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립 잡담

2023.02.04 20:39

돌도끼 조회 수:241

IBM PC, IBM에서 만든 PC입니다. 회사 이름이 국제 사무 기기. 이름부터 참 재미없는 회사죠. 그런데서 만든 컴퓨터에서 재미같은 걸 찾으려 해야 헛수고일 테고, IBM PC는 동시대의 다른 PC들과 비교해서 제일 재미없는 물건이었습니다. 특히나 사운드쪽으로는 완전 망! 그시기 PC들이 어지간하면 독자적인 발성 시스템을 하나씩은 가지고있었던 것과 달리 IBM PC에 내장된 사운드 기능은 고작 고장났을 때 삑하는 경고음 내라고 달아놓은 내장 스피커가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IBM PC 사용자들은 (성능은 한참 떨어지는) 다른 PC 유저들이 온갖 화려한 게임들을 즐기며 쾌락의 나날을 보내는 걸 몇년동안 그냥 지켜보기만 해야했습니다.(뭐 IBM PC를 PC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긴 했지만... 이름은 PC인데 말입니다.)

그러다가 1987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심심하던 IBM PC의 사운드에 일대 격변이 일어납니다. 사운드 카드의 등장.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MT-32라는 미디 모듈부터 시작해서 본가 IBM에서 내놓은 IBM 뮤직 피처, 크리에이티브사의 CMS, 코복스 스피치 씽... 등등이 87년 한해에 일제히 등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데는 실패했고, 살아남아 PC 사운드의 표준이 된 것은 캐나다의 소규모 벤처기업에서 만든 애드립 뮤직 카드였습니다.

애드립도 뭐 처음부터 잘 팔렸던 건 아니고, 아니 뭐 IBM PC 유저들은 이미 수년간 사운드는 아예 포기하고 살던 사람들이라 저렇게 수많은 사운드 옵션들이 줄줄이 등장했지만 그 어느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MT-32와 IBM 뮤직은 너무 비싸서 논외, CMS는 성능이 딸려 도태, 그나마 성능이 쓸만하고 가격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애드립이 죽지는 않고 몇년쯤 버티고 있다가 90년대가 되어 다른 PC들이 도태되고 IBM PC가 유일한 PC로 남게되었을 무렵에 어영부영 PC 표준 사운드 자리를 꿰차게된 거죠.

글구 뭐... 사실 애드립은 그렇게 싼 물건도 아니었습니다. 애드립사에서 만든 정품은 당시 사람들 감각으로는 꽤 비싼 물건이었어요. 그런데, 이 애드립은 그다지 하이테크한 물건도 아니었더란 겁니다. 사실은 성능의 대부분은 야마하에서 만든 FM칩에 의존하고 있었고, 애드립에서 독점권을 주장할만한 대단한 테크놀로지가 투입된 것도 아니어서 다른 회사들도 같은(혹은 동급의) 칩을 사다 달았더니 완벽 호환 카드가 나온거죠. 이렇게 애드립 호환 카드들이 마구 나오면서 가격이 확 떨어진 거고, 그래서 보급이 되게된 거지, 실제 애드립사에서 만든 원본의 판매율이 그렇게 높았다고 보긴 어려웠어요. 그치만 이건 IBM PC라는 물건 자체가 원래 그랬죠. IBM에서 PC를 디자인하고 표준을 만들었지만 그 IBM PC가 기존에 시장에 나와있던 부품들을 조립해서 만들어진 거라서 호환기종들이 난립했고 사람들이 IBM PC라고 하면 실제로는 '호환기종'이라는 말을 생략한 거지 진짜로 IBM에서 만든 정품을 샀던 건 아니니까요.

그런 애드립 '호환' 카드 중에 제일 대박난 게 사블이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사운드카드를 대중화시킨 건 사블이고, 사블도 애드립과 같은 칩을 달고 나온 호환기종이었기 땜에 사블을 지원하면 애드립도 덩달아 지원하게 되는 거죠. 그 사블을 만든 크리에이티브사는 애드립이 나온 그해에 CMS 카드를 발표했던 회사였습니다. CMS는 나왔던 당시에 이미 구식이던 기술을 채용한 덕에 애드립한테 발리고 조용히 망했습니다. 빡친 크리에이티브는 애드립과 같은 칩을 때려박아 애드립의 성능을 완전히 따라잡고는 거기에 이런저런 다른 기능들을 집어넣은 후속작 사블을 만들었고, 그중에서도 PCM 재생기능이 대박을 쳤습니다. '컴퓨터에서 사람 목소리가 난다!' 이거 하나로 사람들 관심을 확실하게 끌었죠.(원래는 코복스 스피치씽에서 먼저 선보인 재주지만 그때는 시기가 너무 일렀죠...)

그렇게 해서 애드립이 그닥 실속은 없는 업계 표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안 그 실속은 크리에이티브에서 챙겼고 애드립사가 여전히 중소기업 수준에서 못벗어나고 있는 동안 크리에이티브는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공룡으로 성장합니다.

애드립이라고 계속 남좋은 일 시키고 있을 수는 없으니, 사블을 발라버릴 후속작의 기획에 들어갑니다.
모노에서 스테레오로, 8비트였던 사블보다 진보한 16비트 PCM 사운드, 그리고 기타등등으로 무장한, 그이름도 애드립 골드! 하지만 애드립사는 큰 실책을 저지르고 있었는데 이 애드립 골드조차도 그 성능의 상당 부분을 야먀하의 칩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직 완성도 되지 않은 물건에...

야마하 입장에서는 애드립 덕택에 세계인의 IBM PC쪽으로 진출해 짭짤한 매출을 올리고 있었으니 애드립사는 이들에게 은인인 셈이었지만, 자본주의 기업에 은인 따위가 어디있습니까. 당시 야마하의 일등 고객은 크리에이티브였고 애드립의 영향력은 거기 비하면 새발의 피였습니다. 크리에이티브의 사주를 받은 야마하는 고의적으로 애드립을 사보타지했다고 합니다. 그동안에 크리에이티브는 애드립 칩 두개를 때려박아 스테레오를 강제로 구현한 사블 프로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야마하의 신상 스테레오 칩이 완성되었을 때도 그걸 먼저 받아서는 자신들이 개발한 16비트 PCM 기능을 붙여 사블 16을 발표했습니다.

뒤늦게 신상칩을 수령해 부랴부랴 애드립 골드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미 사블이 스테레오, 16비트 사운드 카드라는 타이틀을 선점한 뒤였고, 애드립 골드는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PCM 기능 등의 제품 완성도는 사블 16보다 더 좋았다는듯 합니다만...)
애드립 골드가 사블 16과 같은 칩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블 16용으로 게임을 만들면 애드립 골드에서도 돌아는 갑니다. 실제로 모든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셋업목록에 애드립 골드를 별도로 뽑아놓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사블16용으로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사블 호환품 취급을 받을 뿐이니, 굳이 애드립 골드를 사야겠다는 욕구가 생기지 않겠죠. 애드립과 사블1도 비슷한 관계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는 애드립이 먼저 나왔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원조 타이틀마저 선수를 당했으니...
애드립 골드를 이용해서 음악을 만든 타이틀은 전세계에 단 하나뿐이라는 모양입니다.(크리오의 어드벤처 게임 '듄')

그렇게, 애드립사는 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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