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 / 레브레히트 <거장신화>

2014.12.12 09:08

먼산 조회 수:19005

정명훈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들립니다.

평소 클래식에 대해 관심 없고 그 분야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던 사람들도,

정명훈이 서울 시향을 맡고 있는 사실의 정당성/부당성을 주장하는 일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몇 달 전 국내에 번역 소개된 노먼 레브레히트의 <거장신화>의 부록에 실린 (제가 쓴) '한국의 지휘자들'에서 정명훈 부분을 발췌해서 올려봅니다.

 

 

참고로 레브레히트는 이 책에서, 1950년 이후 출생한 지휘자들 중에서 손꼽을 수 있는 다섯 명으로, 사이몬 래틀, 리카르도 샤이, 발레리 게르기에프, 에사페카 살로넨과 함께 정명훈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는, 정명훈과 서울 시향이 도이체그라모폰 음반사와 계약을 맺은 일에 대해, 전세계 어떤 오케스트라도 하지 못하고 있는 유례없는 업적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음악계, 특히 지휘자들에 대한 거침 없는 독설로 유명한 레브레히트로서는, 이례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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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가 소화제 광고까지 출연하면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던 1980년대, 금난새를 뛰어넘는 지명도를 지닌 지휘자가 있었다. 바로 정명훈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동생인 정명훈은 1974년 차이콥스키 피아노 콩쿠르 2위 입상 이후 철의 장벽을 넘어선 천재 음악가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콩쿠르 직후 일시귀국한 정명훈은 카퍼레이드와 국립묘지 참배까지 했고, 이 모습은 TV로 생중계되었다.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진로를 바꾼 정명훈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밑에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내한공연에서 정명훈은 한국 청중들에게 줄리니보다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정명훈이 세계무대에서 지휘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바렌보임의 후임으로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정명훈은 여러 인터뷰에서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였고, 자연스럽게 KBS 교향악단과 여러 차례 공연을 갖게 되었다. KBS 교향악단 측에서는 정명훈을 영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1998년 1월 1일부터 정명훈은 상임지휘자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상임 자리를 함께 맡고 있었던 정명훈은, KBS 교향악단에 상주하면서 오케스트라를 훈련시켜줄 부지휘자 주세페 메가를 임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국방송공사가 이를 거부하면서 정명훈과 KBS 교향악단은 큰 갈등을 겪게 되었고, 결국 정명훈은 취임 뒤 넉 달도 채우지 못하고 4월 23일 KBS 교향악단의 상임 자리를 사임하였다. 정명훈은 이후 한 번도 KBS 교향악단을 지휘하지 않았다.

 

KBS 교향악단과 정명훈의 관계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상임지휘자에게 전권을 주지 않는 관료주의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KBS 교향악단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로 인정받고 있던 서울시향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시향은 1990년 정재동이 퇴임한 이후 박은성, 원경수 등 여러 지휘자가 상임 자리를 맡았지만, 단기간 재임하고 물러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심지어 2003년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곽승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세종문화회관 사장에게 해임되면서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공식적인 해임사유는 180일이라는 근무일수를 채우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사문화된 조항을 무리하게 적용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실제로 곽승 이전과 이후 서울시향의 여러 지휘자들 중에서 180일의 근무일수를 채운 경우는 거의 없다.

 

서울시향의 난맥상은 정명훈의 등장으로 새로운 계기를 맡게 되었다. 서울시향은 2005년 정명훈을 예술고문으로 영입했고, 1년 뒤인 2006년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은 정명훈에게 시향 운영에 대한 전권과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고, 이에 따라 정명훈은 악단 운영과 체제 전반에 걸쳐 대폭적인 개편을 단행할 수 있었다. 수석과 부수석의 외국인 연주자 영입, 상임작곡가 제도의 도입, 정기연주회의 시리즈별 세분화, 현대음악 전문공연, 찾아가는 음악회 등의 다양한 시도가 행해진 것이다.

 

2011년 5년 계약이 끝나고 재계약을 앞두고 있었던 정명훈과 서울시향과의 관계는 서울시의회와의 갈등으로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시의회가 문제 삼은 점은 정명훈의 과다한 급료였지만, 근저에 흐르는 분위기는 정명훈과 이명박 대통령과의 관계였다. 시의회의 지속적인 문제제기 이후 정명훈에 대한 공격이 진보 매체의 지면을 가득 채웠지만, 진중권 같은 진보 논객이 앞장서서 정명훈을 변호하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정명훈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보낸다고 천명하면서 이러한 갈등이 겨우 잦아들었고, 정명훈은 서울시향과 재계약을 할 수 있었다.

 

지자체가 운영하는 예술단체에 대한 감사와 투입된 예산의 적절성을 평가하는 것은 시의회의 기본업무이며 의무이다. 하지만 정명훈 사태 당시 시의회의 문제제기는 전혀 전문적이지 못했다. 예술단체에 투자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가, 그것이 의미가 있다면 가장 적절한 선택지는 무엇인가, 시민들이 예술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같은 건설적인 논의는 전혀 없었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지휘자를 공격하고 그가 받는 연봉의 과다함만을 지적하는 이전투구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정명훈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러한 문제제기는 그의 음악적 성취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의 지휘능력이나 음악적 해석, 레퍼토리 선정 등에 대한 논의는 전무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정명훈은 세계수준의 지휘자가 아니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무차별적으로 오르내렸고, 그가 그만한 돈을 받을만한 지휘자냐는 공격만이 난무했다. 하지만 서울시향이 정명훈의 지휘봉 아래에서 엄청난 발전을 했다는 사실은 음악 관계자들이라면 모두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다.

