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BBC Sherlock, 7-1, 7-2.

2011.02.26 01:01

lonegunman 조회 수:9714




(스포일러 덕지덕지, 원전과 시리즈, 가리지 않음)



7-1. 전주곡 prelude

왓슨, 내 자존심에 금이 갔어. 대수로울 건 없지만, 내 자존심에 금이 가고 말았어.
이제 이건 나의 개인적인 문제가 되었어.
-셜록 홈즈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어쩌면 모든 것은 2009년 셜록 홈즈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주드 로의 '그' 셜록 홈즈 말입니다. 처음부터 그 영화는 전혀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제 주위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은 당연히 제가 그 영화를 봤을 거라 전제하고 감상을 물어왔고, 제가 그 영화를 보지 않았으며 볼 생각도 없다는 사실을 안 뒤엔 고개를 갸웃거렸지요.

결국 '그' 영화를 보고만 것은 한참 후, 속편 제작이 결정된 이후였죠. 누가 영화 볼만 했다는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은 저였지만, 속편까지 제작할 정도면 그래도 전편이 꽤나 그럴듯 했나보다는, 아주 초보적이고 어리석은 오판을 내리고 만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처음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 홈즈가 아닌 왓슨으로 분한다는 주드 로의 모습이 기대되기도 했었어요. 전통적이진 않지만, 흥미로운 캐스팅임엔 틀림없었으니까.

제 의견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밝히자면 그 영화는 오랜 홈즈의 팬 중 몇몇에게는 그냥 모욕같았을 것입니다. 액션판이라고 트집잡는 게 아닙니다, 그건 홈즈의 신체 능력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죠. 하지만 대체 셜록 홈즈가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반쯤 나사가 풀린 채 잭 스패로우를 흉내내면 엄청 쿨할 거라고 처음 생각한 사람은 누구랍니까? 홈즈의 헐랭함을 한심스러워하며 사사건건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가르치려드는, 심지어 때때로 홈즈보다 관찰과 추리면에서 나은 왓슨이 근사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요? 홈즈의 권투 실력은 백면서생 같았던 그의 이미지에 일대 전환을 가져다 주는, 그의 정체를 더욱 미스테리하고 초인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설정이었습니다. 뭐, 설정을 다 따르라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뒷골목에서 피칠갑이 되어 땀냄새 풍풍 풍기는, 뼈와 살로 이뤄진 물질적 존재로 그의 지위를 끌어내리고 제한하는 게 작품에 무슨 이득이 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비록 원전의 홈즈 역시 '주홍색 연구'에서 개에게 독을 먹이긴 하지만, 병으로 고통받는 생명을 안락사시키는 것임을 공들여 설명하던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에 비한다면 절친인 왓슨의 애완견에게 마구잡이로 동물 실험을 해대는 홈즈의 모습은 그냥 뜨악스럽죠, 심지어 영화에선 그 동물 학대가 꽤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되는 듯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시냅스의 활성 상태가 그대로 선율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던 바이올린 즉흥곡을 연주하며 그게 펜타토닉인지 다이아토닉인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데에선 실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색과 추론을 할 때는 담배를, 일거리가 없어 두뇌의 정지 상태를 견딜 수 없을 때는 7% 코카인을 애용하는 아주 기본적인 설정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영화 안에서 가장 중요한 추리를 마약의 힘을 빌어 하게 만드는 대목에선 그냥 기함했습니다. 아이린 애들러는, 넘어가죠.

이미 한참 지난 영화에 티끌같은 제 혹평 하나 보태는 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하기에 단지 홀로 몸서리치기만 하다가, 보시다시피 이렇게 묵혀두었던 원한을 토해내고 있는 것은 2010년 셜록 때문입니다. 네,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마틴 프리먼의 '그' 셜록 말입니다.

