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 602 - 내게 무해한 사람 중

2019.07.09 09:20

Sonny 조회 수:812

광명의 주공아파트로 이사왔다는 자기소개 도입부에서 전 기시감을 느꼈습니다. 읽어가면서 그 익숙함의 정체를 발견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이 단편을 제가 작년에 봤던 영화 <벌새>와 겹쳐보고 있더군요. 아주 비슷하진 않지만 어린 여자 주인공, 단짝 친구, 폭력적인 오빠, 아들을 우선시하는 엄마, 주공아파트 등 많은 설정들이 오버랩되었습니다. 아마 그 시대의 어린 딸들이 아주 일상적으로 겪어왔던 풍경이어서 그럴 겁니다. 너도 나도 딸이라면 다 보고 자란 살벌하고 태연한 풍경들 말입니다.

읽으면서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주인공 주영은 친구 효진이 자기 친오빠에게 당하는 폭력이 점점 심해진다는 걸 느낍니다. 이러다 혹시라도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진 않을까 저도 모르게 불길한 사건을 그리고 있더군요. 다행히 그런 일은 소설 내에서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배를 무릎으로 계속 걷어차는 효진 오빠의 모습을 보면 더한 폭력을 상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걸 수수방관하는 효진이네 부모님도 긴장을 거듭니다. 

부산에서 올라온 효진이네는 한달에 한번씩 떠들썩하게 제사를 지냅니다. 효진이 오빠가 그렇게 효진이를 때려대는 것도 다 그 가풍과 가부장제 문화에서부터 굴러나왔을 겁니다. 어떤 딸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 왁자지껄한 어른들의 소란과 질서 아래서, 여자는 당연히 아들에게 복종하고 처맞기도 하면서요. 그런 집에서 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행복하기 짝이 없는 것처럼 힘껏 연기를 하며 비밀을 계속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학교 친구들 앞에서 자길 사랑하는 자상한 부모님과 멋있는 오빠 자랑을 하면서 그걸 열심히 믿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에 속을 수 없는 또다른 딸도 있습니다. 주영은 효진이 어떻게 사는지 목격했으니까요. 괜찮은 척 하는 딸과 괜찮지 않은 걸 아는 딸. 그걸 차마 묻지 못하고 짐작하거나 숨기기만 하는 딸들. 

효진이네가 둔탁한 비밀을 가진 가족이라면 주영네는 아릿한 비밀을 가진 가족입니다. 외동딸을 낳은 주영 엄마는 늘 시댁에서 아들 못낳은 엄마라는 눈치를 보며 삽니다. 아들의 존재가 부르는 횡포 옆에는 아들의 부재가 부르는 횡포가 또 있습니다. 주영 엄마는 다른 식구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에 울면서 남편과 통화를 합니다. 아들이 없이는 평화로워도 결국 행복할 수 없는 세계니까요. 주영 본인이 아들의 자리를 빼앗은 자로서 할머니나 주변 친척들에게 모진 농담을 듣는 것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무력한 딸들은 조금 더 자랍니다. 그러나 그만큼 효진오빠도 자랍니다. 여느때처럼 그가 동생 효진을 죽도록 때리고 있을 때 주영은 마침내 폭발합니다. 효진오빠가 아끼는 장난감들을 산산조각내면서 그의 폭력을 중단시킵니다. 너무나 많이 봐왔던 시위와 집회의 장면이었습니다. 힘있는 주체를 어쩌지 못해 그 주체가 속한 세계에서 작은 균열을 내며 "정상적 폭력"을 멈추게 하는 그 장면들이요. 당연하다는 듯 누구도 그 용기와 서러움을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주영은 또다른 서러움을 배웁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효진은 이사를 가고 주영은 일년간 편지로 유지되다 끊긴 관계를 회상합니다. 아, 주영네만큼은 구원받습니다. 결국 주영 엄마가 아들을 낳았으니까요. 그것이 주영이 효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이기도 합니다. 그럼 된 거겠죠. 아들이 있으니까. 


단 하나의 숫자 차이지만 601과 602의 차이는 왜 그렇게 커보이는 걸까요. 그 한명의 차이에도 왜 두 숫자 601과 602는 결국 같은 세계, 그래봐야 나란히 늘어선 닮은 세계처럼 보이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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