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공정판타지

2020.10.28 16:55

Sonny 조회 수:667

"공정"이란 키워드가 떠오를 때마다 대입과 취직을 가장 정면으로 마주하는 20대들이 제일 뜨겁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온도와 무관하게 방향이 정확한지 미심쩍을 때가 많습니다. 조국의 자녀는 몰아내야하지만 나경원의 자녀나 연세대 부총장 자식의 부정입학에 대해서는 조용한 이들을 볼 때, 그 공정이란 무엇인지 되묻게 됩니다. 단순한 정치적 편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공정에 관한 논란은 모두 문제풀이 형식의 시험을 통과하는 경쟁을 거쳐 합격결과를 얻는 게 아니면 특혜로 간주하는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체감이지만 2010년대까지만 해도 기존의 공정 논란이 고위층의 부정특혜를 항의하는 상향식의 분노였다면, 기존의 공정 논란은 비정규직, 여성, 수시생, 외국인(특히 중국국적), 등의 사회적 하위층을 향한 복지와 지원을 공격하는 하향식 분노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는 연세대 에타에 올라온 기초생활수급자 학생이 장학금을 받고 자신보다 비싼 밥을 사먹는다는 것에 대한 울분섞인 글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공정과 학력에 관한 논의는 이화여대 라이프 캠퍼스 건과 정유라 성적 조작 건이 우리 시대의 마지막 투쟁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공정에 대한 대다수의 논의는 사실상 계급의식의 선언입니다. 공정한 경쟁을 이야기하지만 모든 것이 시험점수에 따라 고정되어야한다는 이 논의는 사실상 그 시험이라는 경쟁에 지원할 여력이 부족한 계층을 완전히 소외하고 있죠. 시험으로 분류되는 경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저 공정한 도전과 성취가 아니라 그 시험에 지원할 수 있는 밑바침을 의미한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친다고 한다면 그 학교에 가기까지, 그 학교에서 시험을 볼 때 필요한 볼펜 등등을 준비하기까지 모든 것이 돈과 시간 그리고 태생적으로 주어진 자본에 영향을 받습니다. 토익 점수가 경쟁의 척도가 되었지만 그 토익에 접수하는 것도 돈이라는 사실은 경쟁 자체를 지원하기 위한 또 다른 경쟁이 앞서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가리킵니다. 사회가 경쟁에 임할 수 있는 밑바탕을 지원해주거나 그 부분을 감안해서 추가로 점수를 준다면, 그것은 시험점수가 아니니 무조건 불공정하다는 결론에 내버립니다. 결국 개천에서는 미꾸라지만 살고 바다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환경적 조건은 알아서 극복하라는 각자도생의 논리를 다들 따르게 됩니다.


쓰다보니 제가 오래 전에 읽었고 아직까지도 최애 만화 리스트에 꼽는 "수험의 제왕"이라는 일본만화가 떠오르네요. 대입시험을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하는지 우스꽝스럽게 과장한 만화인데, 의외로 내용의 디테일들은 수험생들이 공감할 부분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시험 좌석은 어떤가요? 얼핏 보면 공정해보이지만 그날 자기 옆자리에 체취가 심한 사람이 앉는다거나 화려한 무늬의 옷으로 눈을 현혹시킨다거나 의자가 유난히 삐걱댄다거나 하는 자신만의 불공정한 조건에 맞닥뜨릴 수 있다고 경고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 만화는 그걸 대비하기 위해 뱀에 물리고 빨래집게에 꼬집힌 채로 시험공부를 하면서 평상심을 기르는 훈련을 하죠 ㅋㅋ 보다보면 골때리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그런 것들도 전부 공정과 결부해서 생각해볼 내용이 있습니다. 대입 원서를 지원해야하는데 주인공의 입학을 방해하는 사람이 주인공 주변의 우체국과 다른 접수처에 엑스트라들을 총동원해 업무를 마비시켜버립니다. 주인공은 불공정한 경쟁에 휘말려들고 맙니다. 이 만화를 읽어주셨으면 좋겠으니 자세한 내용은 쓰지 않겠습니다.


