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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9월 3일 프랑스 파리의 라호루스 감옥. 밤새도록 뒤척이면서 잠들지 못한 랑발 공작 부인은 불안한 눈빛으로 창살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여기에 투옥된 이래로 그녀는 단 한 시도 불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랑발 공작부인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장이었고 또한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죠. 지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이후로 그녀는 다른 귀족들처럼 불안한 마음에 프랑스를 떠나서 영국에 잠시 머무르기도 했었지만 곧 고국으로 돌아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주군이기도 한 왕비에게 모든 충성을 다하기로 한 참이었습니다.


 이후로 그녀는 베르사이유 궁과 프랑스 내 왕당파 귀족들(일단 본인부터도 대표적인 왕당파 귀족이기도 했고)의 연계, 그리고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한 연락책으로 비밀리에 자신의 사저를 이용하곤 했었는데, 바로 그런 사실이 적발되면서 최근에 국민의회에서 국민공회로 바뀐 혁명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된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에 이른 것이죠.


 투옥 이후로 그녀는 왕비 일가와 강제로 떨어져 홀로 갇혀있었는데, 실은 어제부터 파리 시내의 조짐이 이상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은 이 소란이 정말 심상치 않다고 끊임없이 경고해 오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큰 함성이 들려오고 간간히 이어지는 비명소리...순간 랑발 부인은 아까부터 산발적으로 들려오던 그 거대한 함성이 이제는 자신이 갇혀있는 감옥의 주변에서도 아주 가까이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곧 그 함성은 거친 발자국 소리와 함께 그녀가 갇혀있는 감방의 복도에도 큰 소리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누군가 랑발 부인의 감방 문을 부술듯이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La mort de Madame de Lamballe / Auteur : Léon-Maxime Faivre en 1908.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탕플 감옥에 갇힌 이래로 끊임없는 시련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 루이 16세는 위층의 감방으로 옮겨졌고,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두 사람은 전혀 만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불안함의 와중에 어제부터 심상치 않은 파리의 소요 사태가 그녀의 마음을 더 두렵게 조여오고 있었습니다. 전쟁이라도 났단 말인가? 대체 무슨 일이지?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든 사람들이-족히 수 십명은 되어 보이는 - 마치 구름처럼 왕비가 갇혀있는 탑을 순식간에 둘러쌌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군중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순간 그 부름이 그녀에 대한 끔찍한 욕설과 상스러운 말투로 바뀌는 것도 들었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것은, 그들이 내지르는 그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들이 아니라 그들이 손에 높이 들고 흔들고 있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 ‘무엇’의 실체를 아는 순간, 끔찍한 충격이 왕비를 강타했고 그 충격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그녀는 그만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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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민중이 랑발 부인의 잘린 목을 들고 탕플 탑 주변에서 춤추고 있습니다. 당시 탕플 탑 안에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투옥되어 있었죠.



 지난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 사건 이후로 왕비는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알게 됐는데, 바로 그것은 화난 군중들이 극도로 흥분할 때는 그들이 미워하는 자의 목을 베어 장대 끝에 꽂고 행진하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로서는 한 때 양처럼 순하기만 했던 백성들이 그렇게 사납게 변해버린 것에 그저 기가 막히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었지만 오늘 만큼은 그 ‘충격적인 사실’을 직접 마주하는 순간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왕비의 눈 앞에서 아주 익숙한 얼굴 하나가, 목이 잘린 채 장대에 꿰어져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죠. 바로 그 얼굴의 주인공은 랑발 부인-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헌신적인 신하-의 머리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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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2년 9월 2일부터 6일까지 사흘 간 파리 전역에서 일어났던 이러한 민중의 학살 사건을 ‘9월 학살’이라고 합니다. 이는 바스티유 습격 사건 이후 시작된 대혁명이 이른바 ‘공포정치’의 단계로 넘어가는 이정표가 되는 사건으로, 사흘 동안 파리 민중이 감옥에 갇혀있던 왕당파들을 - 정확히는 외국과 내통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성직자와 귀족들 - 재판없이 직접 처단한 사건이죠. 이 때 살해된 희생자들은 파리 시에서만 무려 1200여명에서 1600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대혁명기에 자행된 여러 끔찍한 사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힐 정도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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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학살 중 성직자 기본법에 서명하지 않은 사제들을 학살하는 장면