어쩌면 저같은 시청자를 만족시키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냥 원전의 등장인물들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감정선을 따라, 비슷한 대사를 대충 읊어주기만 해도 꺅 소리 나거든요. 참으로 낭비스런 일이라고도 생각되지만, 당장 손 닿는 데 있는 책장을 펼치기만 해도 원본 그대로를 읽을 수 있는데도 그거 말고, 원전이 아닌 다른 데서 그 비슷한 뭐만 던져줘도 바로 불가항력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 얼마나 쉽습니까. 사정이 그러한데도, BBC 셜록의 제작자들이 밝히듯, 무수한 모조품과 유사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제작된 '셜록 홈즈의 모험'이 여전히 최고의 셜록 홈즈 영상물로 공인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아무튼 대략 7~8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홈지언, 혹은 셜로키언들의 팬심을 제대로 자극할만한 작품은 나오지 못했고, 그러자 마치 최고의 팬이 최고의 연구가가 되었던 윌리엄 베어링굴드의 경우처럼 최고의 덕후들이 의기투합해 현대판 셜록을 찍기로 한 겁니다.

개인적으로 재밌는 건, 가이리치의 셜록 홈즈에서 절 낚은 게 주드 로였듯, 이번에도 절 낚은 건 셜록이 아닌 존 역의 마틴 프리먼이었다는 겁니다. 솔직히 베네딕트가 어톤먼트의 그 변태랑 같은 배우인 줄도 몰랐어요,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하지만 마틴 프리먼이 누굽니까, 히치하이커에서 지구인과 우주인을 통틀어 최고의 수건빨을 보여주었던 전우주적 귀염둥이가 아닙니까. 그가 왓슨 박사를 연기한다고요? 홈즈의 칭찬 한 마디에 껌뻑 죽고, 여인만 등장했다 하면 정신 못차리고 찬사를 줄줄 흘리고, 홈즈의 냉담한 한 마디에 또 금새 의기소침하고, 똑같은 수법에 몇 번이고 속아넘어가고, 똑같은 재주에 몇 번이고 감탄하고, 홈즈가 사건 해결을 같이 하자고 제안할 때마다 어차피 할 거면서 어김없이 '내가 도움이 된다면' '내가 도움이 되겠어?' '내가 필요해?" 하고 단서를 붙이는, 왓슨을 말이죠. 대체 브라운관 안에서 또 얼마나 깜찍하려고?

사실 동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리뷰를 쓰고 있는 저도, 이걸 읽고 계신 여러분도 결국 낚여서 시리즈를 보고야 말았다는 것만이 중요한 사실인 거죠.

모팻과 마크 개티스가 여러번 밝히듯 '누구 다른 사람이 시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저지르자는 마음에서 현대판 셜록은 출발합니다. 또 한 편으로는 미국판 홈즈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작되었다는 것 역시 공공연히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반발심을 이용하여 최선의 진술을 이끌어내는 원전 속 주인공의 수법을 떠올린다면, 제작자들의 이러한 동기 자체가 다분히 셜록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원전에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잘못된 의학적, 과학적 사실이 난무하고, -두 사람이 사건을 해결하는 동안 약간의 지연만이 있을 뿐 거의 현재진행형으로 왓슨의 글이 발표되기 때문에- 의도성 짙은 사실 관계의 왜곡도 산재하며, -작성자(당연히 왓슨)가 아무리 객관적이고 진실해도 그의 주관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등장인물들의 성격도 시기에 따라 큰 편차를 띠고 기술됩니다. 셜록 홈즈의 이야기를 현대 문명의 한 가운데에 던져놓는 데에는 이러한 구멍들이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냉철하고, 정확하며, 초인적인 지적 능력과 관찰, 추리 능력을 지닌 주인공에게 그나마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용인되었던 오점들이 더이상은 허용되지 않을테니까요.