공정과 게임이 무슨 상관인지 묻고 싶은 분들이 있을텐데요. 저는 20대의 공정판타지가 게임이라는 문화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컴퓨터 게임이라는 것은 대부분 사람과 사람의 대결을 상정할 때 어찌됐든 캐릭터, 맵, 혹은 다른 조건에서의 모든 밸런스가 맞춰진 상태이니까요. 저는 안해서 잘 모르지만 블리자드의 오버워치에 대해 물어보면 사촌동생들은 "밸런스 시망"이라고 대답을 하더군요. 그러니까 게임의 대전제는 공정이고, 아예 공정이 구현이 된 세계를 유년기때부터 자라날 때까지 문화이자 가치관의 척도로서 계속 접하고 있습니다. 우리 때(틀딱...틀딱!!!)만 해도 게임이 그렇게 범국민적인 문화는 아니었지만 이제 게임안하면서 자라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전국민이 공정이 완성된 세계의 유희를 즐기며 그것을 자연스레 여기고 그렇게만 하면 된다는 믿음을 강하게 갖고 자랍니다. 밸런스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충 할 만은 하고 그래서 거기에서 개인의 노력을 시험하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개인의 노력만이 오로지 승패를 가늠하는 가장 확실한 요소입니다. 세상은 게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걸 체감하고 세상에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게임의 출발점은 모두 동일합니다. 쪼렙으로 시작해 노력에 따라 등급이나 점수를 달리 받고 본인의 납득할만한 위치를 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최소한의 공정함이 지켜지지 않는 게임이라면? 그 게임을 그만두거나 그 게임이 멸망하는 것을 확실히 목격할 수 있습니다. 공정함 위에서 개인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즐길 수 있고 그 공정함이 지켜지지 않는 세계에는 응분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정하지 못한 세계는 소멸하고 공정한 세계만이 살아남아 그 안에서 개인의 노력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환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 다르죠. 자본이 전부인 세상에서 자본의 양을 아예 달리하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문제는 이 현실세계는 밸런스 패치가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갈 수록 망가지고 치터들은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습니다. 수많은 핵과 협소한 렙업 기준만이 있는 곳이 현실입니다. 게임의 캐릭터는 자신이 고를 수 있지만 피부색과 성별과 태어날 집의 가계부는 자신이 고를 수 없습니다. 완전한 랜덤입니다. 현실세계처럼 불공정한 곳이 또 없습니다.


토익이 렙업을 위한 하나의 스탯이라고 합시다. 게임에서는 이 스탯을 올리기 위한 퀘스트가 제공이 되고 그것은 대개 단순한 반복 노동으로 해결이 가능합니다. 사냥을 하든 뭘 잡든 어쨌든 조금의 시간과 번거로움만 참아내면 그것을 아주 즐겁게 견디면서 거의 자동으로 완수할 수 있는 퀘스트가 계속 주어집니다. 그런데 현실도 그런가요. 퀘스트를 무엇을 해야하고 어떻게 하면 그 퀘스트를 얻을 수 있는지 정보부터 아예 격차가 생깁니다. 게임은 게이머들을 위해 모든 것을 정해놓고 인도하지만 현실세계는 아무것도 정해주지 않습니다. 현실이 사람이라는 플레이어에게 자동으로 수행이 되도록 준 퀘스트는 불수의근의 움직임에 따른 소화과정 그런 것 밖에 없습니다. 플레이어가 말도 안되는 사고로 죽는 경우도 빈번한데다가 게임을 할 수 없게끔 갑자기 접속이 끊어지거나 스턴 상태에 빠지는 일도 허다합니다. 현실이라는 월드에서 사람이라는 플레이어는 안전한 상태가 절대 아닙니다. 스탯은 커녕 캐삭이 갑자기 이뤄지거나 렙업이 아예 되지도 않습니다. 현실에서의 머니가 없으면 이런 경향은 더 심해집니다.


공정이라는 키워드는 오히려 그 공정을 잘못 이해할 수 있는 세대의 조건을 함축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에는 공부도 게임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원 갔다와서 게임 하면서 사는 패턴의 렙업을 착착 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하죠. 공부를 하는 것, 게임을 하는 것, 이 두가지 행위는 기본적으로 환경이 갖춰져야 할 수 있는 것이고 노력으로 경쟁을 따지기 전에 미리 들어가는 품이 있습니다. 현실은 게임보다 훨씬 개판이라서 대대적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고 행복추구권을 그나마 추구할 수 있게끔 유저 개개인의 캐릭터들을 일시적으로 업그레이드 해주는 것만이 그나마 가능한 조치입니다. 게임을 통한 세상의 이해는 결국 승자의 논리이자 "게임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논리라는 걸 더 많이 상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암울한 것은 실질적으로 착취계층에 해당하는 이들마저 우리가 노력을 안했으니 이 모양 이꼴이 되는 게 맞지... 하면서 그것을 패배로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아직 현실은 게임의 기본 밸런스인 각 캐의 기본치 조정을 전혀 손도 못댔습니다. 매번 운이 좋거나 비범한 노력이 가능한 사람들만이 살아남고 있는 이 현실이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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