(성직자 기본법 - 혁명정부의 인권선언에 따라 종교재판소의 폐지와 이단신문제의 철폐 등 정교분리, 종교의 자유등을 명시한 법입니다. 어느 분 블로그를 보니 이 법을 무슨 국가보안법에 비유해 놨던데, 이런 비열한 역사 왜곡질은 그만 봤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학자들은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이른바 민중의 ‘방어 의지’와 ‘처벌 의지’가 결합되어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이죠. ‘방어 의지’란 만일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국내의 적들이(왕당파들) 외적과 내통할 것을 우려한 것에서 - 미리 내부의 적을 제거해야 한다 - 유비무환의 심리를, 그리고 ‘처벌 의지’란 이렇게 국민을 배신하고 외적과 내통하는 자들을 국민이 직접 심판하려는 의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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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이러한 단선적인 설명은 이 학살이 왜 이렇게 광범위하게 일어났는지, 더구나 평범한 파리 민중이 끔찍한 폭도로 돌변하여 - 낫과 망치 그리고 도끼와 칼을 들고 - 직접 사람들을 죽이면서 손에 피를 묻혔는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현상에는 왕비와 귀족들에 대한 민중의 깊은 증오심이 그 기저에 있는 것이죠. 더구나 민중은 그들을 ‘반역자’로 지칭했는데, 대체 언제부터 프랑스 왕국의 지배계층이 ‘반역자’가 되었던 것일까요? 혁명이 일어나 구체제의 신분 사회를 뒤엎기 시작해서? 하지만 단 며칠 사이에, 그것도 단지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민중이 천 수 백명을 학살한 현상에는 더 깊은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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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Antoinette, 1775 - Musée Antoine Lécuyer, Jean-Baptiste André Gautier-Dagoty (1740-1786)


 바로 그것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루머’ 그리고 그 루머를 바탕으로 한 불법 유인물의 대량 유포에서 비롯된 것이었죠. 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온갖 비방과 중상모략에 시달렸습니다. 물론 궁정이 아니라 파리 시 혹은 프랑스 전체에 뿌려지는 유인물과 불법 출판물에 의한 것이었죠. 도대체가 출처를 알 수 없는 그 유인물들은 왕비의 궁정생활에 대한 소설을 쓰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측근들이 어떻게 나랏돈을 유용하고 국가의 재물을 축내고 있는지 소상하게 서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뿐만이 아니었죠. 이 소설들은 한 발 더 나아가서 - 특히 이 점이 파리 민중을 더 격분하게 했는데 - 왕비가 숱한 귀족들을, 더구나 그 중에는 랑발 부인같은 여성들도 애인으로 삼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 거짓된 이야기였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힌 유인물들이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 유포되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대체 누가 이런 유언비어들을 조직적으로 살포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대체 왜 국왕 루이 16세는 이런 유언비어들을 단속도 못하고 - 심지어 범인을 잡는건 고사하고 - 대관절 그들이 누군지조차 알지도 못했던 것일까요?




Elisabeth Vigée-Lebrun, 1783년, 왕비의 초상화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이 유언비어의 범인들은 귀족들, 특히 베르사이유에서 왕비와 함께 지냈던 수 백명의 귀족들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대체 누가 구중궁궐에 있는 왕비가 어떻게 사는지 안다고 왕비와 친구들인 귀족들의 이름을 소상히 나열하면서 소설을 써 댈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끔찍한 유언비어들이 수 년 동안 엄청난 양으로 프랑스 전역에 뿌려지고 있는데, 어떻게 범인 하나 잡지 못했는가 말이죠. 이런 점만 생각해 봐도 이 찌라시들의 최초 유포지가 어딘지는 금방 알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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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sabeth Vigée-Lebrun, Marie-Antoinette and her Children, 1787


