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불꽃 (선우휘 소설집)

2015.01.06 19:24

곽재식 조회 수:2620

선우휘는 군인 신분으로 소설 쓰는 작가였던 것으로도 초기에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신문 기사에는, “군인하면 드는 무식한 이미지를 불식시킨데 공을 세워서 표창을 받기도 했다”는 언급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거물급 언론인으로도 자주 언급되었던 작가입니다. 소설은 한국전쟁 전후의 극단적인 상황들을 주로 소재로 하는 글들이 자주 회자 되어 흔히 “전후 세대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표지)

여기에서는 “불꽃”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나온 중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을 다루어 보면서, 그 줄거리들과 결말까지 모두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역시 한국전쟁 전후의 시대상을 다루는 소설들이 많은 편입니다.


1. 테러리스트
주인공은 백수 한량으로 대낮에 할일 없이 찻집에 앉아 차나 마시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 주인공이 뭐하던 사람인지가 드러나는데, 주인공은 바로 서북청년단류의 북에서 남으로 넘어 온 사람으로 구성된 “빨갱이 때려 잡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주인공이 직업 삼아 하던 일이란, 좌파 활동을 하는 사람을 습격하는 것인데, 좌파 정치인을 때려 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노조 활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뛰어 들어 그 모임을 박살 내는 것까지 다양했습니다.

그러던 주인공이었는데, 1940년대말, 50년대초 정도의 상황이 되자 남북이 분단 되어 남한 지역에서 대놓고 좌익 활동을 하는 사람이 없어졌으므로 일거리가 없어져서 백수 신세가 된 것입니다. 목숨 걸고 맨날 피터지게 싸우며 다녔지만 뭐 의미 있는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 하니 지금은 결국 빈털터리 신세. 주인공은 비슷한 신세의 동료들과 옛날 활동하며 싸우고 부수고 했던 시절 이야기를 하며 신세한탄하면서 술먹고 놉니다.

그 와중에 주인공이 원래 고향이었던 평안도를 떠나게 될 때 원한이 생겨 공산당은 무조건 없애겠다고 결심한 이야기라든가, 비슷한 처지의 동료 중에서 정치인들 잘 따라 다니며 약삭 빠르게 머리도 굴려서 지금은 그럴듯한 직함을 갖게 된 사람들에 대한 질투 같은 감정 등등도 드러납니다. 주인공은 우직하게 그냥 싸움만 할 줄 아는 쪽에 가까워서 지금은 일감 없는 백수인 것입니다. 중간에 원래 공산당의 노래였는데, 공산당을 조롱하는 의미로 가사를 바꿔 부르는 노래를 군가처럼 부르며 옛날 생각하면서 웃는 장면도 나옵니다.

한편 한 부유한 유력자에 대한 원한도 떠올립니다. 그 부자는 공산당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공산당들에게 맞아 죽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들이 목숨 걸고 싸워서 구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출되자 보답을 해주기는 커녕 자기들과 엮이기 싫어 하며 박정하게 대하기에 원한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옛 동료 중 하나가 그런 원한을 무시한 채 먹고 살겠다고 그 부자의 졸개로 들어가기도 해서, 거기에도 아니꼬운 시각을 드러냅니다.

그러다 주인공은 길을 가다가 평화 통일 주장을 하는 어느 연사를 보는데, 그 연사를 문득 “빨갱이”로 몰아 붙이며 몰려 가는 젊은이들을 봅니다. 거기에 알 수 없는 반감을 느껴, 주인공은 그 젊은이의 다리를 걸어 버립니다. 그 후 으슥한 거리에서 여러 사람에게 둘러 쌓여 맞아 죽을 위기에 빠지고, 주인공은 비장하게 싸울 각오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자기들을 잊었다고 생각했던 부자 졸개가 된 옛 동료가 주인공 편으로 오고, 결국 모두 같이 싸워서 빠져 나옵니다. 결말은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기어 나오며 어디 가서 같이 한잔 하자고 비틀거리며 걸어 가는 장면.

