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전에 다녀왔어요. 총 7편을 봤는데 예전에 봤던 <말라버린 꽃>(1964)이 역시 최고이더라구요. 그래서 시간 관계상 이 영화를 간단히 추천드리기 위해 글을 올리게 됐어요. <말라버린 꽃>은 9월 30일 오후 4시에 마지막으로 상영되는데요. 이 글을 보시고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이 영화를 보러 가셨으면 좋겠네요. 저는 오늘 상영때는 아쉽게도 재관람이 불가능한 상황인데요. 제가 이 영화를 매진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이 영화를 추천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요.(참고로 아직 온라인 예매가 가능해요.)

<말라버린 꽃>은 한마디로 슈퍼 쿨 느와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 영화가 왜 '슈퍼' 쿨인지는 영화를 직접 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어요. 이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를 드리기 전에 먼저 이 영화의 여자 주인공으로 출연한 카가 마리코에 대해 알려드리고 싶네요.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1995)에서 남자 후지이 이츠키의 어머니 역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저는 예전부터 남자 후지이 이츠키의 어머니 역을 맡은 배우가 역할의 비중에 비해서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 배우에 대해 무척 궁금했었죠. 그러다가 얼마 전에 그 배우가 바로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 태엽 오렌지>(1971)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 나카히라 고의 걸작 <월요일의 유카>(1964)에 출연했던 카가 마리코라는 걸 알게 되어서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러브레터>에 대한 해석이 더 풍성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러브레터>가 기억에 관한 영화라면 이와이 슌지가 카가 마리코를 <러브레터>에 출연시킨 게 그녀를 출연시킴으로써 일본 영화사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만약 이와이 슌지가 카가 마리코를 출연시킨 이유가 사실 영화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러브레터>가 더 애틋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죠. 실제로 카가 마리코는 마침 오늘 <말라버린 꽃> 상영 이후 저녁 7시에 상영되는 시노다 마사히로의 <눈물을, 사자의 갈기에>(1962)로 데뷔해서 <말라버린 꽃>을 비롯한 시노다 마사히로의 영화들과 기노시타 게이스케, 오시마 나기사, 스즈키 세이준, 오구리 고헤이의 영화들 등 일본영화사에 남는 명작들에 출연하고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전설의 일본 여배우라고 할 수 있어요. 국내에는 오카다 마리코, 하라 세츠코, 다카미네 히데코 등 다른 고전 일본 영화의 여배우들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카가 마리코의 필모를 보시면 쇼치쿠 누벨바그라는 새로운 일본 영화의 흐름에 일조한 뛰어난 배우임을 아실 수 있어요. <말라버린 꽃>은 바로 카가 마리코의 진면목을 확인하실 수 있는 그녀의 전성기 시절의 걸작이에요. 따라서 <러브 레터>에서 남자 후지이 이츠키의 어머니 역이 인상적이셨다거나 전설의 일본 여배우의 매력을 느껴보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말라버린 꽃>을 꼭 보시기를 바래요. <말라버린 꽃>에서 카가 마리코가 맡은 사에코는 일종의 팜므 파탈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팜므 파탈은 아니에요. 순수하지만 어딘지 모를 비밀을 감추고 있는 카가 마리코만의 매력을 느껴보시기를 바래요. 

<말라버린 꽃>에 대해서 좀 더 얘기를 해볼게요. 위에서의 '슈퍼 쿨'이라는 수식어에서 짐작하실 수 있으실텐데요. 이 영화는 무드가 끝내주는 야쿠자 영화에요. 그런 면에서 무드의 대가인 왕가위가 만들었을 법한 야쿠자 영화라고나 할까요. <말라버린 꽃>에서 남자 주인공인 무라키(이케베 료)와 사에코는 도박장에서 여러번 함께 도박을 하는데요. <화양연화>에서의 차우와 리첸이 도박장에서 여러번 만나서 도박을 했다면 이 영화와 비슷한 그림이 그려질 법하다고 말씀드리면 대충 이 영화가 연상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화양연화>만큼 세련된 영화라는 거죠. <화양연화>에서의 차우와 리첸이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 '연기'를 했다면 <말라버린 꽃>에서의 무라키와 사에코는 '도박'을 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무드' 하면 빠질 수 없는 느와르 중에 장 피에르 멜빌의 걸작인 <사무라이>(1967)가 있는데요. <말라버린 꽃>은 <사무라이>에 비견할 만해요. 실제로 영화의 줄거리도 통하는 면이 있구요. 일본 영화 중에는 스즈키 세이준의 <살인의 낙인>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어요. 무드와의 관련성 안에서 국내 영화 중에는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이나 김수용의 <안개>, 이만희의 <귀로> 같은 영화들이 연상되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떠오르는 건 당연할테구요. 마이클 만의 느와르도 떠오르고 흥미롭게도 저는 에드워드 양의 <타이베이 스토리>와 유사한 지점도 찾을 수 있었어요.

