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제목과 포스터

2019.11.21 20:57

Sonny 조회 수:488

평어체로 씁니다... 양해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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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가장 유명한 이미지는 아무래도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산을 뛰어넘는 육체를 가진 그 앞에서, 프레임 안의 다른 존재는 하찮아진다. 사람이 적당히 크면 키가 크다거나, 덩치가 크다는 大의 의미를 붙이지만 거인의 경우에는 따로 巨라는 의미가 붙는다. big과 gigantic의 의미는 분명히 다르다. 후자는 범접할 수 없고 초월적이며 그 모든 것에 압도적이라는 절대적 의미에 더 가깝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 그 형제들이 올림푸스에 올라가기위해 벌인 두 차례의 전쟁은 모두 거인들과의 전쟁이었다. 신들이 있기 전부터 세계에 군림했던 두 종족, 기간테스와 타이탄은 하늘까지 키가 뻗었고 모든 것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을 내려다보기 위해서는 신들조차도 태초의 거인들을 물리쳐야 했다.


거인은 추락할 수 없다. 추락이란 떨어지는 당사자의 키보다 훨씬 더 큰 높이를 가지고 있을 때 성립하는 현상이다. 거인이 떨어질 수 있을 만큼의 구조물이 존재하면, 그것은 이미 거인이라고 보기 힘들다. 거인은 그저 모든 걸 굽어보고 짓밟을 뿐이다. 거인이라는 호칭이 붙을 때 그것은 쉽사리 쓰러질 수 없는, 우뚝 서있는 

반중력적 존재를 상징한다. 거인은 서서 걸어다닐 때 비로서 거인이다. 거인의 키와 걸을 때 내는 그 굉음은 모두 거인의 위엄으로 이어진다.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그저 우러러볼 뿐인 아뜩한 존재. 거인은 크기로서 규정되는 게 아니라 상태로 규정된다. 역사적으로 기억되고 칭송받는 사람들은 모두 거인이라 불린다. 그 반의어인 소인은 악당 혹은 비루한 존재를 일컫는다. 쉽게 쓰러지고 무릎꿇고 기어다니고 허리를 굽히며 본디 작은 크기의 몸과 마음을 더 힘껏 낮추고 생존과 이익만을 도모하는 그런 자들이다.


영화 <거인>에서 거인다운 존재는 단 한명도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 영재는 오히려 거인의 의미와는 가장 동떨어진 존재이다. 그는 늘상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어떻게든 빌붙어 살아볼려는 인간이다. 그는 심하게 좀스러워서 이 영화의 제목이 <벼룩>이어야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재의 선택들은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 찾아오는 위기 앞에서 그는 매번 작아진다. 그는 목사가 되고 싶어하지만 결정적으로 성적이 그에 미치질 못한다. 이미 여기서 이야기는 거진 끝났다. 야망은 있지만 힘이 없는 자는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인질극까지 벌리는 추태 끝에 그는 결국 휩쓸려 나간다. 풍랑 위 뗏목을 탄 인간처럼 노심초사하던 그는 마침내 부숴진 뗏목 조각을 부여잡고 멀리멀리 떠내려간다. 그의 마음을 굳세지 못하다고 탓할 순 없지만,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생존력마저 떨어지는 것은 질책하고 싶어진다. 영재는 자신의 무책임한 아버지를 미워하지만 그는 무엇이 다른가. 영재 역시 자신의 삶 앞에서는 무능력하다.


과거 어떤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지금은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지만 아버지 사업이 몇번 망할 때마다 고시원에 달동네를 전전하며 살았고 특히나 참기 힘든 것은 추운 날 찬물로 씻어야 하는 것었다고. 그래서 그는 한 여름에도 김이 날 정도로 따뜻한 물로 씻는다고 했다. 가난은 낫지 않는 생채기를 남긴다. 영재가 만약 이후 자수성가해서 부자가 된다면 어떤 반창고를 붙이려 할까. 거대한 집에서 혼자 살까. 혹은 비싼 신발을 수백켤레 장식해놓을까. 그는 그런 소망도 없다. 구체적일 수 없을만큼 그의 소망은 크고 원대하다. 거인이 되는 것. 물론 주인공은 단 한번도 그런 이야기를 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목과 더불어 우리는 그의 소망을 아주 정확히 짐작할 수 있다. 거인이 되고 싶어. 적당히 못가진 자여야 결핍을 구체적으로 채우고 넘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모자라고 다 흩어져있는 자는 위시리스트를 만들지 못한다. 부모도, 친구도, 애인도, 돈도, 환경도, 뭐 하나 없는 이 못자란 청년이 어떻게 구구절절 다 소원을 읊을 수 있을까. 그는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냥, 흔들리지 않고 싶어한다. 극한의 가난은 부유함의 핵심적 개념을 그를 이끈다. 걱정없는 삶을 살고 싶은 것도 아니고, 세상 무엇에도 끄떡없는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그렇게나 어리고 모자란 자의 설움은 아뜩한 꿈으로 이어진다.


떨어질 수가 없는 존재의 이름을 걸고 한 인간이 떨어져내린다. <거인> 포스터의 역설은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이라는 게 얼마나 무력한지, 거인이 얼마나 타고난 존재인지를 되짚는다. 그럼에도 한가지 희망은, 영재보다 더 약하고 여린 동생, 민재의 존재다. 인간은 혼자서는 버틸 수 없고 타인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한에 가까운 힘을 낼 수 있다. 마지막까지도 동생에게 이것저것 나눠주며 영재는 차에 실려 어디론가 멀어진다. 거인은 절대적 크기를 의미하지만 그와 비교되는 미약한 존재들이 있어야 증명될 수 있다. 영재는, 민재를 생각하며 어떻게든 힘을 낼 수 있을까. 지켜주고, 짓밟히지 않게끔 내려다볼 수 있는 존재가 한 인간을 거인으로 만든다. 거인의 가능성은 다부진 마음과 오기같은 게 아니라 힘이 될 수 있는 연민이다. 아주 많이 서럽겠지만, 그래도 영재는 민재를 생각하며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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