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어요. 만화라는 건 뭐냐는 질문에 만화-이야기라는 건 뻥이라고 대답했죠. 작가나 이야기꾼은 기본적으로 뻥을 치는 거고, 적어도 만화를 읽는 동안만큼은 그 거짓말을 독자에게 믿게 만드는 게 작가로서 성공이라고 말이죠.



 1.개연성 없고 허접한 이야기가 있다고 쳐요. 그것을 소설로 표현한다면 그대로 끝. 어떻게 해도 그걸 살려낼 방도는 없어요.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썩은 고기를 가지고 스테이크를 만들어 내오는 거랑 비슷하죠. 그걸 서빙하느니 차라리 가게문을 닫는 게 낫겠죠.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만화로 표현한다면? 어떻게든 살려낼 여지는 있어요. 정말 말도 안되게 그림을 잘 그리는 그림 작가(작화가)가 붙어서 한컷 한컷...매 장면을 독자가 감탄할 만한 퀄리티로 그려낸다면 말이죠.



 2.그리고 영화라는 플랫폼에서는 썩은 재료를 살려낼 수 있는 또하나의 무기가 있죠. 배우예요. 아무리 앞뒤가 안 맞고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캐릭터나 장면이라도 엄청난 배우가 그 역을 맡으면? 관객들은 대배우가 뿜어내는 아우라, 주름 하나하나까지도 연기를 하는 듯한 페이소스를 마주하게 되거든요. 아무리 말이 안되는 이야기나 캐릭터라도, 자신의 존재감으로 연기를 해낼 수 있는 배우가 그 역을 맡는다면 그 이야기또한 한 차원 달라지는 거예요. 어쩌면 마치 있을 법한, 믿어줄 법한 이야기로 승격되는 거죠.


 물론 그정도의 대배우라면 애초에 그렇게까지 쓰레기같은 영화에 출연하거나 배역을 맡지 않겠지만요. 그래도 영화라는 것은 각본만으로는 설명해낼 수 없는 신비감이나 존재감을, 관객에게 밀어붙일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거예요. 소설가나 만화가와는 달리, 영화 감독에게는 '배우'라는 무기가 있는 거죠.(물론 그런 배우를 캐스팅하는 데 성공해야겠지만)


 좋은 배우를 캐스팅하면 그 배우는 연기력과 아우라만 지닌 게 아니라 캐릭터 연구까지 열심히 해서, 감독이나 각본가가 완성해내지 못한 무언가를 완성시켜서 촬영 현장에 등장하는 법이니까요.



 3.어쨌든 그래요. 만화가들은 조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그림에 엄청난 기백을 담거나 연출을 엄청 멋들어지게 하는 방법으로 독자들을 속이는 데 골몰하죠. 


 이렇게 쓰면 누군가는 이럴거예요. '애초에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를 쓰면 되잖아.'라고요. 하지만 문제는 이거예요. 너무나 앞뒤가 맞는 이야기, 너무나 있을 법한 캐릭터는 재미도 없고 임팩트도 없거든요. 물론 재미와 개연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한쪽을 포기하고 무리수를 둬야만 해요. 


 그렇기 때문에 작가들은 조금 모자란 개연성을 설득력으로 보완하는 거죠. 그런데 작가들에겐 영화감독들처럼 캐스팅이라는 무기가 없기 때문에...작화력이나 연출 등 다른 방식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거예요.



 4.휴.



 5.서론이 길었네요. 샹치를 봤어요. 샹치의 각본은 '임팩트를 위해 개연성을 조금 희생했다'정도가 아니예요. 그냥 나쁘고 게으른 각본이죠. 뭔가 캐릭터들이 앞뒤도 안 맞고 목적성도 잘 이해가 안 가고 그 순간에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도 잘 공감이 안 되는 수준이예요.


 그런데 이게 아이러니인 거죠. 그런 각본일수록 더더욱 대배우가 등판해야 하는 거예요. 왜냐면 썩은 고기를 그나마 먹을 만하게 요리할 수 있는 게 누구겠어요? 그게 황교익은 아니겠죠. 썩은 고기는 백종원이나 이연복에게 맡기거나, 가능하다면 피에르 가니에르, 야닉 알레노에게 맡기는 게 좋은 거예요. 그 썩은 고기를 요리해서 먹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말이죠. 


 그리고 앞뒤가 매우 안 맞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앞뒤가 안 맞고 공감도 안 되는 웬우를 양조위가 맡았어요. 사실 위에 쓴 것처럼, 이렇게 허접한 각본이 뽑히면 양조위를 캐스팅할 수 없었겠지만 이건 마블 영화니까요. 그렇게 제목에 쓴 것처럼 개연성을 깎아먹는 각본 VS 설득력을 끌어올려주는 연기의 대결이 성립...영화를 보는 내내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을 보는 것 같았어요.



 6.결과는 양조위의 판정승이었어요. 영화 전체의 이야기까지 캐리해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웬우 한명만큼은 납득이 가게 표현했죠.


 웬우를 양조위가 아닌 다른 사람이 연기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각본상 이 캐릭터는 천년동안 반지를 안 뺏기고 무패행진을 벌인 정복자치고는 허술한 구석이 너무나 많아요. 이 정도로 허술한 사람이 고대-중세-근대-현대 사회를 거치며 1000년동안 정복 사업을 벌일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게다가 아내를 잃고 나서 아이들에게 하는 언동이나 행보도 뭔가 말이 안 되고요.


 게다가 이 인간은 징기스칸과 나폴레옹, 카이사르, 히틀러, 미국대통령을 합쳐놓은 수준의 권력을 가진 사람일텐데 마지막 대결에서 고작 지프차 여섯 대를 끌고 와요. 아마 다른 배우가 맡았다면 이 부분도 모양 빠졌을걸요.



 7.하지만 양조위는 표정 하나, 눈썹 한 올까지도 웬우를 연기해내는 데 성공했어요. 이건 내 지론이지만 연기라는 건 배우가 대사를 할 때 완성되는 게 아니예요. 배우가 대사를 하지 않을 때에 제대로 해야 완성되는 거죠. 


 위에 썼듯이 관객이 진짜로 그 캐릭터나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건 설득력이거든요. 특히나 스크린에 있는 저 사람이 천년동안 정복 사업을 벌여온 캐릭터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더욱 그래요. 그런 캐릭터는 아무리 각본가가 대사를 잘 써줘도 완성되는 게 아니니까요. 말빨이 아니라 표정, 제스처,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샹치를 보면서 부러웠던 건, 영화 감독(제작사)은 캐스팅이라는 큰 무기를 하나 가지고 있구나...하는 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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