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회고록 중에서 발췌: 점과 선

2010.10.0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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點과 線

기원전 12세기경 중국 周나라 초기 정치가에 姜太公이라는 이가 있었다. 본명은 呂尙이나 속칭 강태공이라 했다. 주나라 文王, 武王 등을 섬기고 특히 문왕과 함께 山東지방을 얻고 선주민(先住民)을 정복하고 帝國을 열었다 한다. 혹은 그는 東夷사람으로, 위수(渭水)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다가 문왕에게 발견되어 그의 스승이 되었다고도 한다. 여기에서 그를 속칭 태공망(太公望)이라고도 한다. 낚시질을 하면서 기회가 올 것을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교훈도 되겠고, 침착하게 기다리는 자에게는 언젠가는 성공의 기회가 있다는 희망을 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통학교에 입학한 무렵의 일이다. 전탄(箭灘)장날에 어머니를 따라갔다. 전탄역은 내가 늘 이용하는 정거장이 있는 작은 도시이다. (주: 교수님 고향은 함흥 옆 문천입니다.) 5일에 한 번씩 장이 열린다. 어머니는 아침에 쌀자루를 이고 그곳에서 쌀장수들에게 팔고 대금을 받아가지고 여러 가지 물건을 산 후 나에게 교모를 사주셨다. 새 모자를 사서 썼을 때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그런데 모자가 약간 컸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벗겨질 것 같았다. 머리가 클 테니까 오래 쓰라고 일부러 사이즈가 큰 것을 산 것이다. 전탄 시가지는 전탄강이 가운데를 흐르고 그 위에 놓은 다리가 약50m는 되는 것 같았다.

다리를 건너올 때였다. 다리 중간에 왔을 때 강바람이 세게 불어서 내 모자를 휙 벗겨서 다리 아래 강물 속에 떨어뜨려 버렸다. 다리 위에서 두 발을 구르면서 안타까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리는 제법 길고 높았으며 강물의 수심도 깊고 빨랐다. 모자는 물위에 뜬 채 물결에 실리어 흘러가는 작은 배처럼 통쾌하다는 듯이 두둥실 떠내려가고 있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속으로 생각하면서 잠시 동안 다리 위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별수 없다, 그냥 가자." 하시면서 어머니는 나를 재촉하였다. 다리를 건너가고 오는 사람은 많았으나 모자가 둥실둥실 떠내려가는 모양을 바라보고 흥겨워할 뿐 깊은 물 속에 뛰어내려 모자를 건져 주겠다는 자기 희생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모자를 단념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보았던 모자이다. 다시 돈을 주면 다른 모자를 살 수 없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롭게 떠내려가는 모자를 보고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봄철이라 해서 그런지 강물은 파도가 세지는 않았다. 저녁 때 동해 쪽에서 불어오는 쌀쌀한 역풍(逆風)을 안고 강물 위에 작은 삼각파(三角波)가 일고 있었다. 그 작은 파도를 넘어설 때마다 모자는 규칙적으로 약간 위로 떠올라왔다가는 곧 다시 아래로 가라앉으며, 가라앉았다가는 다시 파도에 밀려 위로 솟구쳐 올라오면서 떠내려가고 있었다. 흡사 다리 위에 멍청히 서 있는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면서 빨리 내려와서 건져 달라고 애절하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그 것은 모자라는 물건이 아니라 내 분신(分身)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물에서 건져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머니를 재촉하여 강둑과 평행선을 이루고 있는 신작로를 걸어내려갔다. 그 길은 우리 집으로 가는 길과는 다른 우회로(迂回路)이므로 도보로 다닐 때에는 그 길은 거의 이용하지 않는 길이다. 그러나 이 신작로는 강줄기를 따라서 마련된 길이므로 모자를 건지기 위해서는 이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2km쯤 걸어서 내려간 곳에 큰 버드나무가 많이 서 있는 부락이 있었다. 강둑에서 강가로 경사진 길을 내려 강물을 긷거나, 혹은 빨래를 하기에 편하도록 돌들을 강가에 마련해 놓았다. 강물은 그 곳에 와서 강가에 접근하면서 속도를 줄여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 곳에 도착한 나는 상류(上流)를 유심히 올려다보았다. 한참 후에 예상한 대로 모자는 넘어가는 석양빛을 반사하면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강물의 주류(主流)가 내가 기다리고 서 있는 빨랫돌 옆을 굽이치면서 지나가기 때문에 5m가량의 넓은 강폭이었으나, 모자는 바로 내 발 밑에 가까운 곳으로 천천히 흘러 내려왔다. 나는 미리 준비해 가지고 있던 장대 끝으로 쉽게 모자를 건질 수 있었다. 헤어졌던 친구를 다시 만난 것 이상으로 반가웠다.