무드가 중요한 느와르라는 말에서 짐작하실 수 있었을텐데요. 이 영화는 사실 별다른 줄거리가 없어요. 심중을 알 수 없는 두 남녀가 함께 도박을 하러 다니다가 막판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정도가 전부이거든요. 우리가 흔히 야쿠자 장르나 느와르에서 기대할 법한 장르적 관습이 <말라버린 꽃>에도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 장르적 관습은 이 영화에서 장르의 표식 정도만 인식할 수 있는 선에서 최소화되어 있어요. 그리고 지워져 있는 나머지 부분이 끝내주는 영화적 무드로 가득 차 있다고 보시면 돼요. 이유도 알 수 없이 무라키와 사에코가 밤 거리를 질주하다가 갑자기 어떤 차와 경주를 벌이고 도박 장면이 몇 분씩 자세히 묘사가 된다거나 조직의 보스가 사온 수박을 조직원들이 나눠먹는다거나 하는 식의 장면들이 나열되죠. 이 영화에서 제대로 된 액션 장면은 딱 하나 정도 나온다고 보시면 되는데요. 시노다 마사히로는 그 액션 장면도 거두절미하게 끝내버려요. 물론 그 장면에서 유일하게 바로크풍의 음악이 흐르며 그 장면은 다른 장면들보다 훨씬 강조가 되어 연출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요. 뛰어난 흑백 촬영,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1985), 나루세 미키오의 <흐트러진 구름>(1967) 등 수많은 걸작들에 참여한 거장 작곡가인 다케미츠 토루의 실험적인 음악, 이케베 료와 카가 마리코를 비롯해서 두 보스로 출연한 미야구치 세이지와 도노 에이지로 등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와 탁월한 리듬감의 편집까지 영화의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말라버린 꽃>만의 매혹적인 무드를 만들어내요. 그 무드는 반드시 극장에서 시네마스코프의 큰 화면으로 느껴보실 필요가 있어요.(그 무드가 강력함은 제가 결국 이런 추천글을 쓰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입증이 되는 것 같네요.)

시노다 마사히로는 <말라버린 꽃>에 대해 "촬영이 끝났을 때, 제 청춘이 끝나버린 것을 깨달았죠."라고 말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 영화를 보시면 아마도 누구나 그 말에 공감을 하게 되실 거에요. 무라키와 사에코가 도대체 어떤 관계였던 건지 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쉽사리 정의가 되지 않는 모호함이 남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모호함은 영화가 끝나고 바로 재관람을 하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며 영화가 끝나면 정말 시노다 감독의 말처럼 뭔가가 끝나버린 것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서 감정의 여진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드실 거에요. 영화팬이 세계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쇼치쿠 누벨바그의 걸작인 <말라버린 꽃>을 보시지 않는다면 아마 평생 후회하실 거에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시기도 쉽지 않은 만큼 이번 기회에 꼭 보시기를 바래요. 그럼 이만 글을 마칠게요. 감사합니다! ^^

P.S: 추가로 이번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전의 상영작들 중에 추천작 말씀드려요. 제가 본 것 중에는 <오린의 발라드>(1977), <암살>(1964), <동반자살>(1969), <침묵>(1971)이 좋았어요. <침묵>의 경우 마틴 스콜세지의 <침묵>(2016)보다 더 훌륭했어요. <침묵>에 연출력이 대가급으로 탁월하다고 느껴지는 시퀀스가 세 개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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