그리하여 그들(모팻과 개티스로 대두되는 제작진)은 시리즈에서 엄밀하고 특수한 지식이 요구되는 추론의 큰 줄기들을 삭제합니다. (물론 단순히 아직 다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그 대신 원전 속 많은 작품의 도입부에서 홈즈가 유희처럼 즐기던 '관찰된 사실을 통한 추론'을 전면으로 내세웁니다. 여기에 대해선 차후에 더 자세하게 리뷰하겠지만, 아무튼 이러한 전환은 시리즈의 주된 동력이 됩니다. 이러한 방향 전환, 혹은 방향의 고정은 자칫 홈지언들을 반발케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것은 원전과는 다르니까요. 팬심의 어그로를 끌면 안 됩니다. 당장에 스크롤을 올려 대여섯 문단 위로만 올라가 봐도 쉽게 알 수 있죠. 얼마나 비뚤어진 분노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그렇다면 제작진은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증명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찍고 있는 이야기가 너희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라는 사실을, 누구들처럼 이름과 명성만 가져다가 딴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사건 해결의 방법론을 원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고, 그것이 흘러가는 배경을 원전과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입니다. 작은 소품들, 등장 인물의 사소한 몸짓과 표정들, 지명과 상호명 등등. 에피소드 안에서 끊임없이, 시쳇말로 깨알같이 등장하는 이러한 대체물들을 통해 시청자는 원전을 지속적으로 상기하게 됩니다. 더불어 시리즈는 다른 설명없이 단지 하나의 몸짓, 하나의 소품을 화면 속에 끌어다 놓는 것만으로 화면 뒤에 존재하는 거대한 원전의 실체에 기대어 가는 거죠. 현대화될 수 없는 것은 버리고, 현대화시킬 수 있는 건 모조리 끌어다 대체시킨다는 시리즈의 기본 원리는 결과적으로 효율적이었으며 또한 효과적이었다고 평하고 싶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차차 하게 될 것입니다.

21세기 초반의 어느날, 밴드 알이엠의 프론트맨 마이클 스타이프의 팬이었던 저는 스매싱펌킨스의 프론트맨 빌리 코건의 팬이었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머리 벗겨지기 전의 곱슬머리 마이클 스타이프는 '마이클' 같은데, 대머리 마이클 스타이프는 '스타이프'같아. 어때? 곱슬머리는 빌리 같고, 대머리는 코건같지 않니?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곱슬머리는 빌리같고, 대머리는 코건인 척하는 빌리같아. 상관없는 얘기입니다. 이어지는 리뷰에서 원전의 주인공과 BBC판의 주인공을 구분하기 위해 각각을 홈즈/셜록, 왓슨/존으로 고정시켜 부르겠습니다. 실제 작품 속 호칭이 그렇기도 하고요.

애초에 이 리뷰를 쓰려고 마음 먹었을 때의 의도는 시리즈를 보면서 원전의 장면과 대사들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출처를 알만한 게 반, 잊어버린 게 반이라 머리가 근질근질거릴 때마다 원전을 들추고 덮기를 반복하다가 귀찮은데 한 번 정리해두자는 거였습니다. 그냥 각 장 마다 두 세 문단 정도로 정리된 원전 대조를 통해 한 편의 리뷰를 올리려는 것이었죠. 마침 듀게에 셜록 리뷰도 없고 해서. 그런데 보세요, 단지 prelude 한 장을 끝마쳤을 뿐인데, 이 너저분한 분량을 말입니다!

아무튼 쓰기 시작했으니 어디선가 끝이야 나겠지요. 이건 이제 제 개인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리뷰를 다 올린 후 제 아이디는 도배 금지 조항에 저촉되어 쥐도새도 모르게 삭제되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그 사실을 눈치채시더라도 악당들이 알지 못하게 마음 속으로만 애도해주시기를…












7-2. 독주곡 solo

홈즈가 들어오는 소리에 나는 반쯤 잠이 깼다
아, 홈즈, 뭐 좀 알아냈어?
이봐, 왓슨, 자네 미치광이에 치매 환자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바보 천치와 한 방에서 자는 게 무섭지 않겠어?
아니, 전혀
아, 그것 참 다행이군. 그렇게 말한 뒤 홈즈는 더이상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셜록 홈즈와 존 왓슨의 대화 (공포의 계곡)

왓슨, 자네는 지금 유럽 최고의 바보 면전에 서 있어.
난 정말이지 여기서 채링크로스까지 날아갈 만큼 걷어차여도 싸.
-셜록 홈즈 (입술이 뒤틀린 남자)




