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 잡지에서 독자 기고문을 봤습니다. "예전에 이사를 할 때(포장이사가 대중화되기 전이라 이사를 직접 하던 시절) 용달이 짐을 실어다준 후 여자 혼자서 짐을 이리 저리 옮기다 너무 지쳐서 잠이 들었다. 땀이 뻘뻘 나서 옷도 거의 다 벗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잠을 깨보니 도둑이 들어서 물건들을 가져갔더라. 흉악범죄가 난무하는 지금 상황으로 보면, 도둑이 들어와서 벗다시피 한 여자가 혼자 누워있는데도 물건만 가져간 그때는 지금보단 나았던 것 같다."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시대가 흘러 흘러, 얼마 전 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하나 나왔습니다. 언론에 꽤 많이 보도가 되었는데, 특이성이 있었기 때문이죠. 피고인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최근 누구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는 뉴스는 대개 연쇄살인마에게서나 봤기때문에,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에게 사형이 떨어졌다면 얼마나 심한 짓을 한걸까 싶었지요. 기본적으로는 절도범이었는데, 절도 관련 범죄사실만도 30개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사형이 떨어진 이유는 단순히 범죄를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수법 때문이었는데, 여자 혼자 있거나 여자와 아이만 있는 집만 골라 들어가 범죄를 저질렀고, 신고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대부분 성폭행까지 했습니다. 아이가 있는 집의 경우 반항을 억압하기 위해 반항하면 아이를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고, 아이가 집안에 있는 상황에서 성폭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유사 전과도 있었기 때문에 법원은 그냥 사회로부터의 영구 격리를 선택했지요. 물론 1심 판결이었기 때문에 상소 과정에서 감형될 여지도 있겠습니다만.

 

이 사건을 보면서 제가 정말 무서웠던 것은, 그 범행 수법이 지극히 평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개 강력 범죄가 발생하면 그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각종 대책이 나옵니다.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거나,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거나 뭐 그런거. 그런데 이 범인은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이나 창문이 열려있는 집을 선택하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으면 벨을 누르고 "아랫집에 사는데, 윗집 화장실에서 물이 새서 밑으로 흐르는 것 같다. 화장실 좀 보여달라." 혹은 "윗집에서 화장실 공사를 마쳤는데, 아랫집에 영향이 없는지 점검해드리겠다." 등의 이유를 대며 문을 열게했습니다.

 

그나마 아파트 거주자라면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서 경비원을 불러 같이 들어오게 할 수 있겠지만(경비 절감을 위해 경비원이 많이 줄고 있는 요즘은 그나마도 쉽지 않을듯 합니다), 연립주택이라면 어떨까요? 물론 문을 안열어주면 해결은 되겠습니다만, 살다보면 온갖 사정이 생겨 이웃집에 문을 열어달라고 할 일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택배가 오면 어떨까요? 아파트같으면 안에 사람이 있어도 그냥 경비실에 맡기라고 하면 되겠습니다만, 단독주택에 택배가 와서 수령자 서명을 받아야 한다는데 무작정 문을 안열기도 참 곤란하지 않습니까?

 

집에 혼자 있는데 누가 오더니 "윗집 화장실 수리 마친 배관공인데요. 이거 잘못하면 아랫집으로 똥물이 새거든요. 공사 잘 됐는지 화장실 좀 봐드릴게요."라고 하면 "싫어" 라고 하실 건가요? 전 갸우뚱 하면서 문을 열어버릴 것 같습니다. 전 이런 범죄자들의 해악이, 단순히 직접적인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 전체적으로 불신풍조를 만연시키고 있어 더 화가 납니다. 누군가 나에게 뭘 보내줘서 택배가 왔다는데 현관문도 반갑게 열지 못하는 현실이라. 무섭고 씁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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