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변희수 하사를 기리기 위해 서울시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책을 읽는 추모 행사가 있었습니다. 시청역에서 지인을 만나 부랴부랴 시간에 맞춰 주최자와 참여자들이 있던 칸에 올라탔습니다. 트랜스젠더를 지지한다는 티를 내기 위해 저마다 알록달록한 마스크를 쓰거나 뱃지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습니다. 저도 지인이 건네준 하늘색과 분홍색 뱃지를 옷에 착용하고 책을 읽었습니다. 


보통 이런 식의 행사는 광장 같은, 어떤 고정된 장소에서 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아마 코로나 때문이겠지만 움직이는 지하철 안에서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해 모여있다는 점이 이상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멈춰있는데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움직이지만 누군가는 멈춰있고, 종착지는 있지만 갈 곳은 없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저마다의 상념에 빠졌습니다. 무릎 위에서 펼친 각자의 세계는 얼마나 좁고 글 속으로 뻗어나가는 상상력은 얼마나 또 무한한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지하철과 다를 게 없습니다. 괴상한 시대의 흐름에 모두 휩쓸려가면서도 우리는 그 안에서 중심을 잡고 있기 위해 결국 책 안의 사유와 지식으로 빠져드는 수밖에 없겠지요. 함께 어딘가로 이동하지만 다 분리되어있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고요히 투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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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건네준 책입니다. 트렌스젠더 활동가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보고서 입니다. 뒤쪽에 트랜스젠더 어머니와 활동가가 인터뷰를 나누는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얕고 일방적인 연민이 허용될 수 없는 관계속에서 정확한 이해를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는 어머니의 내적투쟁이 고스란히 담겨있더군요. 특히나 자신의 몸으로 낳은 자식, 신체적인 계승자이자 피보호자가 태어날 때의 성별과 다른 성별을 이야기할 때의 충격은 아마 남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다가오겠지요. 딸이었던 사람이 아들이 될 때의 혼란을 받아들이면서도 당사자가 느끼는 사회적 충격의 방파제가 되려고 애쓰시는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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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는 벤 바레스가 쓴 어느 트랜스젠더 과학자의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생각보다 빵빵 터지는 내용이 많아서 책을 읽는 도중 우울한 기분이 가라앉더군요. 투쟁을 이렇게 유쾌하게, 성공적으로 해내는 사람들의 일화를 읽고 있으면 그래도 기운이 났습니다. 여자로 받아들여지는 삶에서 남자로 받아들여지는 삶을 사는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는 어찌보면 여성인권에 결정적인 증인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책을 다 읽진 못했지만 자신을 남매의 오빠로 여기며 '여동생보다 훨씬 더 괜찮은 강의를 하는 과학자다'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일화가 기억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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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퀴 돌고 서울시청역에 내려서 변희수 하사에 대한 추모를 했습니다. 무지개색 띠를 받고 엉뚱하게도 오방색 한복같다는, 좀 수상쩍은 생각을 혼자 했습니다. 박한희 변호사를 현장에서 보았고 어떤 분들은 오랜만이라며 친분을 나누고 있더군요. 날이 추웠고 청바지만 한장 입은 하체가 좀 시려웠습니다. 저한테 서울시청은 갈 수록 뒤죽박죽 많은 것들이 뒤섞인 공간으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어쩔 때는 환호하고, 어쩔 때는 추모하고. 매번 극을 달리는 감정 속에서 언제나 되어야 이 곳은 일상적인 공간이 될 것이고 우리의 일상은 서로 닮아서 평범하고 소박할 수 있을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는 국물이 땡겨서 근처의 마라탕 집에서 포두부를 잔뜩 넣은 2인분을 먹었습니다. 퀴어퍼레이드랑 다르지 않게, 현장에서 봤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식당으로 들어오는 게 어쩐지 웃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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