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멀어진 사람

2021.09.29 17:16

어디로갈까 조회 수:843

이십대 초반에는 잠 안자고 하룻밤에 영화 세 편을 본 적도 있습니다. 영상을 건너다니며 연애하는 기분이었죠. 그럴 때는 제가 영화제 심사위원이 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주제들이 서로 끌어안고 뒹구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영화가 다루는 소재들에 체하는 느낌이라 한 달에 두어 편이나 간신히 볼까, 영화와 소원해졌습니다. 외국 영화의 경우 비내리는 듯한 자막이 뜨는 것은 특히 보기 싫고요.

독립영화하는 친구가 무슨 이유인지는 말 안하고 3년 간 만든 필름들을 한번에 다 봐달라며 오랜만에 연락해왔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 이제 내게 영화란 눅진해진 알사탕, 초겨울에 내리는 첫눈 입자, 잊혀진 음악의 마지막 한 소절, 인물만 좋은 남자의 프로필, 9월에 누래진 나뭇잎, 김빠진 탄산수.... 같은 거라고. 무엇보다 그렇게 귀중한 것에 대해 견해를 제시할 만한 감성이나 체력이 안 되는 상태라고.

그렇게 서운한 답을 했는데, 그가 흐흐 웃더니 "너도 이제 살아낸 시간만큼 시한폭탄의 문제와 직면하고 있는 거구나. 무명이나 익명으로 살려고 하니 더 힘든 거야. 세상의 유혹에도 한번 넘어가봐."
상투어법에서 벗어난 그런 충고를 받는 기분은 묘합니다. 생활인으로 부패하지 않고 자신의 근원적인 힘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참 강하면서 날렵하기도 해요. 그런데 세상의 숲 한쪽에서 그런 이들을 지켜보는 것도 저는 그다지 싫지 않거든요. 

결정적인 순간에는 제가 그들의 보증인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혼동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결단입니다. 묵묵히 바라보거나 기다리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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