수작으로 꼽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소설로, 구구한 감상적인 서술 없이, 사실 위주로 간결히 설명하면서도 생생한 상황과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는 것이 재밌었습니다. 평안도 사투리가 푸지게 펼쳐져 나오는 생동감 있는 인물들도 저마다 살아 있는 느낌이 났고, 대한민국 초의 혼란상을 “공산당 반대한답시고 각목 들고 싸우러 다니던 청년”의 시각으로 묘사한 모습도 당시 상황을 잘 잡아 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야인시대”류가 아니라, 주인공이 “내 인생의 모든 악이 다 빨갱이인 것 같아서 빨갱이만 없애면 다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분”에 빠져 있는 인물로 묘사해서 강하게 비판적인 시각을 비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느낌도 들게 해 둔 것이 묘했습니다.

특히 선우휘가 전형적인 반공물 결말을 갖고 있는 “불꽃”이나 반공물 색채가 은근히 빠지지 않고 남아 있는 “단독강화” 등으로 유명한 것에 비하면, 이 소설은 반-반공 소설에 가까운 느낌이어서 더 특색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떤 나쁜 사상-공산주의-에 강하게 반대하기만 하면 무조건 좋은 편”이라는 식의 흑백논리가 이 소설에서는 강하게 비판되는데, 그러면서도 그걸 “반공의 탈을 쓴 악마의 처삼촌”이라는 식으로 악당이라고 몰아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짧은 소설 속에서도 여러 면면의 모습으로 잘 그려내서 인간 심리와 사회를 통찰하는 느낌도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니, 반공 과격 단체 행동 대원이었던 사람이 옛날 무용담 이야기하며 초라하게 술먹고 있는 장면이지만, 그 장면을 정반대 입장인 학생운동하던 선배가 옛날 무용담 이야기하며 후배들이랑 술먹고 있는 장면의 감상으로 비춰 보아도 들어 맞을 만큼, 이야기의 감성이 사는 느낌이었습니다. 1956년작. 


2. 불꽃
중편 소설로, 일제시대에 태어나 한국전쟁 무렵까지 살아 가는 주인공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입니다. 3.1운동 때 나섰다가 죽은 아버지의 유복자가 주인공으로 부유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나서 공부도 잘하고 유학도 가지만 학도병이 되어 일본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탈영해서 고향으로 돌아 옵니다. 일본군으로 복무 중에 일본군이 전쟁터로 사람들을 몰아 대는 것을 겪으면서 어떤 강렬한 사상을 앞세워 개인의 삶을 짓누르는 것에 환멸을 느낀 바람에, 주인공은 고향에 돌아 와서는 냉소적으로 살게 됩니다. 주인공은 학교 교사가 되는데 학교에서 교사들, 학생들 사이에 좌파, 우파로 나뉘어 서로 괴롭히는 것을 보고 부당한 방법으로 상대방을 괴롭히면 안된다고 주장하다 거기에서도 환멸을 느껴 교사도 그만둡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옛 친구 중에 좌파 활동을 하며 공산당에서 자리 잡았던 사람들이 마을을 휘두르게 됩니다. 친구는 주인공을 찾아 와 “같이 인민을 위해 일하자”며 “사람들을 위한 혁명”에 동참하라고 권유하는데, 주인공은 그런 사상을 앞세운 혁명은 무의미하다며 오히려 친구를 가열차게 비판하고, 열받은 친구는 주인공에게 적개심을 품게 됩니다. 얼마 후, 인민재판을 열어 사람들을 처형하려고 하는 친구를 보고 주인공은 객기 같은 마음이 불타 올라 총을 빼앗아 난동을 부리고, 주인공의 아버지가 옛날 숨어 들어 갔다가 죽었다던 동굴로 도주하게 됩니다.

