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정하고 놀려대기 딱 좋은 영화이지만 그런 투로 쓰면 영화에 대한 제 설명이 이해하기 복잡해질 것 같아서 그냥 정색하고 진지하게 써 봅니다. 결말 스포일러는 없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네요. ㅋㅋㅋ



 - 80분 조금 넘는 영화인데 '호러'라고 할만한 게 시작되기까지 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 준비 과정은 대략 이래요. 배경은 어느 고등학교. 먼저 부잣집 딸 이정현이 있습니다. 근데 학교에선 왕따네요. 아주 선량하고 착하게 다 참고 살면서 같은 반 김래원을 짝사랑합니다. 막 김래원에게 용돈도 한 번에 50만원씩 주고 그래요. ㄷㄷㄷ 그리고 거칠게 사는 날라리 소녀 김꽃지가 있습니다. (김꽃'비' 아닙니다) 가난한 달동네 소녀이고 돈이 없어서 중년 아재와 원조교제(당시 표현 한 번 써봤네요)까지 해요. 김래원을 좋아하지만 김래원이 요즘 이정현에게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 불만입니다. 마지막으로 김래원은... 뭐 그냥 그 시절 터프가이 캐릭터입니다. 흰 런닝 위에 가죽 재킷을 입고 어두운 밤에 바이크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며 놀다가 가끔 용돈 받아 나이트 가서 술도 마시고 학교 쉬는 시간엔 구석에 숨어서 간지나게(?) 담배를 피우는 상남자죠.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겠죠?


 암튼 이 셋은 모두 학교 영화 동아리 회원들이에요. 그 안에서 대략 한 시간 동안 투닥투닥거리고 바이크를 타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각자 자기 인생에 짜증을 내다가 결국 영화를 찍으러 보트를 타고 무인도에 가는데... 드디어 실제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 일단 이 영화의 못 만든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지금 제가 직장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 같은 제작비를 쥐어주고 본인들 스마트폰으로 영화 한 편 찍어오라고, 어떻게든 상영 시간은 한 시간 삼십분 근처로 맞춰 보라고 시키면 대략 비슷한 퀄이 나올 겁니다. 글 제목에도 적었듯이 저는 정말로 궁서체로 진지합니다. 연기든 촬영이든 편집이든 실제 10대 학생들 중 아주 평범하게 능력 있는 애들 모아다가 시키면 이만큼은 할 수 있어요. ㅇㄱㄹㅇ ㅂㅂㅂㄱ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네요.


 연기에 대해선 이런 평이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네요. 어쨌거나 이정현과 김꽃지는 나름 재능 있는 배우들이었고 이토록 모자란 시나리오 안에서도 어떻게든 제 밥값 정도는 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근데 나머지 배우들이 죄다 그냥 아마추어 레벨이라는 게 문제구요.


 촬영이요? 글쎄요 뭐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는 보여줘야해!!!'라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내용만 보이게 찍은 영상 기록물(...)에 가깝습니다.

 음악? 보통 사람들이 '한국 영화의 음악들은 대체로 너무 설명적이야'라고 많이들 비판하잖아요. 이 영화의 음악은 설명적 스타일에조차 근접하지 못합니다. 상황과 분위기와 상관 없는 음악들이 걍 무시로 흘러나와서 대사를 씹어 먹습니다.

 음향. 끝내주지요. 뭔가 음악이 깔리기 시작하면, 효과음이 들리기 시작하면 여지없이 대사가 안 들려요. 시작부터 끝까지 그렇습니다.

 정말 대단한 게 또 편집이에요. 장면이 자연스런 흐름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적습니다.

 시나리오는 뭐 망작의 필수 조건이잖아요.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합니다.


 정말 대단히, 완벽에 가깝도록 못 만든 영화에요.

 검색을 해보니 이 작품의 이 영화 감독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던데 당연합니다. 불쌍히 여기긴 커녕 여기 관련된 사람들 모두에게 평생 사죄하며 살아야 해요. 심지어 김꽃지 배우는 '나쁜 영화'로 꽤 주목받다가 바로 다음 작품으로 여기 나온 후 커리어를 마무리했어요. 뭔가 다른 사정도 있어서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모양새가 너무 슬픈...;



 - 하지만 다들 아시겠지만 이 영화엔 비장의 무기가 있습니다. 나레이션이요.

 중간중간 되게 민망한 퀄리티의 정지화면(집에서 폰으로 찍은 영상 보다가 중간에 할 일이 생겨서 일시 정지해 놓은 수준입니다. 과장 없어요.)을 띄워 놓고 해설자가 제 4의 벽을 깨며 관객들에게 말을 걸어요. 애초에 영화의 시작이 이렇습니다. 맥락도 없이 다짜고짜 누군가가 칼에 푹푹 찔리는 장면을 잠시 보여주다가 멈추고, 나레이터가 대충 이런 말을 하는 거죠. "좀 끔찍해 보이지만 걱정마세요. 어차피 이건 영화를 찍는 장면이고 저건 다 가짜에요."


 뻔한 트릭 같지만 계속 보다보면 이게 꽤 매력이 있습니다.

 일단 이 나레이터 드립의 종류가 꽤 다양합니다. 주인공들의 행동을 놀리고 비꼬며 그냥 웃기기 위한 드립을 치기도 해요. 가끔은 영화의 허접한 완성도를 쉴드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상당수의 장면에서는 실제로 화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의 내용을 거부(!)해버리기도 해요. 그래서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1. 이 나레이션은 분명히 애초에 계획되지 않았을 것이다.

