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만스]가 뻔한 스필버그 찬사 영화였다면 어땠을까. 유소년기의 스필버그가 가족을 최초의 관객으로 해서 감독으로서의 영향력을 차근차근 넓혀나가는 그런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 아빠는 일단 부모로서 당연히 감동하고, 둘 모두 혹은 둘 중 하나는 자식의 재능을 확신하며 다정하고 꿋꿋한 멘토로서 스필버그를 지탱해줬을 것이다. 그렇게 스필버그는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며 감독으로 성장했을 것이고 얼떨결에 대박을 낸다거나 혹은 기대치에 못미치는 결과를 내면서 재능을 의심받았을 것이다. 만약 이 영화가 평범한 성장 스토리였다면 영화 속 관객의 반응은 딱 두가지일 것이다. 스필버그에게 감동하거나 심드렁해하거나 (후자의 경우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스필버그의 재능을 홀로 눈치챈 누군가가 등장하고 카메라는 바로 그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줌인했을 것이다)


어떤 영화가 공식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반드시 훌륭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의외의 흐름을 탈 때 비로서 접하게 되는 인간과 인생의 입체적인 면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파벨만스]는 흔한 성장고백 이야기나 자서전 이상의 복잡한 이야기로 엉켜들어간다. 이 영화는 스필버그와 관객의 관계를 사회적 인정의 시키는 주동자와 피주동자의 관계로 놓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상호 영향을 주며 영화를 만든 사람에게, 혹은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 관계로 놓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샘(스필버그)의 영화에 가장 크게 흔들리는 두 사람이 있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샘의 엄마 미치 파벨만이다. 예술가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그는 파벨만이 영화에 심취한 것이 단순한 취미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일찍이 간파하고 그의 영화 제작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그는 샘이 만든 최초의 영화를 제일 먼저 감상한 사람이다. 아마 많은 관객들이 이 불안하지만 사랑스러운 어머니를 어떻게든 아군으로 삼아 예술에는 문외한인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켜나가는 그런 단순한 이야기로 예상했을 것이다. [파벨만스]는 그렇게 쉽게 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영화 공식보다 훨씬 더 복잡하듯이, 스필버그의 인생 또한 훨씬 더 복잡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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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만스]에서 어머니 미치가 샘의 내면에 영화로 얽힌 그 지분은 최대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샘이 영화를 만들도록 격려한 최초의 기획자이자 제작자이면서 관객이었다. 미치는 샘의 영화라는 비밀을 처음으로 공유한 영화적 친구였고 캠핑 촬영 기록물에서 가장 환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 주연 배우이기도 했다. 그는 샘에게 영화를 사랑하는 길을 알려준 사람이다. 부모와 자식으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둘의 관계가 틀어지더라도 이 기억은 샘이 영화를 만들어나갈 근원적인 원동력으로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미치가 '영화적으로' 샘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 바깥에서가 아니라 영화 안에서 샘이 견딜 수 없게끔 만든다.


그 경위는 이렇다. 미치가 자신의 어머니를 잃고 괴로워하자 샘의 아버지 버트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샘에게 영화제작을 의뢰한다. 샘은 찍고 있는 다른 영화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제작을 미루고 미치를 위한 영화를 따로 만들기 시작한다. 가족캠핑을 찍어놓은 기록물에서 그는 편집을 하다가 아버지의 친구인 베니가 미치와 친구 이상의 스킨십을 하는 걸 발견한다. 그것은 단지 아들로서의 경계심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는 놓쳤던 순간들이었다. 부적절해보이는 신체적 접촉의 순간들을 샘은 클로즈업을 해서, 느리게 재생해보면서 확신한다. 베니와 미치는 어느 정도 불륜 상태에 있다고. 이것은 너무나 잔혹한 진실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이 영화는 자신이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아버지 버트가 미치의 남편으로서,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만드는 영화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든 어머니를 위로해주려고 만든 영화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단순한 신체적 어머니가 아니라 영화적으로도 창조주에 가까웠던 그 사람이. 