친구는 주인공을 추적한 후, 그를 동굴에서 끌어 내려고 주인공의 할아버지를 끌고 와서 죽이겠다고 협박하다가 진짜로 죽이고, 열받은 주인공이 자기도 총알을 맞은 채로 친구를 죽입니다. 마지막 장면은 어머니를 생각한 주인공이 그래도 살아야 겠다고 다짐하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이 다시 마을이 국군에게 회복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 현대사를 다룬 많은 여러 장편 소설, TV물들이 다루는 이야기들 중에서 이제는 정형화된 한 형태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상에 대해 잘 알지만 환멸을 느낀 지식인 주인공이라거나, 사상에는 아무 관심 없이 오직 아들이 살아 오기만을 바라는 어머니의 모습, 하나의 사상에 푹 빠져 강렬한 행동을 하거나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 정치, 민족에 대한 인식 없이 그저 혈통과 가문에 대한 생각만을 하는 구두쇠 노인 할아버지 등등의 인물은 꼭 다른 여러 소설, 영화, TV물에서 한번 쯤 보았을 법한 모습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큰 차이 없이 드러나고 있어서, 할아버지는 탐관오리들이 세금 막 뜯어가던 조선말 보다는 일제시대 초기가 더 좋았다고 스스럼 없이 말하고,(물론 손자가 학도병으로 가야 되고 공출 물량이 늘어 나는 일제시대 말기에 대해서는 욕을 합니다.) 3.1 운동에 앞장서다가 죽은 아들을 “나라 찾겠다고 하는 것 자체부터 이해하기 어렵지만은 그게 좋은 일이라고 해도 네가 거기 나서기는 왜 나서냐”고 원망하며 헛바람든 멍청이 취급합니다. 이런 인물은 어떻게 보면 극적인 인물입니다만, 이 시기를 다루는 이야기에 너무 자주 나오던 것이라 지금 보면 이제는 정형화된 인물이라는 느낌이 도리어 들기도 했습니다. 특징을 찾는 다면 이런 부류의 인물은 부정적인 면모가 강조되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서는 오히려 동정적으로 보며 나름대로 긍정적인 느낌도 들도록 묘사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도 많이 보던 이야기라는 느낌이고, 서술에서도 감성을 터뜨리기 위해 군데군데 감탄사를 줄줄이 늘어 놓는 50, 60년대 “문학적으로 보이려고 한 글”에서 너무 많이 쓰던 수법이 별다르지 않게 또 많이 나오고 있기도 했습니다. 결말 역시 전형적인 반공물 분위기여서, 할아버지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친구의 모습은 그야말로 반공물 속 악당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공산당 두령이 사실 돼지 괴물로 변신하다거나, 공산당은 너무 악랄해서 재미로 사람들 잡아서 계속 고문하면서 깔깔깔 웃는다는 류의 양산형 괴기 반공물류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수준을 넘는 반공물 중에서는 이 소설 결말 부분 같은 형식이 제일 많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중간에 주인공이 일본군에서 탈영해서 도망치는 장면에서, 한 외진 길에서 중국인 소녀를 본 후 갑자기 확 욕망이 치솟아 그 소녀를 습격할까 마음을 먹으려다가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허벅지를 칼로 찌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주인공은 홀어머니로 주인공을 키우던 어머니의 허벅지에 상처가 많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1957년작.

1975년에 하명중 주연, 유현목 감독의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3. 오리와 계급장
한국전쟁 직전 군대에 입대해 지금 시점에서는 대령이 된 주인공이 옛 친구를 오래간만에 만나 그가 살고 있는 시골마을에 찾아 가는 이야기입니다. 시골마을에 가 보니, 옛 친구는 주인공의 옛 학교 교사였던 사람과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과거 서북청년단에서 일하면서 좌파 활동하는 사람들 두들겨 패고 다니는 게 직업이었던 사람이고, 교사는 반대로 사회주의 활동에 빠져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쟁이 끝나고나서 둘 다 할 일 없는 처지가 되니 궁핍하게 지내며 같이 돕고 살고 있고, 오리 키우는 곳 울타리가 남의 땅을 조금 넘어 갔는데, 그 문제에 대해 대령이 된 주인공에게 한 번 말좀 잘 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는 것이 결말. 두 사람의 모습은 애잔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평안도 출신으로 남한에 눌러 앉았다가 한국전쟁 직전에 입대해 나중에는 대령까지 진급했던 작가 자신의 모습이 어느 정도 투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소설이었습니다. 반어적인 처지의 한 장면을 그리는 소설이지만, 인물들의 모습은 모두 성격이 분명히 보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친구는 가는 길에 대뜸 파출소에 들러서 거기 경찰관들에게 인사를 한 번 하고 가자고 합니다. 주인공은 친구가 파출소 경찰들을 잘 아나보다 싶어서 인사를 하고 가는데, 알고 보니 친구도 파출소 경찰들은 그때 쌩판 처음 보는 것이었고, 그저 대령 계급장을 단 친구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여 앞으로 만만히 보지 못하도록 하고 싶어서 괜히 주인공을 데려 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정서는 오랫만에 예전에 알던 사람들이 늙은 모습을 보는 애잔한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한 때는 사상이다, 혁명이다, 하면서 사람 죽이고 살리며 격렬히 날뛰던 인물들이 전쟁 후에 먹고 살길이 막막해 지자 시골 마을에 들어 와 살면서, 오리 키우느냐 울타리가 몇 뼘 남의 땅으로 넘어 가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고 살게 된 모습을 보여 주면서, 허무함, 냉소주의를 보여 주는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4. 단독 강화
한국전쟁 중 혼란스러운 전투로 모두 죽거나 후퇴하고, 깊은 산 속에 국군, 인민군 각각 단 한 명씩만 남겨진 상황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입니다. 딱 둘 밖에 안남았지만 둘은 서로 치고 받고 죽이니 살리니 싸우려고 하지만 결국 무의미함을 깨닫고 같이 협심하고 잘 지내려고 하는데, 막판에 중공군이 그 지역에 대규모 공격을 하는 바람에 그냥 허무하게 둘 다 죽는다는 이야기.