 

정명훈에 대한 레브레히트의 평가를 인용해보자. 정명훈이 서울시향과 함께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첫 번째로 녹음한 음반에 대해 레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시아에서 처음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에 성공한 오케스트라인 서울시립교향악단은 데뷔음반에서 성공적인 연주를 과시하고 있다... 첫인상으로 판단해 볼 때 서울시립교향악단은 특별한 단점은 없는 듯하다. 현악기는 유연하고 양감이 풍부하며, 관악기는 매우 개성적이며, 금관은 다채롭고 따뜻하다... 서울시향의 음악감독인 정명훈은 프랑스 작품을 잘 알고 있는 지휘자이다. 그는 이미 1990년대 초에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폭풍 같은 마력을 보여 준 바 있다. 그는 프랑스 음악을 설탕을 넣은 듯한 달콤함 없이도 훌륭하게 해석해 낸다. 드뷔시의 야수 같은 자기중심적인 성향은 아름다운 구름 뒤에서 슬며시 명료한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인 목관악기 연주자들은 드뷔시의 피상적인 오리엔탈리즘에 짜릿하고 신랄한 맛을 더해준다.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은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심리마술과도 같은 사실성을 펼쳐 보인다. 마치 요정의 정원 안에 야수가 숨어있으니 가서 상대해보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다. 서울시향을 처음 소개하는 이 음반은 라 발스로 마무리된다. 어스름한 새벽을 지나 모습을 드러내고 점점 더 빨리 휘몰아치다가 모두 폭발해버리는 연주이다.”

 

 

레브레히트의 이러한 평가는 한국에서의 활동에 상당한 시간과 열정을 할애하고 있는 정명훈에 대한 격려의 의미도 담겨있는 것이다. 레브레히트는 이 책에서 현대의 여러 지휘자들이 제트기를 타고 여러 오케스트라를 돌아다니는 오늘날의 모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정명훈의 선배격인 일본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에 대해, 만약 오자와가 보스턴 심포니에 온전히 전념했거나 일본으로 돌아가 활동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업적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면에서 레브레히트는 정명훈 정도의 능력이 있는 지휘자가 서울시향과의 활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간다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모두 뛰어난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셈이다. 이러한 레브레히트의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로 국내 음악계에서 부천 필하모닉이 KBS 교향악단과 서울시향보다 낫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25년 동안 상임 자리를 지켜왔던 지휘자 임헌정 덕분이다. 임헌정은 2014년부터 코리아 심포니로 소속을 옮겼다.

 

정치논리에 따라 지휘자의 입지가 결정되는 일은 우리나라 음악사에서 꽤 빈번히 일어났다. 실제로 90년대 내내 서울시향에서는 지휘자 교체가 반복된 바 있었다. 정명훈과 관련된 논쟁이 벌어지고 있던 2011년, 대구시의회에서도 대구시향의 지휘자 곽승의 연봉을 문제 삼았다. 대구시에 대한 감사 자리에서 한 시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연봉이 1억5천만 원인데, 곽승 지휘자의 연봉이 적정한 것이냐”라고 지적했다. 이 질문에 대해 경력과 연륜에 맞춰 책정한 것이란 답변이 나오자, 이 시의원은 “인천시향의 금난새도 총 2억 원 정도를 받고 있다”면서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계약조건으로 연봉이 체결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적했다. 당시 곽승의 연봉은 2억1천7백만 원이었다. 결국 이 주장은 금난새가 곽승보다 엄청나게 뛰어난 지휘자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금난새가 소화제 광고에 출연할 정도로 대중적인 지명도가 높은 지휘자인 것은 맞다. 하지만 외국에서의 평가를 보면 곽승은 금난새를 훨씬 뛰어넘는다. 곽승은 아바도, 주빈 메타 등을 키운 빈의 명장 한스 스바로프스키의 제자로서, 로버트 쇼와 로린 마젤의 부지휘자로 오랜 기간 일한 뒤 1983년부터 텍사스의 오스틴 심포니 상임지휘자로 14년간 재직하면서 미국 음악계에 높은 지명도를 쌓은 지휘자이다. 현재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젊은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은 곽승의 제자이기도 하다.


 

정치적 입김은 지휘자를 해직시킬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남시향에서 해직된 여러 단원들은 어느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노조 활동 때문에 해고되었다고 주장하면서, 2011년 1월부터 상임으로 일하게 된 *** 지휘자가 부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친분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말한 바가 있었다. 지휘자 임명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 2010년까지 KBS 국악관현악단과 서울시 국악관현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해온 음악가이고, 또 정명훈의 부당성을 강하게 제기한 서울시의원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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