이것은 어머니의 배신이면서 영화의 배신이기도 하다. 샘에게 영화는 재미있으면서 흥미로운 무엇이었다. 그리고 샘은 늘 영화를 만들고 통제하는 주도자의 입장에 서있었다. 그런데 영화는 그 모든 걸 뒤집어놓았다. 영화는 보기에 늘 즐겁거나 유쾌한 사실만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만드는 사람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가 거대한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영화는 때로 만드는 사람의 인지를 초월하는 다른 무언가를 담고 있다. 그걸 무시할 수 없을 때, 그걸 잘라내는 순간 이 영화가 엄청난 거짓말이 되는 것을 알 때 만드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할까. 가족캠핑 영화는 샘의 모든 걸 뒤흔들어놓는다. 영화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을 포함해 영화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무언가가 늘 될 수 없다는 것, 혹은 영화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배신이 된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그 뒤로 샘은 어머니와 베니 삼촌에게 계속 냉랭하게 군다. 영화가 자신의 가족을 파괴한 사실을 샘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파벨만스]의 기이한 지점은 스필버그의 이 개인사에만 머물러있지 않다. 이 작품은 계속해서 상처를 주고 금새 위로하는 이상한 패턴으로 진행된다. 일반적으로 갈등이 있다면 그 갈등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혹은 어떤 계기들이 중첩되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해소되어야한다. 그런데 [파벨만스]는 상처를 주거나 받았을 때, 그 상처가 지독한 것임에도 의외로 빠른 시간 안에 치유의 과정으로 접어든다. 샘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화를 내던 미치는 샘이 따로 편집한 영상을 보고 오열한다. 이 순간 이상하게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는 뒤집힌다. 분명히 샘이 미치의 '나쁜 짓'을 폭로하는 입장이었는데 그는 누군가의 치부를 드러내는 듯한 사람의 입장에 서있게 된다. 샘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울부짖는 어머니를 끌어안는다. 미안하다고 몇번이나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미치를 샘은 도닥인다. 아들로서, 어머니의 불륜사실을 목격한 유일한 피해자로서 샘은 화를 내고 꾸짖어야하는데 그는 미치에게 미안해한다. 그 순간 둘은 기묘한 비밀의 공유자가 된다. "아버지에겐 말하지 말자"는 그 영화촬영의 비밀은 이제 가족사의 비밀로 바뀌어서 되풀이된다. 


이 순간 영화로 상처를 받았던 샘은 영화를 통해 어머니와 화해한다. 상처를 준 것도, 화해를 시켜준 것도 영화이다. 샘은 어머니에게 가장 큰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장 가혹한 가해자이기도 하다. 샘은 어머니와 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있던 가족이지만 가장 내밀하게 얽히게 된 가족이기도 하다. [파벨만스]는 순식간에 상처를 주는 쪽과 받는 쪽을 전환시키거나 양가적인 면을 드러내며 다음 이야기로 나아간다. 이제 샘은 어머니의 가장 끈끈한 동반자이자 비밀을 아는 유일한 타인이 된다. 영화는 샘에게 진실을 알리면서, 이 진실을 숨기고 어머니를 지키라는 새로운 길을 다시 안내한 셈이다. 이 상처와 위로의 재빠른 전환은 이후 샘의 가족이 이사를 가는 차안에서도 되풀이된다. 아버지 버트는 아무 뜻 없이 꿈 속에서 베니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며 가벼운 농담성 이야기를 던진다. 그 이야기를 들은 미치는 괜한 죄책감에 힘들어하며 차에서 내려서 언덕에 주저앉는다. 미치가 왜 그러는지 아는 샘은 그를 따라가 같이 주저앉아서 미치를 위로한다. 미치는 그 위로를 받다가도 자신은 어머니이고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벌떡 일어난다. 미치는 앉아있던 샘에게 손을 내민다. 마치 자신이 샘을 위로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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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만스]에서 샘 파벨만의 영화를 보고 크게 요동치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그는 샘이 고등학교에 올라갔을 때 그를 유태인이라면서 괴롭힌 그룹의 리더, 로건 홀이다. 그는 채드를 행동대장격으로 내세워 샘을 죽고싶어질만큼 괴롭힌다. 그런데 샘은 학교 졸업여행의 기록물을 촬영하면서 로건을 주인공처럼 찍어놓는다. 그 영상 속에서 로건은 탄탄한 근육과 패기넘치는 청년의 모습을 뽐내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이 뒤따라온다. 샘은 왜 로건을 그렇게 찍었을까. 샘이 채드를 찌질하게 찍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자기를 괴롭혔던 인간이니 그 기록영상에서 우스운 꼴만 찍어서 놀림거리고 만들고 싶었을테니까. 채드는 졸업영화에 나오는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졸업파티를 떠나버린다. 샘은 로건도 우스꽝스럽게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채드는 찌질하게 찍었으면서 로건은 위대한 영웅처럼 찍어놓았는가. 