 2. 뒤늦게 투입되어 이 나레이션을 쓴 사람은 이 영화의 꼬라지가 너무나도 맘에 안 들었다.

 3. 이 나레이션이 영화의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투입되었을 거라는 건 당연한데, 정작 관객인 나보다 더 영화를 싫어하고 있어!!!


 이러니 이 나레이션은 그냥 그 존재 자체가 웃겨요. 그러니 나레이션이 나올 때마다 웃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ㅋㅋㅋ 심지어 내용이 꽤 센스도 있어요. 대단한 유머까진 아니어도 그냥 인터넷 사방에 널린 커뮤니티 어딘가에서 찰진 드리퍼 소리 들을 수준의 일반인 정도는 충분히 되거든요.


 그리고 단순하게 남이 완성해 놓은 망한 영화에다가 나레이션만 추가한 게 아니에요. 나레이션을 추가하면서 강해진 개그 컨셉에 맞춰 영화를 손봤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장면이 있어요. 김꽃지 캐릭터가 돈 벌기 위해 명계남(...) 아재와 원조교제를 하는데, 차 안에서 '돈 많이 주실 수 있어요?' 라고 묻고 명계남이 오케이 하자 자신의 허벅지를 더듬는 명계남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꼭 잡는 장면. 그런데 이렇게 '꼭 잡는' 순간 갑자기 고색창연 유치한 효과음으로 '오도독!' 소리가 나면서 화면이 멈추고 그 순간 나레이터가 튀어나와 '꽃지는 아저씨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고 결국 둘이는 아무 것도 안 했대요'라는 나레이션을 읊는 겁니다. ㅋㅋ 실제 영화의 내용을 거부하면서 그걸 개그로 써먹고 그러기 위해 효과음까지 추가한 거죠.


 심지어 막판엔 이런 장면도 나옵니다. 중요한 순간에 어떤 캐릭터가 갑자기 머리를 밀고 나와요. 아무 맥락도 의미도 없는데 암튼 그러고 나오고, 김래원이 그걸 보고 놀라는데 암튼 아무런 설명 없이 그 직후에 머리를 민 캐릭터는 죽어요. 이어지는 장면에서 김래원은 범인과 사투를 벌이는데 그 와중에 화면이 멈추며 이런 나레이션이 나오는 겁니다. '래원이는 범인이 왜 이럴까도 궁금했지만 xx이가 머리를 민 이유가 정말로 궁금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암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상당히 재밌게 봤어요. 그런데 그 재미는 두 가지 요소에서 나옵니다. 상상 초월, 상식 무시급으로 못 만들어진 영화의 완성도 + 그걸 스스로 부정하고 놀려대는 나레이션의 찰진 드립. 어느 쪽이든 그다지 정상적인 재미는 아니죠. 게다가 그나마도 중반 넘어가면 금방 식상해지구요. 

 하지만 망작 매니아라면 꼭 한 번 즐겨야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심하게 모자란 영화는 세상에 많지만 A가 만들다 만 모자란 영화를 B가 조롱하면서 마무리해 내놓은 영화는 세상에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거슨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ㅋㅋㅋ




 - 덧붙여서...

 "도대체 제작 과정에서 정확하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냐!?"라는 호기심을 아주 강력하게 발동시키는 영화입니다.

 일단 주인공들이 호러 영화 제작 동아리 구성원이라는 걸 보면 '스크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메타 호러 영화 같은 걸 의도했다고 볼 수 있겠죠.

 잘려나가지 않고 살아 있는 장면들을 통해 볼 때 호러 + 코미디라는 성격도 원래 감독이 의도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거기에다가 빈부 격차, 은둔형 외톨이에 얼굴 없는 인터넷 채팅을 통한 관계 형성 같은 당시의 트렌디한 소재들도 교훈적으로 버무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문제는 기본적으로 감독이 멀쩡한 영화를 만들 능력이 없었던 데다가... 센스가 너무 후졌다는 겁니다.

 나레이션이 없다고 치고 봐도 초반에 나오는 몇몇 개그 장면들을 보면 딱 '고교 얄개' 시절 느낌이거든요. 교실에서 옷 갈아입다가 남학생을 마주친 여학생이 '너는 내 순결을 앗아갔어!!'라고 외치며 책임지라고 매달리고, '어휴 씨!! 왜 이렇게 돼버린거야!!' 라고 오버 액팅 연기를 하며 고개를 떨구고 한탄하는 남학생을 보여주는 걸 2000년도 영화에 웃기는 장면이라고 넣어두는 사람이니까요. 나중에 수습 요원들에게 자기 작품이 정면으로 부정당하고 조롱당해도 사실 할 말이 없다고 봐요. 그래뵈도 당시 인기 스타 둘에 떠오르는 신인 하나를 캐스팅해서 만든 영화인데 말이죠.

 


 - 생각해보니 이게 딱 2000년에 나온, 그러니까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영화더군요. 음... 뭐 당연히 별 감흥 같은 건 없고 그저 그 때의 제가 그립습니다. ㅋㅋㅋ



 - 어차피 이 영활 찾아보실 분은 없으실 테니 뮤직비디오라도 한 번 보시죠. 그나마 이 영화에서 가장 멀쩡한 게 이정현이 부른 이 주제가인데... 뮤직비디오는 영화 장면 편집이라 역시 허접하군요. ㅋㅋㅋ




 + 아 참 아주 중요한 포인트를 까먹었네요. 제가 위에서 칭찬(?)한 이 영화의 나레이터는 성우 이선영씨입니다. 이선영의 영화음악의 그 이선영씨요. 이 어찌 훌륭한 영화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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