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산다는 것

2019.01.0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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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에 <여성의 삶 Das Leben der Frau>이라는 다큐 필름 하나를 보게 됐어요. 
중간에 독일 초등학교 학부형 회의 장면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질문 중 아이와 자신의 닮은점, 그리고 장점을 말해달라는 게 있었습니다. 
한 어머니가 이런 답을 하시더군요.
" 우선 제 아이의 장점은 여자라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커서도 자기가 여자라는 걸 장점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두번째 장점은, 이 아이가 저를 닮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저와 닮은 점이 없습니다."

세련된 대답이었어요.  숙고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렇고, 틈이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 첫느낌은 '작위적이고 과장된 답이구나'였어요. 왜냐하면 그 대답 속에서 아이의 어머니는 두 가지 면에 저항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첫째, 그분은 여성의 존재나 입지가 열등하다는 사고방식과 싸우고 있었고 둘째 , 부모가 자기애의 감정을 토대로 아이를 사랑하는 류의 방식과 싸우고 있었어요. 그만큼 세련된 대답이었습니다.

처음에 전 어떤 거부감을 느꼈는데요, 정지 버튼을 누르고 잠시 곰곰 생각해 본 뒤에는 그 어머니의 답이 옳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독일이든 한국이든,  세상의 많은 어머니가 그러하고, 그래야만 할 거라는 끄덕임이 따랐기 때문이에요.
다만 그 옳음이란 이성적인 태도의 영역에 국한될 수도 있다는 점을 부언해 놓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어머니처럼 말하는 이에게 저는 언제든 한 표를 주겠습니다. 
 
2. 그 영상을 다 보고 나니, 문득 강한 분노에 사로잡힌 어떤 여자에 관한 글이 써보고 싶어졌어요.
1. 들끓는 분노로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칠 것 같아 여자는 먼 곳으로 떠난다. 
2. 몇군데의 공간을 통과하는 동안,  새로운 몇 사람과 조우한다. 
3. 몇가지 상황을 겪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가진 증오의 대상이 '전혀 다른 어떤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뭐... 그러나 제겐 그런 글을 쓸 만한 능력도 시간도 없습니다. 지금 제 머리에 남아 있는 건, 살을 다 발리운 생선가시 같은 플롯 뿐이에요. 

3. 가끔 해보곤 하는 공상인데, 알고 있는 많은 여성의 얼굴을 반죽하듯 뒤섞어 각각 적당한 얼굴들로 나누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그 얼굴이 어제와 다른 새 얼굴이란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살아갔으면 싶은 소망이 있죠.
지나치게 밝거나 어두운 얼굴들, 지나치게 교태스럽거나 굳은 얼굴들,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위축된 얼굴들, 지나치게 어리거나 늙은 얼굴들.  그런 얼굴들 사이의 단절과 격차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 밖의 초개인적인 조건으로서의 여자의 삶이 느껴지거든요. 그 시간의 깊이와 속도까지.
그러나 제가 원하는 건 깊이나 속도 따위를 느끼는 일이 아니라, 아마도 기이할 정도의 조화로움과 고요함인 것 같아요.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4. 어린 시절 10년쯤 유럽을 떠돌며 자랐는데,  3월 8일이면 거리에서 노란 미모사 꽃다발을 받곤 했던 게 강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고, 그날 독일과 이탈리아에선 거리를 지나는 여성에게 미모사 다발을 나눠주곤 했어요.
왜 하필 미모사인지는 모르겠어요. 흔한 봄꽃이고 작은 자극에도 움츠러드는 그 특유의 성질 혹은 '예민한 마음'이라는 꽃말과 관계가 있는 것 아닐까? 추측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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