우리가 지극히 잘 알고 있는 셜록 홈즈의 모습은 사실 왓슨이 기술한 원전의 모습과는 조금 다릅니다. 원전 속의 홈즈는 '신장은 6피트가 조금 넘었는데 너무 말랐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커보였다. 눈은 사람을 꿰뚫듯이 날카로웠다. 갸름한 매부리코 때문에 기민하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매우 강하게 풍겼다. 야무지게 각진 턱도 결단력이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주홍색 연구)'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러한 묘사만으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그는 아마 꼬장꼬장하고 병적이고 음울한, 스크루지 영감의 키크고 젊은 버전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코난 도일의 존 테니얼이었던 시드니 패짓이 그려놓은 홈즈는, 마치 테니얼의 앨리스가 실제 앨리스의 모습과 다른 것처럼 왓슨의 묘사와 정확히 일치하진 않습니다. 네, 한 마디로 미화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고 홀쭉하다기보단 늘씬하고 훤칠한 몸에 날카롭게 찢어졌다기보단 균형있게 자리잡은 눈을 한, 꽤나 핸썸한 모습의 청년이 된 거죠. 그나마 활자로 적힌 이미지와 동일한 건 좌우로 깊이 파고들어 넓게 빛나는 이마와 선이 가는 매부리코 정도입니다.

네, 매부리코 말입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역대 셜록 홈즈를 연기한 배우 중 가장 짧은 코를 가진 배우일 것입니다. 매부리코까지는 아니라해도, 아무튼 코끝이 땅쪽을 향해 아주 약간이라도 휘지 않은 셜록 홈즈는 제가 알고 있는 한에선 없는데, 컴버배치의 코는 심지어 약간 들려 보이기까지 합니다! 짧은 들창코라니 사실 이건 엄청난 배신인데, 그런 그가 현재 홈지언들에게 이토록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일견 놀랍습니다. 당장 고개를 들어 제 책장 한 켠에서 비틀즈 크로니클과 함께 미모를 담당하고 있는 주석달린 셜록 홈즈의 책 등쪽을 볼까요. 거기엔 세 가지 특징을 가진 한 남자의 검은 실루엣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세  가지 특징은 물론 사냥모자와 굽은 담배 파이프, 그리고 휘어진 매부리코입니다. 패짓의 그림과 왓슨의 묘사가 절충한 결과로 이 세 가지 특징은 셜록 홈즈의 필요충분 조건이 되어왔습니다. 홈즈라면 그러하고, 그러하지 않으면 홈즈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만, 시리즈의 기본 원리-안 되는 건 과감히 버리고, 끌어다 쓸 수 있는 건 다 끌어다 쓴다는-가 순작용한 결과, 아주 중요한 부분이 다른데도 다른 모든 게 너무 그럴듯하다보니 좀 그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겁니다. 코 좀 짧고 모자 좀 안 쓰고 니코틴 패치 좀 붙이면 어떻습니까. 왓슨이 기술한대로 창백하게 빛나는 피부, 돌출된 눈썹뼈와 상대적으로 푹 꺼진듯한 눈, 이마가 넓은 긴 얼굴, 약간 병적인 생김새, 사건 앞에서 춤추듯 생기를 띠는 눈빛, 패짓의 그림대로 늘씬하고 훤칠한 몸매에 단정하고 핸썸한 인상까지- 모든 게 너무 그럴듯한 패키지로 존재하고 있는데요. 단 한 명의 배우, 단 한 번의 오디션, 단 한 차례의 대본 리딩만으로 단번에 캐스팅되었다는 뒷얘기까지 듣고 보면 짧은 들창코 셜록에게 일말의 반발조차 일지 않는 이 집단 환각 현상도 무리는 아니란 생각이 들긴 합니다. 그러고 보니 매부리코는 분장,변장,은폐,엄폐를 생활화하는 탐정에겐 너무 눈에 띄는 특징이었습니다. 분장할 때마다 가짜 코를 붙여야 한다면 그것도 참 구차스럽죠. 솔직히 패짓의 그림 속 변장한 홈즈의 정체를 코만 보고 간파해내는 게 저 뿐만은 아니잖아요? 그런 코는 버리는 게 낫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코난 도일은 왜 그랬답니까?