졸업영화를 보는 로건의 표정도 이상하다. 그의 "상남자" 성격을 생각해면 그는 으스댔어야 마땅하다. 그 영상을 찍은 게 샘 파벨만이든 샘 베이글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아무튼 영상 속에서의 자신은 너무나 멋진데. 그런데 그는 영상 속의 자신을 보고 기뻐하지만은 못한다. 그는 주변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도 못내 반응한다. 그리고 그는 학교 캐비넷에서 쭈그려앉아있는 샘을 찾아내 다그친다. 도대체 자신을 왜 그렇게 찍어놓은 거냐면서. '그렇게라도 찍어서 널 괴롭힌 내가 후회하길 바랬냐?' 당연히 그런 의도도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샘은 넌 진짜 최악의 멍청이라면서 대답한다. 자기도 왜 그렇게 찍었는지 모르겠다고. 영화 속 주인공과, 영화를 찍은 사람 둘 다 왜 영화를 그렇게 찍었는지 모른다. 


영화적 진실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이 졸업영화 상영 장면은 샘이 어머니 미치를 찍은 장면과 연결된다. 두 시퀀스 모두 다 샘이 얽혀있는 현실과 전혀 다른 모습의 인물을 영화를 통해 발견하는 계기들이다. 샘에게 있어 어머니 미치는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였지만 영화 속에서는 친구와 불륜을 피우는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로건은 힘만 믿고 샘을 괴롭히는 악당이었지만 영화 속에는 뛰어난 스포츠맨이 되어있었다. 영화는 때로 어떤 사람의 알 수 없는 부분, 전혀 낯선 현실적 면모를 담아내는 도구이다. 카메라는 때로 찍는 사람의 인식을 초월하면서 더 전체적인 진실까지 담아낸다. 찍는 사람이 아무리 보고 싶어하지 않아도, 어떤 진실은 총체적으로 존재한다. 영화는 그 진실을 찍는 사람과 무관하게 담아내고 마는 매체이다. 심지어 그 진실은 자신이 누구에게도 말 한 적 없고 가장 내밀한 비밀까지도 포함한다. 어머니 미치가 샘과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던 것처럼, 로건 역시 샘과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두 사람 사이가 친해졌다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보는 사람과 영화 사이에 어떤 비밀을 만들어내고 그걸 간직하게 만든다는 마법같은 면이 있다.


동시에 로건과 샘의 시퀀스는 어머니 미치와 샘의 시퀀스보다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진다. 어머니 미치와 로건은 둘 다 영화를 통해 자신의 비밀을 들켰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나 그 비밀을 건드리는 방식은 완전히 상반된다. 미치는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하던 디테일한 부분이 영화에 담겨있었다. 즉, 남편을 두고 남편의 친구와 연애감정을 나눈다는 이 현실은 미치가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경우 카메라는 접혀있던 현실의 작은 귀퉁이를 펴낸 것에 가깝다. 로건의 경우 카메라는 로건의 폭력적이고 비열한 모습들을 완전히 접어놓았다. 다른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모습을 아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열정 가득한 청년인 모습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이 때 카메라는 현실의 커다란 부분을 영화가 접어놓고 다른 부분들만을 보여준다.

   

