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엘리멘트리 소감

2021.10.09 23:24

노리 조회 수:969

실수로 왓챠 3개월을 결제해 버리는 바람에 요즘은 왓챠에 서식 중입니다. 뭐 볼만할 게 없을까 두리번거리던 중 눈에 들어온 게 엘리멘트리. 7시즌으로 완결난 미드인데 마침 뇌를 비우고 미드를 달리고픈 컨디션이었기 때문에 부담없이(?) 픽. 남자 셜록 여자 왓슨 콤비의 엘리멘트리 소식을 들은 건 오래 전이지만 영드 셜록만큼의 흥미가 당기지 않았던 건 사실입니다. 척 보기에 조합이 뭔가 어색했거든요. 과거 듀게 글을 봐도 부정적인 글이 많더군요. 흔한 로맨스물로 만드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남자 홈즈와 여자 왓슨의 조합과 캐미가 꽤 괜찮더라구요. 로맨스 없어요. 대신에 두 인물의 파트너십을 잘 살려냈고요. 전개는 대체로 단일 에피소드 형식이고 추리물로서는 이쪽이 더 충실합니다. 시즌당 에피가 길다보니 전형적인 수사물 미드가 가지는 단조로움도 있습니다만.  


홈즈는 다들 아시다시피 약쟁이로 나옵니다. 멋있음! 캐릭터 매력 뿜뿜!하기로는 영드의 셜록이 앞서기는 해요. 엘리멘트리의 셜록은 어린아이같은 개성의 추리 기계에 가깝습니다. 더구나 셜록 역을 맡은 조니 리 밀러의 얼굴이 너무 선해서(눈망울이 강아지 같음) 그런 인상이 더해졌는지 모르겠네요. 추리 잘하는 귀여운 너드 느낌입니다. 시즌 초반에는 무슨 문구가 쓰여진 티셔츠를 대충 입기 일쑤고 후반부는 제 기준에 좀 고루한 영국 수트 핏을 보여줍니다. 영드 셜록이 타이 없는 흰 셔츠를 적당히 풀어 헤쳤다면 이쪽은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운 쓰리피스 수트를 갖춰입고선 배를 내밀며 악수를 청하지요. 또, 이건 21세기 미국을 사는 성인 남성의 이야기야 라는 걸 보여주려는 듯 뇌를 위한 휴식이자 운동으로 캐주얼한 섹스를 일삼는 일상도 묘사되고요. 옷도 못입고 멋있음은 덜하지만 이쪽 홈즈는 한결 귀엽고 인간적 성장을 뚜렷이 보여줍니다. 특히 좋았던 설정이 셜록은 '소시오패스임 퉁' 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그이의 비상한 연역적 추리가 타고난 예민한 감각에서 오고, 그로인한 고통이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우려를 많이 산 여자 왓슨은 멋져요. 대체로 매체물에서 왓슨은 홈즈와 대비되어 멍텅구리로 묘사되던데 엘리멘트리의 왓슨은 그렇지 않아서 좋았어요. 사실 제게는 하나 의심이 있습니다. 홈즈는 일반인이 금붕어로 보일 정도의 비상한 연역 추리 능력을 가졌잖아요. 영드 셜록에서도 마이크로프트가 비슷한 발언을 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런 셜록의 능력을 그대로 인정하고 찬탄하는 왓슨의 태도가 왓슨 캐릭터의 미덕인 양 그려지죠. 어릴 때야 그냥 봤는데 언젠가부터 이런 구도와 묘사가 좀 껄쩍지근 하더군요. 마치 귀족과 중산 계급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았거든요. 미쿡판 셜록은 이 부분에서 좀 다릅니다. 앞서 인간적 성장이 뚜렷한 셜록이라고 했던 만큼 이걸 견인하는 게 바로 왓슨이고, 추리 파트에서도 훨씬 능동적이고 능력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나가는 말로 홈즈의 막힌 추리를 뚫어주는 게 아니라 홈즈가 놓친 추리를 하죠. 셜록은 셜록대로 왓슨은 왓슨대로 각자의 솔로 라이프를 보여주는 것도 좋았고요. 


정말 설정이 원작과는 많이 다릅니다. 마이크로프트 역할은 홈즈의 아버지가 가져갔는데(마이크로프트도 나오긴 합니다) 저는 성에 차지 않지만 반지의 제왕 데네소르 역할을 맡은 배우가 잘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모리아티, 아이린 애들러 다 마음에 안들어요. 원작과 달라서가 아니라 나름 비틀고 개성과 반전을 준다고 하긴 했는데 고작 이정도야? 라는 느낌이어서요. 일례로 아이린 애들러는 고혹적이고 섹시한 여성이 무슨 글로벌 룰인듯. 


피날레인 7시즌은 판을 너무 키운 바람에 개연성 부분에서 말이 안되는 게 좀 있지만 영드 셜록보다는 좋습니다(솔직히 시즌4는 너무 했잖음요. 저는 정말 이 시즌이 싫습니다). 전체적으로 수작이다! 너무 재밌다! 는 아니고요. 재미로는 영드쪽이 더 크지만 엘리멘트리는 수수한 재미가 있고, 정말정말 홈즈-왓슨 캐미가 너무 좋아요. 엑스 파일에서 보였던 멀더-스컬리보다도 로맨스적으로는 드라이하면서 가슴 찡한 파트너십을 보여줍니다. 또 루시 리우가 예쁘고 패션을 보는 즐거움이 ㅎㅎ 


글쓰다가 좀 지쳤지만 추가하자면, 

레스트레이드 경감 캐릭터도 낫습니다. 영드 셜록의 경찰서 인물들은 아무래도 홈즈를 돋보이게 하려다보니 대체로 밋밋한데 이쪽 레스트레이드는 훨씬 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셜록과의 공조 수사에서 올법한 상황들을 캐릭터에 굉장히 잘 녹여냈어요. 처음엔 좀 재수없는 인물로 나오는데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잘 구성되었더군요.  이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가 캐릭터 구성에서 제일 어렵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성공! (반대로 오징어게임의 기훈은 이부분에서 실패했다고 봐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를 구축한 게 아니라 미워할 수 없게끔 억지 몰아가기 ㅋ) 레귤러는 아니고 레스트레이드 역할을 하는 캐릭터는 따로 있어요. 에이단 퀸이 연기한 그렉슨 경감인데 이쪽도 좋습니다. '별로인 놈이지만 뛰어난 추리 능력을 우리 사건 해결에 이용하고 너도 나를 이용하는 비즈니스 관계이지!' 로 출발합니다. 물론 홈즈의 성장드라마인 만큼 둘의 관계가 이것에 그치진 않지만요. 


7시즌이나 되고 에피소드 수도 많은 덕에 인물들간의 관계를 좀더 섬세히 그려낼 수 있는 장점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몰입감을 주는 쇼는 아니자만 가볍고 훈훈하게 보기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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