연기도 물론 한 몫을 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셜록같은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훈련된 배우에게 있어서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가이드 라인 확실하지, 성격 심플하지, 현실감 제로여도 오케이지. 그러므로 연기의 작은 디테일들에 지나친 찬사를 늘어놓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다만, 위에서 밝힌 정확하게 캐스팅된 '그럴듯한 패키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에 열중하거나, 살인사건을 앞에 두고 신이 나서 펄펄 뛰거나, 소파에 파묻혀 손 끝을 맞대고 사색에 잠기거나, 악동처럼 두 눈을 반짝이거나, 개구쟁이같은 눈빛으로 왓슨을 바라보거나(간지럽겠지만 원전에 명백히 등재된 표현입니다)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셜록의 이 오래된 습관들을 묘사한 활자 그 자체가 화면 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구경하는 듯 재미있는 경험이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일견 도킨스가 '중국 배와 중국 귓속말 놀이'라는 에세이에 실었던 한 일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자신의 강의를 듣던 한 여학생의 독특한 몸짓을 재미삼아 흉내내던 도킨스를 보고, 동료가 그건 비트겐슈타인의 버릇이라며 그 여학생의 이름을 단 번에 맞추더라는 거죠. 알고보니 그 몸짓은 비트겐슈타인에서 비트겐슈타인 추종자였던 그녀의 부모에게로, 그녀의 부모에게서 도킨스의 제자인 그녀 본인에게로 전해졌던 겁니다. BBC 시리즈의 영상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홈즈의 몸짓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해서 나열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입니다. [희고 긴, 예민해 보이는 손가락 (네 개의 서명) 관찰한 내용을 하나하나 소리내 말했는데, 그것은 내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는 듯 (네 개의 서명) 짖궂은 장난을 즐기는 개구쟁이 같은 (마자랭 보석) 학식 깊은 전문가라서 불려왔는데 고작 홍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언짢은 기색 (기어다니는 남자) 무기력증에 푹 빠져서, 바이올린과 책을 벗삼아 빈둥거리며(머스그레이브씨네 의식문) 기분이 언짢을 때면 방아쇠가 민감한 권총과 100발의 복서 탄약통을 갖고 안락의자에 앉아 맞은편 벽에 총알 곰보 자국을 내서(머스그레이브씨네 의식문) 자신이 일하는 모습에 대해 칭찬을 들으면 아름다움을 칭찬받은 여자처럼 다정해졌다 (주홍색 연구) 내가 찬탄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 (주홍색 연구)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내 표정을 보고 대답했다 (마지막 문제) 홈즈의 얼굴은 포화 상태의 용액에서 결정이 형성되는 것을 지켜보는 화학자처럼 조용하고 침착한 흥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공포의 계곡) 사건이 그를 부르자 셜록 홈즈의 눈은 광채를 띠었고, 창백한 뺨은 달아올랐으며, 열망에 들떠있는 얼굴은 온통 내면의 빛으로 반짝거렸다 (공포의 계곡) 의자에 몸을 기대고 양 손가락 끝을 붙이면서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바스커빌가의 개) 고양이처럼 청결함을 고집하는 성격답게 턱은 부드럽게 면도되어 (바스커빌가의 개) 홈즈가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독신 귀족) 홈즈는 두 손을 비비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공포의 계곡)] 이처럼 세대를 거스르고, 시대를 견뎌 살아남은 순수한 혈통의 밈meme. 그렇게 컴버배치는 무혈 입성, 현대의 셜록으로 안착했습니다. 어쨌거나 그의 씬들은 순간순간 아름답고, 저의 아이팟 잠금화면에는 그간 제가 접한 무수한 작품들의 명장면들을 제치고 몇 달 째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셜록의 모습이 당당히 등재되어 있습니다.