  그럼 여기서 또 다시 드는 의문 하나. 대체 왜 귀족들이 이렇게 왕실에 - 특히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집단적으로 반기를 들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왕비 개인의 문제점, 특히 한 나라의 국모라는 공식적 지위 보다는 개인적인 삶에 더 몰두했던 마리 앙투아네트 특유의 성향에서 빚어진 문제점도 있었죠. 왕비는 프랑스의 오랜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출신이었고 그 때문에 베르사이유 궁정 내에 공공연히 오스트리아에 적대적인 귀족 세력들의 보이지 않은 적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것은 왕비가 자신이 총애하는 일부 귀족들 하고만 궁정생활을 영위했던 것도 큰 이유가 됐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소외된 다른 귀족들은 이런 왕비의 태도에 큰 불만을 품었고, 이는 뜻하지 않게도 귀족들이 왕권을 견제하는 하나의 권력투쟁의 수단으로까지 비화되었던 것입니다. 루이 14세 이래로 강화된 절대왕권에 눌린 귀족들이 집단적으로 반란을 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왕비를 비난하고 그러면서 왕실 자체를 공격하면서 말이죠.







  왕비의 총신 폴리냐크 백작부인의 초상, 비제 르 브룅 작



 정말 기가 막히긴 한 일입니다만, 여튼 현재 추정되는 바로는 이런 끔찍한 유언비어의 최초 유포지는 베르사이유 궁의 귀족들이었고 (루이 15세의 딸들 중 하나인 아델라이드 공주는 왕비의 그 악명높은 별명인 '오스트리아 여인'이라는 고약한 별명을 지어준 장본인이기도 하죠.) 이후 그 유명한 목걸이 사건(1875년)을 - 사기꾼 라모트 백작 부인이 꾸민 사기극에 왕비와 로앙 대주교가 연루됐죠. 자세한 이야기는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소개되기도 했고 - 계기로 유언비어는 종래의 찌라시 수준에서 벗어나 아예 중단편의 소설 형식으로 출간되어 활발하게 유통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때부터는 단지 귀족들만이 아닌 일반인들, 그러니까 전문 작가들이 들러붙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물론 돈을 벌기 위해 이런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대중들이 이런 찌라시들에 엄청나게 열광을 했던 것이었죠. 현재 일부가 국내에 번역 출간되어 있는데, 그 음란함의 수준이 정말 상상을 초월합니다. 당시 프랑스 민중들 중 절반 가까이가 글을 읽을 줄 알았었는데 - 당시는 또 서로 책 읽어주는 것도 유행이기도 했고 - 왕비가 주인공인 이런 음란 소설들 읽으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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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공주(루이 16세의 동생)와 마리 테레즈(마리 앙투아네트의 딸)에게 책을 읽어주는 랑발 공작 부인, 19세기 역사화









Princess of Lamballe 1788 by Anton Hickel at the Liechtenstein Museum, Vienna





 여튼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왕비는 언젠가 관청의 공공시설에 걸린 자신의 공식 초상화를 내릴 수 밖에 없다는 보고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성난 대중이 초상화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라는 기가 막힌 얘기와 함께였죠. 심지어는 파리 시를 관할하는 경비총감으로부터 '왕비 마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파리 시 방문은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니 마침내 대혁명이 시작된 삼부회 소집 때는 정말 이 모든 증오의 절정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거대한 회랑에 모인 세 신분의 대표들 - 귀족, 성직자, 시민계급 - 수 백명이 넘는 그들 중 누구 하나 왕비가 입장했을 때 인사 하는 이, 박수 하나 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이 날의 민망한 상황에 대해서는 당시 삼부회에 참관인으로 참석했었던 미국 대사의 편지에 자세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미국 대사는 너무 당혹스럽던 나머지 결국 옆의 친구들을 간신히 설득하여 왕비에게 박수를 치게 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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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사이유 궁에서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는 고티에 다고티, 1775년, 베르사이유 궁 소장



 언듯 봐서는 모든 게 귀족들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냥 겉으로만 봐서는 말이죠. 그러나 이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백성들은 귀족들이 가졌던 애초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반응했던 것이죠. 그들은 귀족들의 기대대로 왕비와 혹은 그 왕권 자체에 엄청난 증오심을 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전혀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백성들 - 특히 파리의 민중들은 왕비에게만 증오를 품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왕비와 귀족들을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죠.


