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 없는 삶

2010.10.25 16:18

차가운 달 조회 수:3740

 

 

 

아프리카에 오카방고라는 강이 있어요.
강은 우기가 되면 수량이 풍부해져서 칼라하리 사막을 가로질러 흐르죠.
스무 살 무렵 오카방고강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어요.
강을 따라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들의 모습을 담은 아름다운 필름이었죠.

 

지금도 잊지 못하는 장면들이 있네요.
습기를 잔뜩 머금은 푸른 대기,
어두워진 초원의 하늘을 선명하게 가르던 번개,
동그란 수련잎 위를 뛰어다니던 연자새.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땅속에서 2년 동안 묻혀 있다가
어느 여름 저녁 붉은 강 위로 날아올라 하루나 이틀을 보내고 죽어 버리는 하루살이들이었어요.
그게 삶의 전부였죠.

 

석양에 물든 강 위를 가득 메운 하루살이들.
그들에게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하루나 이틀 동안의 그 여름 저녁은 찬란한 한때였을까요.
오베르에서 보낸 고흐의 마지막 70일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런 삶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스무 살 무렵이었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 역시 그런 뭔가를 기다리며 살았어요.
지금이 땅속에 묻혀 있는 거라면 언젠가는 석양이 지는 강 위로 날아오를 거라고 생각했죠.
말하자면 다른 삶을 살고 싶었어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는 아주 오래된 것이죠.
다른 삶을 살고 싶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뭐 비슷한 말이에요.
어떤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고 싶었어요.
삼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벼락을 맞고 나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거나 뭐 그런 식으로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알고 있어요.
알아요, 알아요, 하지만 정말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 뿌리는 아주 깊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초등학교 3학년, 정확히 제가 열 살 때의 일이에요.
부모님과 함께 관광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놀러 간 적이 있어요.
아버지 친구들의 가족동반 모임이었죠.
거대한 석회암 동굴이 있는 관광지에도 갔었고,
어느 강가에서 준비해 온 점심을 요란한 분위기에서 먹었던 것도 다 기억나요.
아마 울진 쪽이었던 것 같아요.
또래의 아이들도 제법 있었어요.

 

젠장, 아무 생각 없이 이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왜 슬퍼지는 것일까요?
정말 오래전의 얘기예요.
까마득한 과거는 어째서 항상 우수에 젖어 있는지 모르겠어요.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어느 바닷가였어요.
자동차와 사람들로 붐비는 해수욕장이었죠.
그날 수영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물론 마지막으로 꺼내 본 지는 꽤 오래되었어요.

 

관광버스는 바다가 보이는 길가에 멈췄고
그곳에서 저를 포함해 몇몇 사람들이 내렸어요.
그 부분은 기억이 흐릿한데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아버지가 주의를 줬던 것 같아요.
어디를 갔다 왔는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아마 화장실에 갔다 온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주위를 좀 둘러보고 온 것일 수도 있죠.
아무튼 다시 돌아왔을 때 버스는 그 자리에 없었어요.
아무 것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그냥 저 혼자였어요.
사람들로 북적이는 바닷가였어요.
열 살이었죠.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버스를 찾아 다녀보았어요.
그걸 모를 정도의 나이는 아니었어요.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결국 저는 그 바닷가에 완전히 혼자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부모님은 물론이고,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냥 내가 내렸다는 사실을 잊고 버스가 멀리 떠났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상식적으로, 그러니까 어른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사람들이 나를 찾을 거라는 생각을 해야 맞는 거겠죠.
하지만 열 살짜리 남자애의 상식은 좀 다르겠죠.
그것도 바닷가에 혼자 남겨져 약간의 공황 상태에 빠진 열 살짜리 남자애.
요즘처럼 똑똑한 열 살짜리와 비교를 하면 안 돼요.

 

저는 드디어 이 세상에 나 혼자 버려졌다는 생각을 했어요.
부모님을 포함해 사람들은 완전히 떠나 버렸고
나는 이대로 이 바닷가에 혼자 남았다는 생각.
그래서 무서웠냐구요?
아니,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얘기예요.
저는 이제 내 앞에 거대한 모험이 펼쳐졌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슴이 두근거렸죠.
제가 읽은 동화와 소년 문고의 모험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톰 소여의 모험, 15소년 표류기, 엄마 찾아 삼만리, 뭐 그런 거 말이에요.
기분이 좋았어요.
알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혀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고
어떤 모험을 겪게 될지 기대하는 그런 심정이었어요.
그리고 이대로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 거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때의 느낌은 지금도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이대로 혼자서...

 

생전 처음 와 보는 낯선 바닷가에서 미아가 되었는데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단 말이에요.
고작 열 살짜리가 말이에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의 뿌리는 무척 깊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무엇을 하지, 어떻게 살아가지, 상상의 나래를 펴며 주위를 배회하다가
결국 저를 찾아오는 부모님을 만났어요.
버스는 다른 곳에 주차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던 거예요.
저만 혼자 버스를 타지 못했고...
아주 짧은 모험이었어요.
그리고 걱정하는 얼굴의 부모님과 만났을 때,
그때 울었어요.
그때부터 울음이 나기 시작했어요.
이상한 일이죠.
아무튼 그날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한 꼬마가 있어요.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대로 부모님을 다시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울지 않았을 거라고.
다시 만났기 때문에 울었던 거라고 말이에요.
이상한 얘긴가요.

 

지금도 모험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냐구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때는 몰랐던 몇 가지 사실을 알고 있죠.

열매를 마음껏 따먹을 수 있는 야자수가 지천으로 널려 있고, 나무 창으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런 만만한 섬은 없다는 사실을,

모험을 떠나도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모험을 떠나도 집세는 내야하고, 전기세는 내야하고, 겨울이면 난방비가 든다는 사실을.

 

번개를 한 번 맞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

이제 그런 걸 믿어서는 안 되죠.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서 말이에요.

 

한밤중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가만히 지켜볼 때가 있어요.

그런 무서운 밤이 가끔 찾아와요.

 

모험은 없죠.
땅속에 묻혀 있는 이 지루한 일상이 모험이라고 받아들여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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