전쟁의 허무함을 드러내기 위해 양쪽 군대에서 단 한 명씩만 남은 상황은 자주 나오는 소재라고 생각 합니다. 예를 들어 60년대판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에서는 1961년 방영된 “Two”라는 에피소드에서 이런 이야기를 젊은 시절의 찰스 브론슨 주연으로 보여 줬기도 합니다. “단독강화”도 그런 다른 여러 이야기들 중 하나로 볼만합니다. 여기서는 반공물 색채가 살짝 어려 있어서, 국군은 호쾌하고 멋있고 너그러운 사나이로 나오고 인민군은 불쌍하고 어리숙한 사람으로 나오는데, 그것도 남한에서 살다가 갑자기 인민군에 끌려간 의용군으로 나옵니다.

TV문학관에서 영상화된 판도 여러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편인데, 이 TV문학관판이 원작보다 더 낫다는 것이 제 느낌이었습니다. TV문학관판은 전형적인 반공영화에서 탈피한 것으로 당시 회자 되었고, 그 때문인지 방송을 못하게 되어 연출자가 사표를 내며 항의를 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5. 망향
평안도에서 남한으로 내려와 자리 잡은 친구의 부친을 찾아 가는 이야기인데, 부친은 사업으로 성공한 후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 가는 것을 너무나 간절히 그리다가, 고향의 지형과 매우 비슷한 땅을 찾아 내서는 거기에서 고향집과 똑같은 모양의 집을 세우고 거기에서 삽니다. 고향집과 똑같은 모양을 만들어 보려는 이 사람의 집착은 대단해서 돌멩이 하나 정확히 옛날 기억대로 그대로 배치하려고 하고, 심지어 옛날 고향집에서 살 때 쥐가 다니던 소리가 났다는 것까지 정확하게 재현하려고 일부러 쥐를 사다가 풀어 놓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 노인은 100% 정확하게 재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느끼는데, 고향집처럼 꾸며 놓은 집 앞의 늪을 들여다 보다가 거기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 결말입니다. 고향의 풍경에 대한 생각에 빠진 나머지 일부러 늪 안으로 들어 가듯이 하다가 죽었음을 암시합니다.

어떻게 보면 기이하고 신비로운 느낌이 강한 환상소설에 가까운 소재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인데, 환상소설 느낌은 적고 구성도 그렇고 문체도 그렇고 향토색을 살리는 느낌이 강한 전형적인 60,70년대 수필에 가깝게 되어 있었습니다. 1965년작.


