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꼰대

2021.10.02 14:44

Sonny 조회 수:1055

오징어게임이라는 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누가 봐도 이 작품은 데스게임 흥행작품들의 파쿠리니까요. 가장 원조로는 <배틀로얄>이 있을 것이고 <도박묵시록 카이지>도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간츠>, 그 뒤를 이은 <신이 말하는 대로>, <라이어게임>등이 있습니다. 어떤 소재를 쓴 원작이 있다면 비슷한 소재로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거나 최소 몇년의 기간은 지나야 이야기를 새로 할 수 있다는 법칙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오징어게임은 그 소재들을 활용하는 방식이 레퍼런스를 따온 작품들과 너무 흡사해보였어요. 이럴 거면 차리라 원작 하나를 골라서 오는 게 낫지 않나 싶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런 데스게임은 최고봉은 간츠라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감정과 휴머니즘과 제도에 대한 비판 이런 거 좀 짜증납니다ㅋ 비꼬는 말이 아니라 간츠는 정말 명작입니다) 굳이 오징어게임까지 보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기가 너무 많아서... 적잖이 당황중입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서브컬쳐에 해박한 트위터 사람들이나 여기 듀게분들도 좀 그런 반응이시더군요. 그런데 보고 나서는 또 이 작품이 괜찮다는 말은 별로 없습니다. 실망스럽다거나 억지스럽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저는 이게 약간 천만영화 비슷한 유행이라고 생각 중입니다. 그런데 그 규모가 국가적이어도 놀라운데 정말로 세계적이니 (넷플릭스 서비스 국가 83개국중 82개국에서 1위라고 하던가요?) 좀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도... 봐야하나...? 아마 보고 나서도 분명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면 재미없다는 이야기만 할 가능성이 높은데?


어떤 작품을 보고 싶지 않아하는, 정확히는 호기심은 생기는데 보기는 거부하는 이 감정의 근간에는 오타쿠 부심 같은 게 있습니다. 남들이 그 원본을 모르고 아류작에 열광할 때 나만큼은 원본들에 대한 호감과 감상을 지키며 시간과 감동을 굳이 후속작에 나눠주지 않겠다는 꼰대 정신 같은 거죠. 이런 이유로 네이버 웹툰도 끊은지 오래됐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신의 탑 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이 작품은 오리지널리티가 거의 없는 헌터헌터의 아류작인데 웹툰이라는 장르의 한계 때문에 배경은 텅텅 비고 그림은 더 허술해서 도저히 볼 생각이 들질 않더군요. 토가시가 아무리 게으른 인간이어도 연출은 제법 잘하는 작가입니다. 꼭 네이버 웹툰만 그런 건 아니고 일본의 점프 만화들도 얼추 상황은 비슷합니다. 점프의 과거 3대장인 원나블 모두 드래곤볼에서 파생된 만화들이고 그 연출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드래곤볼의 자장 아래에 놓여있습니다. 일곱 개의 죄악이라는 만화를 보면서는 아예 대놓고 드래곤볼을 중세시대의 이미지들에 끼워맞춰서 좀 놀랐습니다. 원펀맨도 주인공이 가메하메하를 못쏘는 것만 빼면 드래곤볼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겠죠. 그 익숙함들이 가끔은 지겨울 때도 있습니다. 주먹질 빡 하면 맞은 상대가 먼지돌풍을 일으키며 산 다 쪼개고 날아가는 그런 연출 말이죠.


예전에 그런 트윗을 본 적이 있습니다. 드래곤볼이 원전이라는데, 그걸 꼭 알아야 하냐는 게 요즘 세대들의 감상법이라는 일본 쪽의 칼럼을 누가 옮겨놓은 글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입니다. 내가 어떤 작품을 최초로 접했고 거기서 오리지널리티를 담은 감동을 느꼈는데 그 오리지널리티가 어디서 왔는지 객관적인 사실을 역사적으로 거슬러올라가야하냐는 거죠. 오타쿠로서의 감동은 작품의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지극히 현재진행형의 시간에 기준을 둔 개인적 감상의 순서로 이루어질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그런 적이 있어요. 베르세르크를 엄청나게 몰입해서 보다가 나중에 데빌맨을 보게 되었는데, 그 때 제가 베르세르크에 느낀 감동이 상당부분 희석되었습니다. 베르세르크는 데빌맨 없이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거의 아들이라고 해야할까요 스토리나 구성이나 만화가 추구하는 감동의 종류가 만화적 유전자로 치면 거의 95%는 일치하는 그런 작품이었으니까요. 그 때 저는 오타쿠적으로 베르세르크의 만화적 아버지를 상봉한 느낌이었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그 베르세르크라는 훌륭한 자식을 낳으신...!!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그런 감상을 하진 않겠죠. 작화라거나 동시대적인 느낌을 담고 있는 현재진행형 작품 앞에서 고전의 가치는 빛이 바래지 않을지언정 재미는 그렇게까지 담보되지 못하죠. 


그러니까 이 자부심이 과연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곰곰히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것은 오히려 동시대의 작품들을 열린 마음으로 즐기지 못하게 하는 저주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하면서, 최초의 낙인을 감상의 측면에서 얻은 자가 평생 지켜나가야 할 약속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거죠. 감상을 작품의 계보, 유전자적으로 보는 것은 변화와 진화를 깨닫는 것보다는 자기만의 완고한 순위에 붙들어매는 것이 아닌가 싶은 반성도 들고.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저는 이런 데스게임을 보면 스토리고 설정이고 그 모든 것을 쳐부수며 이게 정말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그 아리까리한 절망에 젖게 하는 간츠를 계속 회자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 허무를 조금이라도 본받으려고 신님이 유년기의 놀이를 시키는 신이 시키는 대로를 떠올릴 것이고 그 얄팍한 선으로 그려낸 눈두덩이 부어있는 말라깽이가 훗 하고 역전의 방식을 마련하는 라이어게임을 생각할 것이고. 


결국 모든 작품은 돌고 돌게 마련이죠. 저는 나루토를 보면서 드래곤볼을 정말 많이 떠올렸지만 한편으로는 드래곤볼과 무관하게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마 오징어게임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혹은 그 작품에서 다른 데스게임이나 시즌 2에 대한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죠. 혓바닥이 길어졌는데 절대 안본다고 해놓고 오징어게임을 보고 싶어져서 하는 변명이었습니다 네... 참신함이 없다고 거부하기에 세대간의 문화적 단절은 금새 이루어지고 또 그만큼 원전의 의미는 희박해진 채 소재에 대한 스토리적 변용은 짧은 주기로, 거의 연속해서까지 일어난다는 걸 인정해야겠습니다.


@ 그러고보니 이정재씨는 원전을 떠올리게 만드는 <신세계>에도 출연해서 오랜 사랑을 받고 있죠. 작품 복이 많은 배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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