잃어버린 모자를 단념하지 않고 2km나 되는 길을 흘러가는 모자보다 앞질러 걸어 내려가서 예측한 대로 강가에 마련된 빨래터에서 쉽게 건졌던 것이다. 모자가 바람에 날려 강물에 빠져 내려갔을 때, 서둘러서 물 속에 뛰어든다고 해서 건질 수 없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리 밑의 강물은 수심이 깊고 강면(江面)전체에 물이 충만해 세차게 흘러가고 있는데 모자는 강 한복판에 떨어졌던 것이다. 일단 포기하고 다음 대책을 세운 것이 2km의 하류(下流)지점에서 강폭이 좁혀지면서, 강둑에 접근하여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좁은 모퉁이에 먼저 가서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예측대로 들어맞아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강태공이 낚시질을 하면서 때를 기다린 것이나 비슷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나는 무슨 일에나 느긋한데 그런 성격은 어렸을 적부터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은 1467년부터 전국(戰國)시대에 들어간다.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천하통일의 꿈을 안고 할거(割據)했다. 그 중에서 맨 처음에 두각을 나타낸 것이 오다[織田信長]이다. 그러나 그는 부하인 아케치[明智光秀]의 쿠데타에 의해 살해되어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도요토미[豊臣秀吉]였으나 임진왜란에 실패한 후 신병으로 사망하여 역시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이 도쿠가와[德川家康]이다. 그는 천하통일에 성공하여(1603) 지금의 동경인 에도[江戶]에다가 무사정부인 막부(幕府)를 세웠다. 이처럼 세 사람이 다 같이 천하통일의 대망(大望)을 품었으나 결국 승리의 월계관 도쿠가와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 세 사람의 성격을 비교하는 이야기가 있다.


오다[織田]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하듯이 성질이 너무 급하여 통일의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 다음 도요토미[豊臣秀吉]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꾀어서 울려 보이겠다"고 하듯이 억지를 쓰다가 실패하였다. 마지막으로 도쿠가와[德川]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느슨한 성질이기 때문에 실력을 기르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에 천하를 얻었다. 풍신수길이가 무리수를 두다가 실패한 것이 그에게 최후의 승리를 가져다 준 셈이다. 여유 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시간에 관계가 있지만 또한 거리와도 관계가 있다.

나는 물에 빠진 모자를 건지려고 3km의 길을 30분동안 걸어갔다.

베버(M. Weber)는 민주국가의 정치가의 자격으로 「열정, 책임감, 목측(目測)」의 3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그 중에서 목측이란, 거리를 눈으로 어림하여 재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정세의 판단과 분석을 할 때, 목측을 그르치지 아니해야 한다.」는 것이다. 냉정이 정신을 집중하여 현실을 파헤쳐나가는 능력을 가져야 하며, 인간에 대해서나 사물에 대해서나 일정한 거리(Distanz)를 두고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예컨대 현미경 밑에 실험물을 놓고 관찰할 때, 렌즈와 물체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물체가 잘 보인다. 너무 렌즈를 가져다 대면 물체가 지나치게 확대되어 오히려 전체를 못 보게 된다. 과연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할 수 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물건이나 사람을 보는 것이 정확한 관찰 방법이다.

