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보고 왔습니다

2021.09.28 10:07

Sonny 조회 수: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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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는 모두가 흥미로워할만한 '악의 심연'에 대한 탐구심 같은 게 있습니다. 보이스피싱이라는 소재부터가 일단 어떤 정체도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유령 같은 느낌이니까요. 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목소리에 따라 흘러간 돈은 어떻게 뿌려지고 사라지는가. 그 사라진 돈이 어떻게 누구의 이익이 되는가. 그 유령들은 어떻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가 등등. 그 배경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공적으로 취급되는 국가인 "중국"이 자리잡고 있고 그곳에서 조선족의 억양이 섞인 깡패들은 수하들을 데리고 조직적으로 보이스피싱을 획책, 지시하고 있습니다. 몇십년 전만 해도 삼합회를 비롯한 중국의 갱스터들은 고급스럽고 스타일리쉬했지만 그것도 다 옛말이죠. 빌보드에 침투하여 1위를 일궈낸 케이팝 전사들의 고국인 한국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문화후진국이니 갱스터들 역시 문명화가 덜 된 원시적인 부족처럼 그려집니다. 그런 묘사에서 오는 오지탐험의 쾌감을 무시할 수는 없죠. 요즘 잘 먹힐 형식입니다.


주인공 서준은 부지런한 공사장 반장이지만 그의 아내가 보이스피싱에 당해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다 털리고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합니다. 서준은 복수를 다짐하고 이 보이스피싱 조직, 특히 아내를 우롱하다시피한 "김현수 변호사"를 쫓기로 결심합니다. 이 때 영화는 최첨단 기술과 성실한 수사 대신 자신 또한 범의 아가리에 발을 들이미는 위험천만한 방식을 택합니다. 서준은 보이스피싱 조직에 침투하기 위해 한국사회에 대한 모든 의존수단을 버리고 스스로 고립됩니다. 그는 전직 형사였지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딱 한명 뿐이고 그조차도 실상 연락책에 불과하며 그의 정체가 들통나면 그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습니다. 서준이 보이스피싱 조직에 들어가기까지 영화는 꽤나 위태위태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배우 변요한의 이미지입니다. 그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지금 그못지 않게 핫스타가 된 박정민과 공동주연을 했던 <들개>라는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에서 변요한은 사제폭탄을 생산하지만 그걸 터트릴 용기는 없는, 울분은 가득하되 우유부단한 청년으로 나와 진한 인상을 남겼죠. 어떤 배우에게는 그만의 시그니쳐라고 할 연기의 영역들이 있는데 <보이스>에서도 변요한은 <들개> 때의 그 짠하고 서러운 느낌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동료 깡칠이 김현수 변호사 만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말에 변요한이 분한 서준은 대답합니다. "죽일 거야." 자칫하면 폼재는 말로 떨어지기 쉬운데 변요한 특유의 연기가 이걸 잘 살립니다. 상대를 죽여야 간신히 풀릴 것 같은 그 억울함과 한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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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이 보이스피싱 조직에 들어가면서부터 영화는 슬슬 긴장감이 빠지고 다소 교훈적인 강박에 시달립니다. 보이지 않는 건 신비하지만 정작 그 실체를 발견한 순간 그 미스테리는 다 해소되기 마련이니까요. 미지의 적이 살아있는 사람으로 등장한 다음부터는 인간군상들의 이기주의가 적나라하게 펼쳐질 뿐이고 서준은 관찰자로서 이들을 보기만 할 뿐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못합니다. 이 다음부터는 조직 내의 사람들을 피해 어딘가로 숨거나 정보를 빼돌리는 등의 액션들이 펼쳐지는데 이게 그렇게까지 촘촘해보이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좋았던 건 이 영화가 보이스피싱 조직을 국가적 편견으로만 채우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조직을 폭력적으로 다스리는 것은 조선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조직의 알맹이는 다 한국인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콜센터를 호령하는 곽 프로부터 해서 전화를 돌리는 상담원들까지 이들은 모두 오리지널 한국인들입니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자본을 대고 있는 가장 높은 사람 역시도 한국인입니다. 이들은 한국인으로서 한국말을 하고 한국인들에게 보이스피싱 사기를 칩니다. 조금 더 직관적으로 이걸 대사로 해줬으면 어떘을까 싶기도 합니다. 자본에는 국적없고 한국인이 한국인을 제일 등쳐먹는다는 걸요. (아마 외국에서 한인들에게 시달려보신 분들은 아실 거에요)


영화 속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역설적으로 보이는 존재는 '막내보이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보이스피싱 때문에 1억을 사기당하고 그 돈을 메꾸기 위해서 보이스피싱 조직에 흘러들어온 사람입니다. 심정적으로만 생각하면 저렇게 억울해하는 사람이 어떻게 똑같은 가해를 저지를 수 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돌변하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려는 이 인물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보이스피싱 조직이 단순한 악의와 이기주의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상기시킵니다. 후반부에 가면 이 인물이 보이는 (조금은 뻔한) 드라마는 돈을 둘러싼 일련의 흐름이 단순한 선과 악의 문제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도 합니다. 


