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멀어진 사람

2021.09.29 17:16

어디로갈까 조회 수:790

이십대 초반에는 잠 안자고 하룻밤에 영화 세 편을 본 적도 있습니다. 영상을 건너다니며 연애하는 기분이었죠. 그럴 때는 제가 영화제 심사위원이 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주제들이 서로 끌어안고 뒹구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영화가 다루는 소재들에 체하는 느낌이라 한 달에 두어 편이나 간신히 볼까, 영화와 소원해졌습니다. 외국 영화의 경우 비내리는 듯한 자막이 뜨는 것은 특히 보기 싫고요.

독립영화하는 친구가 무슨 이유인지는 말 안하고 3년 간 만든 필름들을 한번에 다 봐달라며 오랜만에 연락해왔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 이제 내게 영화란 눅진해진 알사탕, 초겨울에 내리는 첫눈 입자, 잊혀진 음악의 마지막 한 소절, 인물만 좋은 남자의 프로필, 9월에 누래진 나뭇잎, 김빠진 탄산수.... 같은 거라고. 무엇보다 그렇게 귀중한 것에 대해 견해를 제시할 만한 감성이나 체력이 안 되는 상태라고.

그렇게 서운한 답을 했는데, 그가 흐흐 웃더니 "너도 이제 살아낸 시간만큼 시한폭탄의 문제와 직면하고 있는 거구나. 무명이나 익명으로 살려고 하니 더 힘든 거야. 세상의 유혹에도 한번 넘어가봐."
상투어법에서 벗어난 그런 충고를 받는 기분은 묘합니다. 생활인으로 부패하지 않고 자신의 근원적인 힘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참 강하면서 날렵하기도 해요. 그런데 세상의 숲 한쪽에서 그런 이들을 지켜보는 것도 저는 그다지 싫지 않거든요. 

결정적인 순간에는 제가 그들의 보증인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혼동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결단입니다. 묵묵히 바라보거나 기다리거나.....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11408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21089
1177 [강력스포일러] '어둠의 미사' 관련 강력 스포일러성 질문 및 잡담글입니다 [6] 로이배티 2021.09.29 547
1176 뜨거운 것이 좋아 (1959) [4] catgotmy 2021.09.29 223
1175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2] 조성용 2021.09.29 500
1174 ' 어둠 속의 미사' 잡담 [6] thoma 2021.09.29 538
1173 화천대유 [6] 異人 2021.09.29 804
» 영화와 멀어진 사람 [17] 어디로갈까 2021.09.29 790
1171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보고(스포약간) [5] 예상수 2021.09.29 675
1170 <러브레터>에 출연했던 전설의 일본 여배우의 전성기 시절의 걸작인 시노다 마사히로의 <말라버린 꽃> 초강추합니다! (오늘 한국영상자료원 마지막 상영) [10] crumley 2021.09.30 583
1169 미접종자 다중이용시설제한, 백신 6개월매다 투여 [4] 현존 2021.09.30 749
1168 내 마음은 매일매일 fuss 2021.09.30 235
1167 오늘도 윤석열(주택청약 통장 해명) [4] 왜냐하면 2021.09.30 593
1166 <넷플릭스 바낭> 어둠 속의 미사 잡담 저도. (스포 있습니다) [6] will 2021.09.30 1414
1165 [넷플릭스바낭] 장안의 화제, 안 보면 간첩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봤습니다 [31] 로이배티 2021.09.30 1207
1164 저주받은 카메라 (1960) [9] catgotmy 2021.09.30 256
1163 넷플릭스) 아무도 살아서 나갈수 없다 [8] Elephant 2021.09.30 574
1162 [강력스포일러] 스포일러 파티 버전 '오징어 게임' 잡담입니다 [45] 로이배티 2021.09.30 1105
1161 축구팬인 제임스 본드 [4] daviddain 2021.09.30 326
1160 [넷플릭스] 오티스의 비밀상담소, 시즌3 (스포일러) [1] S.S.S. 2021.09.30 323
1159 Tommy Kirk 1941-2021 R.I.P. [1] 조성용 2021.10.01 149
1158 디아2 레저렉션하시는 분들 계시죠? [2] 적당히살자 2021.10.01 24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