 생각해 봅시다. 대체 그 유인물에서 왕비와 함께 국고를 낭비하고 또 함께 온갖 음탕하게 즐기는 자들이 누구였던 것인가를. 겉으로만 봤을 때는 마치 왕비 하나에게만 온갖 비판과 증오가 몰리는 것 같았겠지만, 사실 민중들은 몸서리치게 왕비를 미워하는 것 만큼이나 귀족들을 증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순간, 민중의 분노는 참혹한 학살을 불러왔던 것이죠. 생각해 보세요. 죽겠다고 일해서 세금 갖다 바쳤더니 뭔 듣도 보도 못한 귀족들하고 - 특히 폴리냐크 백작 부인 일가(정말 이것들을 제대로 족쳤어야 하는데!) - 내가 뼈빠지게 일해서 번 돈을 저 베르사이궁의 정신나간 아줌마가 드레스 사고 보석 사느라고 다 낭비하고 있구나! 외간 사내들과 바람 피우는데도! 이런 생각들 안하겠냐는 얘깁니다. 그리고 주변의 귀족놈들도 왕비랑 같이 놀면서 국고를 엄청 털고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안하겠느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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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2년, 왕세자 루이 조제프의 주변에 모여있는 왕실 가족들, 작자 미상, 베르사이유 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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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는 루이 16세, Nicolas Andre Monsiau


 근데 사실 프랑스 같은 유럽 최고의 부자 나라에서 왕비가 드레스 막 사 입고 보석 좀 샀다고 해서 국고가 바닥이 난다는 건 정말 말이 안되죠. 실은 기존의 바닥난 국고가 미국 독립전쟁에 쏟아 부은 전비 때문에 정말 재정 위기에 닥치기 시작한 것이고...그런데 정작 이런 사실들은 유언비어에서 제대로 언급되지도 않았습니다. 유언비어는 마치 이 모든 국가적 위기의 재앙이 정말 왕비 한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조작해대기 시작했고 이것은 계속 발전하여 사람 하나를 완전 망가뜨릴만큼 비열하고 저속한 공격으로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도 모르는 새에 이런 유언비어의 유포자들은 그들 스스로도 왕비와 함께 수렁으로 빠지기 시작했던 것이죠. ㅂㅅ같이 자기들만 몰랐을 뿐...







9월 학살의 역사화, 1871년에 제작된 삽화



 사실상 대혁명은 이러한 귀족들의 반란에서부터 시작이 되었고, 귀족들은 이 반란을 통해서 종래의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그들이 중세 시절 이후로 잃어버린 권력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참 순진한 인간들이 아닐 수 없...) 그것도 아니라면 시민계급 세력과 연대해서 바다 건너 영국같은 입헌 군주제를 도모할 수 있거나. 그러나 세상은 이미 변했고 - 영국이 입헌군주제를 이룬 명예혁명은(1688년) 벌써 한 세기 전의 일입니다 - 그들에게 마침내 일어난 혁명은 전혀 다른 낯선 모습으로 닥쳐왔습니다. 그리고 천 수 백명이 죽은 9월 학살은 그 전조에 불과했던 것이죠.




관련 이미지

Henri Emmanuel Philippoteaux, Les députés Girondins à la veille de leur exécution, le 31 octobre 1793 (dépôt du Musée de la Révolution à Vizille).

1793년 10월 31일, 지롱드 당원의 처형 전날 밤에, 앙리 엠마누엘 필리포, 1850년 작, 비질 대혁명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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