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겐 20대의 눈높이로

2019.02.08 15:24

흙파먹어요 조회 수:1320

한창 만사가 귀찮을 나이인 18세.

장마가 오려는지 삭신이 쑤셔오는 아이들이 쉰내 풀풀 풍기며 강당에 모여 있었습니다.
남자 고등학교란 종종 동물원의 원숭이 사육사와 분간이 어려워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마다 우끼끼~ 소리를 내고 있으면
학주께선 기~다란 작대기를 들고 다니시며 "갱생해라! 갱생!"을 외치곤 하셨죠.

여튼, 여느 때와 같이 죽비마냥 정수리를 따콩! 내리치는 작대기에 우끼~ 소리를 내고 있었던 그날.
단상 위에 웬 나치 포스터에서 봤음직한 미소를 머금은 아주머니께서 등판을 하셨더랬습니다.
남고에 미소지으며 찾아오는 아줌마는 둘 중 하나죠. 적십자 간호사 선생님, 혹은 성교육 강사.
아직 봄에 피 뽑힌 자리의 딱지도 아물지 않았고, 맞습니다. 그날은 성교육의 날이었어요.

때는 구성애 선생조차 가장 아름다운 남아의 형상이란 운동 후 땀을 흘리는 모습이라 공맹의 도리를 외던 시절.
그러나, 우리 비록 국경일에는 피가 끓어오를 지언정 워크맨만은 소니를 찬양하던 배반의 청춘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화면으로는 올챙이군의 야망과 좌절을 보여줘놓곤 여러분의 성은 아름다운 거라 떠들어대면 어쩌란 말인지요?
"그녀" 아직 이 땅에 도착은 아니 하였지만, 하늘은 벌써 그렇게나 푸르렀는데 말입니다..

시간을 점프하여 2016년.
광화문에 가설된 무대에 민중가수 한 명이 오릅니다. 그의 이름은 손병휘.
지금은 거의 망한 국민티비에서 라디오 프로를 진행하여 이름을 알린 사람이에요.
촛불집회가 무르익던 어느 날, 손 씨는 함께 방송을 진행하던 박성호(물뚝)에게 말 합니다.
-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노래를 해야죠

그리고, 드디어 무대에 오른 손병휘가 부른 노래른 "타는 목마름으로" 였습니다.
떼창과 발라드 가수 공연에서 익힌 율동으로 흥을 이어나가던 사람들은 그러나,
단조로 구슬프게(야, 이거.. 엠프 꺼졌냐?) 튕기는 기타 전주와, 생전 들어본적도 없는 가사에 당황합니다.
오직 "그 시절"에 전경과 맞다이를 깠던 역전의 OB들과, 저처럼 어설프게 선배들 따라다녔던 중년들만이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하는 가사를 소심하게 따라 불렀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촛불집회의 시작을 "이대생들이 쏘아올린 작은 공" 이라고 부릅니다.
수면 아래에선 총수가 열심히 벙커에서 닭을 튀기는 등 숱한 투쟁을 벌여왔지만,
뭔가 뇌관을 탁 하고 건드린 것은 총장실 앞을 점거한 이화여대생들.
그리고 이 노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있었어요.

경찰병력 1600명(무려 연대병력)이 이미 학교에 들어와 있는 상황.
진압작전 전개 직전에 퇴로가 완전히 차단당한 학생들이 무슨 마음으로 그 노래를 불렀을까요?(아 씨바 눈물이...)
아마도, 그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팔뚝질을 했더라면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붉은 머리띠와 팔뚝질, 만장으로 상징되는 스트라이크의 이미지에 사람들은 이유야 어찌됐든 지쳐있거나 감흥의 역치로부터 한참 멀어져 있었어요.
게다가, 그들이 부른 아이돌의 노래는 그들 세대가 학창시절이라는 하나의 고난을 함께 지나오며 공유할 수 있었던, 그 자체로 시대정신이었습니다.

시대정신이 꼭 거창하고 그럴싸해야 시대정신인가? 당대 청년들의 목소리와 욕구를 대변할 수 있으면 그게 정신이지.
이거 듣기 싫으면 웨스트코스트로 꺼지라며 지 꼴리는대로 달리고 또 달렸던 불타는 나팔이 비밥의 정신이었던 것처럼.

커피 하나씩 챙겨들고 꼰대들끼리 요즘 20대들이 어쩌니, 민주당 지지율 이대로 좋은가를 떠들어대다가
문득, 몇 년 전에 정봉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 진보와 정의가 재밌고, 멋있고, 따라하고픈 것이어야 한다.

오늘 뉴스공장에서 발표한 리얼미터의 정당지지율에 의하면, 드디어 민주당과 자유당이 한 자리 수로 격차가 좁혀졌다네요.
그 중에도 20대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게 뜨악하여,
그냥, 짧게 푸념 한 번 늘어놔 봤습니다.
민주당이, 우리 꼰대들이 지금 20대들의 가려운 곳을 못 긁어주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다만세가 아닌, 타는 목마름으로를 선창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럼, 즐거운 오후 되시기를
꾸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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