베르그송(Bergson, 1859-1941. 生의 철학, 직관주의자)이 "인간의 사고(思考)는 항상 시간을 공간화(空間化)하며, 넓이가 없는 것을 넓이가 있는 것으로 하는 습성이 있으며, 여기에 인간의 내적(內的) 생명의 본질이 있다."고 말한 것도 모두 같은 뜻에서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

시골에서 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나의 활동범위는 지극히 좁았다. 경우 우리 동네 안이었다. 그 후 서울에 와서 공부하게 된 후부터는 멀리 두고 온 고향을 항상 생각하면서 지냈다. 약 300km의 거리, 즉 공간을 두고 생각하였다. 또 그 후 일본에 건너가서 공부하는 때에는 시골 고향과 두고 온 서울까지 항상 생각하면서 지냈다. 목측의 거리가 그만치 넓어진 것이다. 거리상의 공간이 넓어진 것은 그만치 나의 사고(思考)의 세계가 넓고 풍부하게 변한 것이다. 해방 후 미국에 가서 어렵게 공부할 때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고향, 서울, 그리고 일본까지라는 넓은 공간을 생각하면서 또한 머릿속에 넓은 지역을 그리면서 생각하였다. 서울이란 점(點)이 태평양에 선(線)을 그으면서 미국 땅에 가서 또 하나의 점으로 된다. 그 사이에 흘러간 시간이 있고 시간 속에 넓은 공간이 형성된다.

나는 지금 서울 강북 변두리 북한산 자락에 앉아 있다. 이 곳을 기점으로 나의 생각과 마음은 내 고향 산천으로 달려간다. 태평양의 파도를 넘고 북미(北美)대륙의 높은 산맥을 넘고 넓은 호수를 건너 마음의 날개는 쉬지 않고 넘실거리며 날아간다. 청춘을 즐기며 애환(哀歡)의 세월을 보낸 일본의 옛 도읍지의 골목길로 달음질쳐간다. 이곳들은 가깝지 않은 거리이다. 멀기 때문에 날아가는 내 마음은 오히려 냉정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머나먼 거리의 선(線)에다가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그리듯 화려하게 장식하고 풍요로운 회상의 둥지를 꾸밀 수 있다. 한 톨의 밀알이 땅에 묻히면 줄기가 생긴다. 선과 점은 만물의 기본적 모습이다. 기하학은 점과 선이 엉켜서 춤추는 화려한 무대이다. 선은 언제까지 선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이 줄어들면 나중에는 점으로 압축되는 셈이다.

내가 모자를 사서 머리에 썼을 때 모자는 나와 함께 점으로 귀일(歸一)되었었다. 중복된 것이다. 바람에 날려 모자가 강물에 빠져 버렸을 때 모자는 나와의 사이에 거리를 두게 되었다. 점이 흩어져 선으로 변한 것이다. 모자가 강물에 실려 둥둥 떠내려감에 따라, 모자와 나와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다리 위에서 강물에 실려 가는 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모자와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하나의 숙명(宿命)처럼 냉정히 응시했다. 그러나 선은 언제까지나 선으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선은 단축되어 하나의 점으로 귀일(歸一)할 때가 있는 법이다. 못 갈 데로 강제로 끌려가듯이 떠내려가는 모자를 따라 기대와 집념을 버리지 않고 하류(下流)에로 달음박질하듯이 달려가서 결국 모자를 건지는데 성공했을 때, 모자는 나와 함께 다시 한 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선이 압축되어 이루게 되는 점은 하나의 아늑한 면적을 차지하게 된다. 가느다란 한 줄기 밧줄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던 곡예사(曲藝師)가 마지막 한 발을 무사히 옮겨 놓은 좁은 널판의 안전지대와 비슷하다. 이 안전지대에서 곡예사는 숨을 길게 쉬면서 잠시 휴식을 가질 수 있다.

가느다란 외줄기, 기대(期待)의 선(線)을 달려온 나는, 그 때 내 머리 위에 다시 올려놓은 모자를 월계관으로 알고 마음 속으로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나는 지금 내가 앉아있는 방을 기점(起點)으로 여러 갈래의 회상(回想)의 선(線)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예전의 전탄강 다리 위에서 바람에 날려가 버린 모자를 다시 찾게 된 행운을 얻은 것처럼, 언젠가는 이 여러 갈래의 선들의 거리가 압축되는 날이 올 것으로 생각한다.

 

 

 

- 꼭 일제시대 수필 같은데 이 분의 육필 원고를 제가 받았던 게 2005년 여름. 반전이라면 반전.

1916년생인데 아직 살아 계시니.... 100살 채울 때까지 장수하시는 걸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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