 순수한 열정을 느낀 적이 없던 걸까요?

나는 거창한 말한마디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이벤트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놀라운 선물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단지 힘들지 않니? 도와주고 싶다. 하는 그 한마디를, 그 마음을 기다리는데

그는 가르쳐줘도 못합니다.

지치지 않고 가르쳐도 그 하나를, 그 한번을 제대로 못합니다.

10년을 아마 그렇게 살았나 봅니다.

 

그저 사랑하고

그런 마음에 충실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요즘엔

특히, 오늘은

많이 지칩니다.

나는 충분히 가치있는 인간이고

남자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괜찮은 여자일 것도 같은데

사랑하는 단 한 사람에게 그런 대접을 못 받고 산다는 게

참으로 날 비참하게 합니다.

아무리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유죄라해도

이건 너무 하잖아요.

넘치고 넘치게 사랑받는 느낌까진 아니라도

그저 그가 날 사랑하는구나

난 그에게 사랑받고 있구나 하는 그거

나도 그거 한번 저절로 느껴보고 싶단 말입니다.

자기 필요할 땐 잘도 찾으면서

이건 맨날 혼자 내버려둬요.

잘하잖아~ 하면서요.

 

아..

제가 그를 사랑하는 걸 멈추지 않는 이상

그에게 여자로서 뭔가를 바라는 건 더이상 안될 것 같아요.

체념밖엔 길이 없을 것 같아 많이 속상해요.

착한 사람이고 좋은 사람인데

왜 나한테만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 건지 모르겠어요.

만족을 주면 튈까봐? 흐흐흐 (←이건 자조예요)

사실, 날 사랑하지 않는 건 그의 죄가 아니죠.

사랑을 강요하는 게 죄라면 죄겠죠.

 

이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글을 어쩌면 좋을까요?

그냥 접기엔 쓴 시간이 아깝고 올리기엔 정말이지 낯부끄럽고

이런 글은 전혀 나답지 않아요. 첨부터 끝까지 징징 징징..

오늘 저녁엔

혼자서 술이라도 한잔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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