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임 집들이 후기

2020.10.29 16:34

Sonny 조회 수:1102

한달에 한번씩 얼굴을 비추는 소모임이 있습니다. 열두번만 얼굴을 비추면 1년이 지나가버린다는 점에서 굉장히 무서운 소모임입니다. 그 소모임에서 기간만 신혼이고 마음은 인셉션 림보 노부부처럼 되어버린 "새부부"가 사람들을 집들이에 초대했습니다. 시국도 시국이거니와 미뤄지던 집들이 행사를 이참에 쇠뿔 뽑아버리듯 해버리자는, 성급한 합의에 의해서요. 서울에서 경기도를 가는 길은 멀었고 저는 양주 한병을 싸갔습니다. 상다리가 위태로울만큼 음식들이 차려졌고 오랜만에 다수의 사람들과 안전한 기분으로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혹시 예수도 자기 제자들이랑 이렇게 놀았을까? 싶었지만 저희 중에는 그 분처럼 심란한 분은 없었습니다. 막걸리도 마시고 와인도 마시고 스테이크도 먹고 어떤 분은 살짝 꽐라가 되서 숙면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로마시대 귀족처럼 맛난 걸 너무 많이 먹어서 잠만보처럼 배를 두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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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친구 집들이를 갈 때마다 적잖이 불편했던 게 있었습니다. 친구가 손님으로 저를 맞이하면 그 친구의 아내가 항상 분주하게 요리를 하고 뭘 내오느라 고생을 하곤 했습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2인 가정에 가모장제가 비교적 엄격하게 확립되어있어서 그래도 평등하게 업무분담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호스트이신 남편 분께서 제 옆자리에 앉았고 저는 그 분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이상하게도 그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모습 뿐입니다. 그 모습은 마치 한마리의 도비 같았습니다. 분명히 이야기를 하고 같이 웃었는데... 그 때의 풍경을 떠올리려고 하면 훗... 그것은 잔상입니다... 이런 효과만 나옵니다. 컵이 없어요 물이 없어요 젓가락이 없어요 술이 없어요 할 때마다 그 분은 흡사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말벌 아저씨 같았습니다. 그는 매우 잽싸고 친절해서 가끔은 슬퍼졌습니다. 남편이 그 정도는 해야 그래도 공평한 모양새가 그려지는구나 하는 감동 같은 것도 받았습니다. 사모님(?)도 너무 고생을 하셔서... 먹지도 못하시고 계속 요리내오느랴 수저젓가락 컵 챙겨주느랴 사극 엑스트라 주모캐릭터만큼 바쁘셨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취기가 올라서 야! 내가 오늘 기분이 좋다! 이렇게 다들 모여서 기분이 좋아! 말씀하시는 거에 좀 안심하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어느 게스트분의 말에 심기가 언짢으셨는지 '건방져... 저 자식 건방져...' 같은 말씀을 하시긴 했지만.


오프라인 키배도 벌어졌습니다. 블랙핑크 제니의 간호사 복장 이대로 괜찮은가? 에 대한 10분 토론이 짤막하게 열렸는데 압도적 반대파에 의해 이것은 검열이라고 부르짖던 모 분께서 자진진압을 당했습니다. 이 소모임의 흥미로운 점은 온라인 게시판에서나 심도있게 떠들법한 주제를 오프라인에서도 떠들 수 있다는 것인데 한 명이 비추폭탄을 맞았지만 비교적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토론은 정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건강 이야기가 이어져서 어디가 어떻게 안좋아지고 있으며 몸이 예전같지 않다는 탄식들이 줄을 이었는데요. 쓰니야, 약챙겨먹어... 쓰니야, 운동해... 같은 하나마나한 훈훈한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습니다. 평소에 종로에서 만남을 갖곤하던 이 소모임이 그날만큼은 경기도에서 열려서 어쩐지 압박감이 덜했습니다. 그리고 여지없이 옛날이 좋았지 하는 꼰머타임이 이어졌고 비교적 신입인 저는 또 알 수 없는 그 때 그 시절 비망록이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누구는 어찌 사느냐, 누구는 언제 나왔느냐... 이건 그냥 저 혼자만의 상상인데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 분들이 먼 산을 응시하며 다른 분의 얼굴을 머리 위에 오버랩으로 띄우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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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부부인데 그냥 혼부부같은 호스트의 집에 집들이를 한다면 역시 제일 재미있는 것은 호스트 부부의 우당탕탕 폭로대소동입니다. 프라이버시라 다 밝힐 수는 없습니다만 어떤 사실이 폭로되었고, 폭로당한 한 쪽이 분개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증언은 너무 엉성해서 저희 모두 물음표를 띄우게 했습니다. 그게 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분은 열심히 항변했고 저희는 들을 수록 큰 소리로 수근대면서 그게 뭔 논리야... 하고 나름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열두명의 성난 사람들>은 피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한명한명 설득해나가는 이야기였지만 집들이 현장에서는 열두명의 성난 사람들이  그 분의 수치사를 판결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부부 쌍방의 소규모 국민청원을 사전에 막기 위해 보드게임 같은 것도 하고 마피아 게임 같은 거라도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뭐였더라... 저는 왕 신하 백성 이런 계급을 정해서 하는 보드게임이 좀 해보고 싶더군요. 특히나 이런 식으로 여왕체계가 잡혀있는 가정에서 권력적 보드게임을 할 때의 현실과 가상현실의 충돌 같은 게 좀 구경하고 싶어졌습니다.


아주 즐거운 모임이었습니다. 기분 같아서는 맥주 한코프 마시고 어나더!! 를 외치며 컵을 바닥에 던지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참고로 실거주자의 수가 적은 가정에 집들이를 할 때에는 컵을 선물로 갖고 가면 좋겠다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다음 집들이때는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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