현대의 셜록과 과거의 홈즈를 구분짓는 가장 큰 특징은 그가 얼마나 젋어졌는가 하는 부분일 겁니다. 나이대는 비슷하거나 동일하게 설정되었지만, 빅토리아 시대가 그 나이의 젊은 신사에게 요구하는 것과 현대 사회가 그 나이의 청년에게 요구하는 것은 천양지차일테니까요. 셜록은 과거의 홈즈만큼 여전히 뛰어나고, 냉철하고, 냉정하고, 정확하고, 즉흥적이고, 극적이며, 예민하고, 수다스럽고, 천재적인 밉상이지만 그는 과거의 홈즈보다 조금 더 철없고, 다소 감정적이며, 약간은 허세스런 청년입니다. 우선 셜록은 돈벌이의 구차함과 연관되는 것을 질색하는 듯 보입니다. 홈즈 역시 흥미로운 사건은 사건 자체가 보수라는 말을 굳이 출처를 찾을 필요도 없을만큼 자주 하지만, 그러면서도 '제가 하는 일은 그 자체가 보답입니다. 그러나 제가 쓰게 될 얼마간의 비용을 지불하실 수 있다면, 형편이 닿는 대로 주시면 됩니다(얼룩띠)'는 식으로 정당한 보수를 지급받는 일을 꺼려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셜록은 인센티브는 사양한다느니 갖은 허세를 다 부립니다. 하숙비가 모자라 플랫메이트를 구하는 처지와는 어울리지 않죠. 아마도 돈 많은 형이 지나치게 오냐오냐 하며 은근히 지원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성가신 변장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전에서처럼 '새로 어떤 배역을 맡느냐에 따라 표정과 태도, 영혼 자체까지 탈바꿈하는 듯(보헤미아 왕실 스캔들)' 변신할 수 있습니다. '블라인드 뱅커' 에피소드에서 범죄 현장 윗집에 이사 온 윈틀양을 속이기 위해 평소에 전혀 쓰지 않던 안면 근육을 사용하여 변신한 자아의 표정을 지어보이는 씬은 많은 시청자를 즐겁게 한 줄로 압니다. 여전히 태양계 구조에 대해 무지합니다. 원전에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든 달 주위를 돌고 있든 (주홍색 연구)' 상관없던 데에 한술 더 떠 이제 테디베어처럼 정원을 빙빙 돌고 있어도 상관없다는군요. 암만 그래도 사태가 정말 그러하다면 상관없을 리 없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신성한 하숙집 벽에다 대고 사격 연습을 하지만 애국심은 퇴화되었는지 '애국적인 V.R자를 (머스그레이브씨네 의식문)' 새기는 대신 스마일 마크를 명중시키는 쪽을 택합니다. 얘는 마약같은 거 안 한다고 펄펄 뛰던 존에게 나서지 말라고 속삭이던 셜록의 뉘앙스를 봐선 뭔가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대놓고 코카인을 주사하거나 화재에 버금가는 담배 연기로 친구를 아연실색케 하는 일은 그만 뒀습니다. 하지만 유명한 three patch problem scene에서 니코틴 패치 세 개를 붙인 팔뚝을 존에게 내보이는 장면은 '셔츠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려 / 힘줄이 불거진 팔뚝과 손목에 / 날카로운 바늘을 찌르고  / 만족스럽다는 듯 훅 하고 한숨을 내쉬며 /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는 '네 개의 서명' 도입부의 코카인씬을 아주 강하게 암시합니다. 그의 여성관에는 진전이 있을까요? 연애를 안 한다는 사실 외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범죄 현장의 집구조를 알아내기 위해 하녀를 홀려 거짓 약혼까지 해놓고 너무 심한 거 아니냐는 왓슨에게 '어쩔 수 없었어. 저녁마다 산책을 하며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맙소사, 대화라니! 하지만 원하는 걸 얻었으니 됐어. (찰스 오거스터스 밀버튼)'라던 홈즈에 비하자면, 시체를 보기 위해 몰리의 헤어스타일을 칭찬하는 정도는 그냥 애교죠. '스터디 인 핑크'에서 몰리의 데이트 신청을 커피 심부름으로 전락시켜버린 것도, 생각해보니 몰랐던 게 아니라 그냥 상대하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싸이코패스는 아니고 소시오패스라지만, 타인을 험담할 때에도 '영광스럽게도 내 머리가 자기 머리 수준이라고 추켜주다니 원 훌륭한 분(독신 귀족)'이라며 품위를 잃지 않고 냉소적인 반어법을 구사하던 것에 비하면 대놓고 깔아뭉개는 경향이 한층 심해진 것 같습니다. (대체 내가 아닌 기분은 어때요, 다들? - 스터디 인 핑크) 여전히 바이올린을 켭니다. 마이크로프트와 한바탕 신경전을 벌이고 짧게 들려준 선율을 감안했을 때 '그때그때 그의 기분이 소리가 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주홍색 연구)'인 듯 싶습니다. 출처를 따로 적지 않아도 될만큼 자주 읊던 신조들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눈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지겹게 반복하던 대사들을 과연 셜록도 귀에 딱지가 앉을만큼 반복해댈까요? 아무튼 대강 뽑자면 이렇습니다. 증거가 충분하지 않을 땐? 가설을 세우면 안 됩니다. 불가능한 것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남은 건? 무언지 말 안해도 아실 겁니다. 복잡하게 보이는 기이한 사건이 평범한 사건보다 훨씬 단순한 이유도 말입니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그의 첫 번째 실내 가운이 전통의 푸른색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디테일을 챙기려면 이 정도는 돼야죠. 전통을 따라 가운의 색은 푸른색에서 자주색을 거쳐 쥐색으로 바랠까요? 지켜볼 일입니다.