영화가 들춰내는 진실에 대해 반응하는 어머니 미치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감추고 있는 진실에 반응하는 로건의 흔들리는 모습은 낯설다. 그는 얼마든지 그 영화적 진실 (혹은 거짓말)을 뻔뻔하게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러지 못한다. 그는 샘에게 그 영상을 즐길 수 없던 이유를 슬쩍 흘린다. 자신은 그렇게까지 달리기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고, 정말로 잘 했으면 체육대회에서 우승을 했을 것이며 사람들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하고 등등... 속내를 털어놓는 그의 모습에서 언뜻 강한 자기혐오가 엿보이지만 그 내막을 관객은 다 알 수 없다. 로건은 정말로 절실하게 체육을 통해서 승리자가 되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영상 속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상 속의 이상적인 모습이 현실의 이상을 성취해낸 자신과는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양심의 문제라기보다는 비밀 혹은 진실의 문제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 누구나 가장 간절하거나 취약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고 그걸 꺼내놓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떤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했을 때,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그걸 건드린다. 그 감추고 싶어하는 부분을 기어이 들춰내거나 혹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덮어놓거나. 그렇게 영화는 진실에 와닿는다. 로건에게 지독하게 괴롭힘을 당했으면서도 샘은 로건을 멋지게 찍었다. 그것이 그가 렌즈를 통해 포착해냈던 영화적 진실이다. 그 영화는 로건이 영화 밖의 진실을 토해내게 만든다. 어떤 식으로든 영화적 진실은 현실의 진실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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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건드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진실은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와 화해하는 계기가 된다. 어머니 미치 그리고 로건은 샘의 영화를 보고 모두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샘은 그 두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다. 샘이 영화로 담았던 용서할 수 없는 현실, 혹은 영화로 덮었던 용서할 수 없는 현실은 모두 그 상대방을 영화적 진실로 소환했고 현실의 진실을 끌어냈다. 그렇기에 [파벨만스]는 단순히 스필버그의 영화제작 이력이 아니라 그가 영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던 타인과 세계 그 자체를 가리킨다. 파벨만 가족은 끝내 흩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했고 베니삼촌과도 다시 어울리는 일은 없었다. 샘이 로건의 사과를 받거나 그와 친구가 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샘에게 상처를 줬던 그 현실을 샘은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어머니 미치는 말했었다. 모든 사건은 다 이유가 있다고. 영화는 그 이유를 찾아내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존 포드를 연기했던 데이빗 린치는 그런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작품이 작가를 인도하는 거라고. 샘이 만들었던 저 두 편의 영화는 샘이 무엇을 찍고 싶은 건지 그 영화적 진실에 도달해가는 순서를 보여주는 것처럼도 보인다. 가족과 어머니를 찍고 싶었지만 원치않은 어머니의 진실을 우연히 찍었던 게 그 시작점이라면 이후 샘은 자신의 의도 아래 현실을 덮어두면서까지 찍고 싶은 것을 찍어낼 수 있게 된 게 로건의 졸업영상일 것이다. 샘은 무엇을 찍고 싶을까. 샘이 감독으로서 어떤 상업영화를 찍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족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결과를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존 포드에게 배웠던 영화적 진실의 테크닉을 익살스럽게 곱씹어보면서, 이 영화를 토대로 다시 한번 그의 영화들을 보면 될 것이다. 스필버그는 어떤 영화적 진실들을 알리고 싶어했고 세상과 어떻게 화해하고 싶었는지를 질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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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은 졸업영상을 찍기 전 로건 패거리에게 위협을 당하다가 로건이 바람피우던 걸 폭로한다. 그 직후 로건의 여자친구인 클라우디아는 화를 내면서 떠나고 로건은 샘에게 그게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하라면서 두들겨팬다. 이후 샘은 클라우디아와 모니카에게 찾아가 자기가 거짓말을 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클라우디아와 모니카는 그 거짓말을 받아들이는 것 같으면서도 날카롭게 되묻는다. "그런데 로건이 '빨간머리' 여자애와 키스를 한다는 건 어떻게 말하게 된 거야?" 이 때 샘은 말을 얼버무린다. 이 장면은 샘이 직접 목격한 "빨간머리"의 진실과, "로건이 다른 여자애와 키스를 했다는 건 거짓말이야" 라는 거짓말이 뒤섞여있다. 그 거짓말을 하면서도 샘은 자신이 본 진실을 제대로 숨기지 못하고 들키고 만다. 직접 본 진실과 그 진실을 가리는 거짓말이 뒤엉킨 이 대화가 로건의 졸업영상의 힌트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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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하고 샘은 아버지 버트와 함께 단 둘이 산다. 샘에게 가장 큰 영화적 갈등이자 화해를 이뤄낸 어머니 미치에 대해 [파벨만스]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머니 미치가 베니와 잘 지낸다는 편지를 아버지 버트가 발견했을 때, 영화는 버트를 수상한 각도로 찍어놓았다. 왜 카메라는 이토록 아래에서 위로 아버지를 올려다볼까. 해당 장면에서 샘이 이미 성인이 되었음에도 그는 아버지의 슬픔을 어찌할 수 없다. 샘은 어머니를 안고 다독일 수 있었지만 아버지를 안고 위로해주진 못한다. 그것은 샘 자신이 아직 아버지를 안아주기에 여전히 어리고 철부지라고 인식해서일 수도 있다. (어머니 미치는 샘과 예술적으로 통하는 미성숙한 부분이 있었다) 혹은 어머니 미치가 울면서 '무너졌었기에' 그 낮아진 어머니의 높이만큼 샘이 위에서 끌어안고 도닥일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끝끝내 무너지지 않은 채로, 그저 꼿꼿이 그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갈 정도로 성숙했기에 샘이 위로할 틈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장면은 자신의 영화가 끝내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픈 현실을 화해시킬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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