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30 02:57
시 몇 편 읽다가 마음에 드는 게 있어 옮겨봅니다.
유리의 기술
정병근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끊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환히 보이는 저곳에 갈 수 없다니!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물꽃
김영식
냄비 속 물이 끓는다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
흰 챠도르 두른 물의 분자들이 비등점까지 솟구쳐 오른다
물 갈피에 갇혀 있던 막막한 기다림들이 일제히
둥근 수면을 떠밀며 돌기하고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꽃몽오리들
푸르르푸르 새의 부리처럼 지저귄다
어둠 속을 고요하게 흐르기만 하던,
샘에 앉아 기껏 허공의 얼굴이나 비추던 그녀는
얼마나 목이 타는 말을
제 뼈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일까
간절한 것들은 모두 꽃이 된다고 물은 지금
최초의 설렘인 듯 최후의 결심인 듯
전심전력으로 피어나고 있다 몸속에
뿌리, 줄기를 감추고 있는 저 구름가계의 족속들은
더러는 수증기가 되어 천정까지 발돋움 한다
무수한 골짜기와 봉우리가 일어섰단 스러지고
흰 머리칼 쓸어 넘기며
젖은 입술 흔들어대며
가스레인지 위로 화르르 끓는 절정을 토해내는 그녀의,
뜨거운 혓바닥이 밀어 올리는 수천의 아우성들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리는 무뇌아처럼 지금
세상에서 가장 짧은 생을 가진
슬픔이 무럭무럭 피어나고 있다
팝콘
유종인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꽃
꽃은 열매 속에도 있다
단단한 씨앗들
뜨거움울 벗어버리려고
속을 밖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내 마음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
창문 깨고 투신하듯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 때
꽃이다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속을 뒤집었다, 밖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꽃은
견딜 수 없는 구토다
나는 꽃을 집어먹었다
어떤 사람
신동집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나는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겁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 없이 나의 밤을 헤매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나는 알 수가 없다.
다음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 번 나의 눈은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 없이 내가 헤매일 차롄가.
차겁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와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나의 노래
이시영
마음으로 향한 눈을 갖고 싶구나
마음에 대고 듣는 귀,
마음을 열고 고이는 소리를 갖고 싶구나
그러나 마음은 자기에게로 걸어오는 눈을 용서하지 않는다
자기 팔에 돋은 귀를 용서하지 않는다
마음이 마음을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받기 위하여 내 눈은 돌에 가 부딪치고
돌아오기 위하여 내 귀는 거리에 뛰었다
사람들이 내 귀를 밟고 서서 오래오래 태연한 척했다
발바닥 밑에서 소리치는 소리를 밟고 서서
오래오래 모르는 약속들을 했다
돌멩이에 스미는 눈을
스며서 크게 열리는 눈을
파도 위에도 돋는 귀를
돋아서 한번은 크게 응답하는 귀를
한 바다를 건너는 소리를
건넜다 다시 와
마음을 안고 고이는 소리를 갖고 싶구나
2017.05.30 03:09
2017.05.30 09:41
답글 달려 찾아보다
혼자놀기의 진수 같은 시가 있네요.
내가 너를 / 나태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니까 …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그때에도 / 신해욱
나는 오늘도
사람들과 함께 있다.
누군가의 머리는 아주 길고
누군가는 버스를 탄다.
그때에도
이렇게 햇빛이 비치고 있을 테지.
그때에도 나는
당연한 것들이 보고 싶겠지.
2017.05.30 10:43
오오, 시 좋은데요??
저도 혼자놀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시 한 편 보태봅니다. ^^
골목
강연호
아이들은 골목에서 놀았다 그 골목에 나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나하고는 안 놀아서 나는 아이들하고 놀지 않았다
골목은 들이밀기 힘든 열쇠구멍 같았다
혼자서도 잘 놀아요, 구멍 밖으로 세상은 아득했고
몰래 훔쳐보기에는 골목의 외등이 너무 환했다
나는 하릴없이 돌을 던져 등을 깨뜨리곤 했다
고개 숙여 물끄러미 제 발치께나 응시하는
외등의 사색은 깊었다 나는 그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돌연 주먹을 날리거나 머리채를 휘어잡기도 하면서
아이들은 자라서 구멍을 잘도 빠져나갔다
용용 몰랐지? 열쇠를 흔들며 아이들이 떠나간 뒤에도
골목에 아이들은 여전했다 다만 그 아이들이
나하고는 안 놀았던 그 아이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이들하고는 안 놀아서 아이들은 나하고 놀지 않았다
열쇠를 목에 건 아이들이 저마다 혼자 놀고 있었다
이 시를 보니 생각나서 또 한 편~
관계
강연호
나무와 나무의 거리에 대해 생각한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좌우로 앞뒤로 팔 벌려 선
줄과 열의 간격을 생각한다, 삐뚤삐뚤
아무렇게나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서로 닿을 듯 닿지 않을 만큼만 떨어진 거리
나무들은 결국 숲을 이루고
아이들은 용케 율동을 맞춘다
느슨한 듯 팽팽한 듯
그 거리만큼의 관계가 나는 미로처럼 어렵다
모든 미로에는 결국 출구가 있다, 는데
내가 두드리다 지쳐 돌아선
문의 뒤편에서 걸쇠는 거듭 잠긴다
방은 내내 어둡고
기차는 우주 끝까지 기적을 풀고
구름은 뒤척이고 바람벽과 구들장은 떨고
여전히 별 한 점 뜰 때마다 뼈마디가 쑤시고
꽃 한 송이 필 때마다 숨이 가쁘다
언제나 나는 혼자 불꽃이니
혼자 타들어갈밖에
우주비행사가 부러운 이유가 있다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 정도의 거리를 두면
그때 비로소 내가 나에게 느슨해질 것 같다
혹은 팽팽해질 것 같기도 하다
뭇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팔 벌려
결국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힘의 균형으로
느슨한 듯 팽팽한 듯 떠 있다
그런 관계는 어디까지나 천상에 속한 것인가
문풍지에 드는 햇살처럼
그저 조금조금 스미는
어둑어둑 번지는
2017.05.30 20:18
나의 취향이라 좋으네요.
2017.05.30 22:26
강연호 시인의 시가 마음에 드시는 것 같으니 한 편 더 붙여보아요.
건강한 슬픔
강연호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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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그림자
정현종
형체 있는 건 형제 없는 것의 그림자
소리 있는 건 소리 없는 것의 그림자
색 있는 건 색 없는 것의 .......
그렇다면?
보이는 건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
들리는 건 안 들리는 것의 그림자
그리움의 그림자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아 그리움의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