6. 묵시
주인공이 학생시절에 객기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하여 친일운동을 하고 다니는 이광수를 처단하기 위해 테러를 해서 암살을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우연히 이광수와 견줄만하다는 다른 작가의 이야기를 알게 됩니다. 이 작가는 어느날 갑자기 연설을 하려다가 말고 갑자기 말이 입에서 안나오는 일을 겪더니 그 이후로는 말을 하지도 못하게 되고 뇌도 다쳤는지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작가에 대해 신비로운 소문이 생기는데, 바로 작가가 일제의 선전에 자신의 글쓰는 실력, 연설하는 실력이 이용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말을 못하게 되었고 뇌도 다친 척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작가를 대단히 굳건한 선비이자 기인으로 보는 시각도 생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스럽게도 이 작가는 광복 후에도 계속 말을 하지 못했고, 꾸준히 치료를 해서 겨우 말을 하게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밝혀 집니다. 즉, 일부러 지조를 지키기 위해 말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병이 들어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우연히 이 작가의 아들을 나중에 만나게 되는데, 그 아들이 밝히는 사실인 즉슨, 그때 작가는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말을 못하게 된 척한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철저히 말을 못하는 척 하다 보니 광복 후에는 이제는 말을 하려고 해도 그런 능력이 퇴화 되어 잘 안되고 계속 그렇게 지내다가 겨우 의학의 도움으로 서서히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실을 나중에 밝히기도 민망해지고 이미 세간의 시각도 그렇게 굳어진 상황이라 그냥 조용히 얼마 더 살다가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역시 환상적인 소재를 살려서 환상소설로 꾸며도 될만한 소재인데, 전형적인 당시 수필체의 회고담에 가깝게 그려진 이야기였습니다.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습니다만, 지식인으로서 사회의 불의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나타나있고, 한편으로는 사회악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동조하거나 방관하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항거하는 방법조차 잊어 버리게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이 간접적으로 비유되는 느낌도 들기도 합니다. 1971년작.


7. 희극 배우
태어날 때부터 웃기게 생겼고, 다른 사람들 성대 모사를 잘하고, 웃긴 말을 재밌게 잘하는 친구와 그 친구가 코미디언이 되었을 때 웃긴 대본을 써 주는 작가가 된 “나”의 일대기를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내용은 어려운 시절의 연예인들을 다루는 요즘의 정형화된 이야기 그대로, 친구는 재밌게 웃기는 내용에 집중하려고 하지만 일제와 광복 직후의 혼란기, 한국전쟁을 거치는 와중에 정치적으로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는 것 때문에 압력도 받고 고초도 당하고 한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전쟁 후에 정말 웃긴 코미디 공연을 하는 배우로 자리를 잡고, 끝까지 무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살다가 길지 않은 인생 마감합니다.

지금 보면 역시 전형적이고 서술도 정석대로인 내용입니다만, 희극배우의 시각에서 한국 현대사를 살펴 본다는 소재는 그래도 개성이 보이는 편이었습니다.

이야기 중에 희극배우인 주인공은 애지중지하던 딸이 그만 어릴 때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그 순간 무대에서 심청전의 심봉사 연기를 완벽하게 처리하여, 말하자면 show must go on 정신을 보여 줬다는 내용도 있고, 천재적인 주인공의 희극재능을 살리기 위해 전형적인 웃긴 인물에 주인공을 대입하기 보다는 오히려 좀 더 진지한 이야기, 진지한 인물에 주인공을 대입하면 더 환상적인 새로운 경지의 코미디가 나오게 된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1978년작.


* 선우휘는 평안도 출신으로 남한에 정착하여 스스로 국군에 입대한 후 반공 활동을 많이 했던 사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일들을 비판하다가 붙들려 가거나 하는 일도 있었고, 또 반대로 사상을 내세우는 학생운동 등에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져서 그 반대 입장에 서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언론인으로서 초기에 싹을 내리고 있던 소위 “단군계통의 괴상한 역사 이야기”등을 취재하고 다니는 일을 했던 행적도 있는 작가입니다.

소설 역시 어느 정도 질을 갖춘 반공물들의 원작자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막상 지금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소설들을 하나하나 보면, 정통 반공 소설부터 반공물 색채가 살짝 가미된 인물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도 있고, 반공물에서 탈피한 소설을 쓰기도 해서, “선우휘 소설”이라고 하면 흔히 느껴지는 분위기에 비해서는 꽤 색채가 다양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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