 




+ '스터디 인 핑크'에서 핑크 수트케이스를 앞에 놓고 셜록이 소파 위에 올라가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 있지 않습니까? 그걸 틀림없이 원전에서 읽었었는데 도통 기억이 안 나네요. 뭔가 증거물이나 도난물을 앞에 두고 홈즈가 소파에 올라앉아 들여다보는 몸짓이 분명히 있었는데. 혹 기억나시는 분이 계시면 언제라도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머릿속이 근질거려 괴롭네요.


(다음회 예고)


7-3. 이중주 duet
7-4. 협주곡 concerto
7-5. 캐논 canon
7-6. 변주곡 variation
7-7. 종곡 fin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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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 [TV] 육백만 불의 사나이 The Six Million Dollar Man (로봇의 날/ 로봇 메이커의 귀환) [3] Q 2017.03.30 75094
779 [영화] 컬러 아웃 오브 스페이스 Color Out of Space (2020) Q 2020.03.01 47806
778 [영화] 콜럼버스 Columbus (2017, 존 조 주연) [1] Q 2017.08.23 41273
777 [영화] 리지 Lizzie (2018) (클로이 셰비니, 크리스틴 스튜어트 주연) [1] Q 2018.12.21 39273
776 [영화] 어스 Us (2019) [1] Q 2019.03.27 38941
775 [영화] 인비저블맨 The Invisible Man (2020) Q 2020.04.09 33521
774 [영화] 원더우먼 1984 Wonder Woman 1984 (2020) [1] Q 2021.01.19 28779
773 [영화] 바운티호의 반란 The Bounty (1984) (멜 깁슨, 안소니 홉킨스, 대니얼 데이 루이스, 리엄 니슨, 기타 등등 출연) Q 2019.05.04 24143
772 [영화] 신체강탈자들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78) Q 2016.12.19 20554
771 [영화] 2011년 최고의 디븨디와 블루레이 열한편씩 스물두편 (15금 사진 있습니다) [5] [10] Q 2012.01.14 20548
770 [영화]여곡성(女哭聲, Woman's Wail 1986) [6] [31] 원한의 거리 2011.01.17 20438
769 [영화] 블랙 스완 Black Swan (나탈리 포트만, 마일라 쿠니스 주연- 스포일러 없음) [12] [33] Q 2010.12.05 14493
768 [만화] 셀프 - 사쿠 유키조 [5] [18] 보쿠리코 2010.11.05 14272
767 [영화] 새로운 딸 The New Daughter (케빈 코스트너, 이바나 바케로 주연) [34] Q 2010.06.22 14071
766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 Dangerous Method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6] [26] Q 2012.05.12 13450
765 [만화] Peanuts, 짝사랑 대백과 [9] [26] lonegunman 2010.07.22 13437
764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 [8] [20] milk & Honey 2010.09.10 12591
763 [TV] KBS 미스터리 멜로 금요일의 여인 (정리판) [4] [1] 곽재식 2011.02.14 12036
762 [영화]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 백설공주와 사냥꾼 (스포일러 없음) [6] [215] Q 2012.06.12 1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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