특히나 '곽 프로'라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총책임자가 전직 주식전문가였다는 점은 이런 부분을 더 상기시킵니다. 보이스피싱은 아주 음험하고 비인간적인 인간들이 저지르는 그런 짓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죠. 영화는 의도적으로 보이스피싱 조직에 전광판을 설치해놓고 이 일이 대단히 체계적이며 정식 기업의 업무처럼 보이게끔 합니다. 전문가스러운 곽 프로를 통해 이 일이 마치 주식시장에서 이뤄지는 경제활동과 겹치게 하면서요. 얼핏 보면 곽 프로의 쇼맨십 가득한 연설은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의 조던 벨포트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그건 이 영화가 레퍼런스로 써먹었기도 했겠지만 보이스피싱이 사실상 자본주의 안에서 일종의 영업처럼 돌아간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보이스>는 계속해서 자본주의의 구조를 보이스피싱의 원흉으로 건드립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떠들었다면 어차피 교조적으로 흘러갈 영화였으니 보다 선명해졌을 거란 아쉬움도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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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영화가 안전하게 가기 위해 딜레마를 포기해버린 부분이 아깝습니다. 서준이 맨 처음 보이스피싱 조직에 배정될 때, 그는 신입인데도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얼떨결에 보이스피싱에 바로 합류하게 됩니다. 수화기를 떠안고 대본을 건네받은 채 그는 수화기 너머의 사람을 등쳐먹어야 합니다. 그는 이 조직에 막 들어와서 의심받을 행동을 해서는 안되고 주변인들의 환심과 신뢰를 사야합니다. 이 때 영화가 어떤 선택을 할 지 궁금했는데 영화는 슬며시 발을 빼버리더군요. 서준은 전화기 코드를 몰래 빼고 통화가 중지되면서 서준이 참여한 보이스피싱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굉장히 수상쩍은 장면인데도 서준은 별다른 리스크를 지지 않고 계속해서 작전을 수행합니다. 영화는 서준을 보이스피싱에 연루되지 않은 순결한 피해자로 지켜내는데 성공합니다.


서준이 수화기를 들고 보이스피싱을 하기 직전의 장면이 아까운 이유는 언더커버의 단순한 도덕적 딜레마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부분적으로 발을 담그면서 자본주의의 구조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구조의 문제를 환기시킬 결정적 장면같았기 때문이죠. 돈이라는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이든 저지르는 그 심리를 그가 관찰자가 아닌 체험자이자 시험을 받는 자로서 그걸 보다 생생하게 살려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그랬다면 영화는 정말 복잡해질 수 있었을 겁니다. 내러티브는 권선징악으로 간단하지만 관객들은 서준을 자본주의에 유혹당하는 더 입체적인 인물로 볼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영화는 서준을 보이스피싱 콜잡업에서 격리시키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서준은 금새 보이스피싱의 실질적인 행위인 콜작업에서 멀어져 보다 대본 나르기 및 간접적 관리자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저는 서준의 울분이 그 견고한 자본주의 조직안에서 어떻게 무력화되는지, 그걸 또 어떻게 지켜내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가능성이 아깝습니다. 서준 주변의 보이스피싱 팀원들이 인간적인 정도 있고 서준을 챙겨줬으면 어땠을까. 이 사람들이 대단한 악당이 아니라 그냥 자본주의적으로 성실하고 무감각하게 일을 했다면 어땠을까. 곽 프로가 보다 자본주의적으로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그 자본중독자의 정신을 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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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상업영화치고는 꽤나 훌륭한 영화입니다. 서러운 히어로가 무시무시한 악의 소굴에 쳐들어가서 승리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 보이스피싱이란 소재와 변요한이라는 배우는 아주 좋은 재료였고 그걸 꽤 잘 썼다고 생각해요. 다만 후반부에 너무 공익적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은 안할 수가 없습니다. 영화가 속편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끝나는데 보다 첨예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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