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부산에 일보러 갔다가 올라오는 KTX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 (대학생인 듯) 노트북으로 보는 영화를 강제 감상했습니다. 
이어폰을 착용해서 소리는 안 났으나 그 좁은 옆자리에서 영상이 번적거리니까 읽던 책을 접게 되더라고요. - -  작품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디아워스>였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버지니아 울프와 남편이 역 벤치에 나란히 앉아 대화하는 장면이에요. 기차가 들어오고 나가는 역 플랫폼에서, 두 사람은 머물 것인지 떠날 것인지에 대해 말하며 지난 시절을 반추하죠. 애정과 갈등이 번갈아 표면으로 떠오르는 얽힘의 그 장면.
얽힘은 프로이트의 용어로는 콤플렉스입니다. 콤플렉스 없이 텍스트에 긴장은 생겨나지 않아요. 어제 다시 보면서, 저는 그 장면이 어쩐지 바닷가의 정경 같다고 느꼈습니다. 
역의 플랫폼은 바다가 그렇듯이 항상 저편을 느끼게 하기 때문일까요. 사실 프랫폼으로 무연히 드나드는 기차들은 출렁이는 파도와 닮았죠. Escape에 대한 욕구의 암시로서, 역 플랫폼은 그 동요와 일렁임을 담백하게 전달해주는 미장센입니다.

운명과의 사랑에 이르는 길에도 다양한 양상이 있을 거예요. 이 영화에서 울프가 보여주는 것은 절박함을 통한 사랑으로 이른바 순전한 헌신입니다.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내린 사람이 수면에 닿기 전까지 공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수면과 부딪치고 바다 속으로 잠수하기까지의 그 과정에 무엇이 끼어들 수 있을까요?
낙하에의 몰두. 절망을 통한 그 몰두가 바로 운명애의 본질이라는 것을 울프의 삶은 보여줍니다. 절망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순간의 그런 순전함은 아름다운 동시에 암담하지요.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2.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The Hours>O.S.T를 들었습니다. Philip Glass의 음반을 처음 구입한 게 이 영화를 보고 나서였어요. 부클릿에 실린 마이클 커닝햄의 글이 좋습니다. 

"왜 소설을 쓰느냐는 질문에 나는 참으로 간단히, 분명하게 답할 수 있다. 노래를 못하고, 악기를 다루지 못하고, 소나타를 작곡할 수 없으므로 나는 소설을 쓴다고.
문학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다. 만약 외계인이 와서 "예술을 통해 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이 뭐냐"고 지구인에게 묻는다면, 바흐의 음악을 떠올리지 톨스토이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문학도 음악에 비하면 지엽적인 작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은 켄타루스좌에서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음악은 거기서도 연주될 수 있다. 음악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창조할 능력이 없기에, 나는 매일 아침 글을 쓰기 전에 음악을 들으면서 내가 쓰는 글들이 슈베르트나 밴 모리슨, 필립 글라스의 음악처럼 리듬감 있고 마음을 꿰뚫을 수 있는 것이기를 바랐다.

지금까지 내가 쓴 소설들은 하나의 사운드 트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음악이 알듯 모를듯 - 그러나 분명히 - 소설의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들이 특정한 음악과 내 소설을 연결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A Home at the End of the World ]가 로리 앤더슨의  'Big science'와 조니 미첼의 'Blue', 모짜르트의 '레퀴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Flesh & Blood]는 베르디의 오페라, 닐영의 'After the gold rush'와 스미스의 몇몇 앨범, 제프 버클리의 'Halleluyah'(레너드 코헨이 표지에 나오는)에서 비롯된 것이다.

<The hours>에는 슈베르트(특히 '죽음과 소녀'), 브라이언 이노의 'Music for airports', 피터 가브리엘의 'Mercy street',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가  들어가 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항상 들어온 음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필립 글라스의 작품이다. 나는 글라스의 음악을 같은 이유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만큼이나 좋아한다. 

글라스는 울프가 그렇듯, 시작하고, 절정에 오르고, 끝이 나는 것보다는 지속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울프처럼 글라스는 아름다움이란 과거나 미래와 연관된 현재가 아니라, 현재라는 순간 그 자체에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글라스와 울프는 뭔가를 서술하는 것보다는 관조하는 것이 삶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이 전통적인 이야기를 파괴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반복하는 존재들이다. 그런 반복을 감싸안지 못한다면, 그 결과  삶의 많은 부분 - 리듬과  영원히 이어질듯한 미묘한 변화들 -을 놓치게 될 것이다."

3. 필립 글라스에 대해선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작곡가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어요. 예술의 한 면에 기억(과거)과 예감(미래)을 넘나들며 구성되는 현재가 서 있다면, 글라스의 음악은 그런 연관이 없는 절대적 현존을 표현하는 듯싶어요.
그런데 위의 글로만 보자면, 글라스의 음악에 대한 커닝햄의 이해에는 서술과 관조에 대한 혼동이 섞여 있습니다. <행동하는 것 la vita activa>과 <관조하는 것la vita speculativa>의 대비는 가능하겠지만, '쓰기'와 '관조'는 대조를 이룰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음악은 순수한 소리의 흐름이죠. 음악의 진행과정은 말 그대로 진행 그 자체, 흘러감이라는 현상체험입니다. 그런 점에서 음악은 관조와는 상관없는 것 아닐까요. 음악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쓰기 방식을 관조적 글쓰기라고 말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음악에 대해 시각적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크 시대의 독특한 공감각 이론에 기초한 '회화 음악'에나 해당되는 해석이 아닐런지.
음악은 청각을 통한 울림을 처리하는 과정이므로, 글라스의 음악이 '이야기'를 파괴한다는 커닝햄의 말이 얼마나 타당한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Philip Glass Morning Passages (The Hours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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