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포 미드나잇

2013.05.23 10:17

menaceT 조회 수:4281

 

 

'비포 미드나잇',

5월 20일,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시사회로 ‘비포 미드나잇’을 봤다. 개인적으로 ‘비포 선라이즈’는 너무 말랑하기만 해서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고 ‘비포 선셋’을 그보다 훨씬 좋아하는데, ‘비포 미드나잇’은 더더욱 좋았다.

 

  9년 주기로 돌아올 때마다 제시와 셀린느는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시선은) 늘 그 자리에 머무는 듯 하면서도 조금씩 더 성숙해 있었다. 18년 전의 제시와 셀린느는 주변마저 자기네들 색으로 물들여 버릴 기세로 자신들 안에 취해 있었다. 때문에 ‘비포 선라이즈’에서의 비엔나는 삼부작을 통틀어 배경으로서의 존재감은 가장 크지만 두 인물의 미시적인 세계에 완벽하게 종속되어 있었다(비엔나의 사람들이 제시와 셀린느를 대할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완전히 상실한 관광지의 NPC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9년 전의 제시와 셀린느는 세상이 더 이상 그들의 꿈이나 판타지 혹은 이상을 위해 봉사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인식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영화 속 파리는 그야말로 일상적인 공간처럼 무심하게 다루어진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중심에 둔 채 그 자리에 서서 30대의 눈으로 세상을, 지나온 시간들을, 앞으로 겪을 시간들을 바라보며 이를 관통하려 했다. 이제 ‘비포 미드나잇’에 이르러 제시와 셀린느는 자신들을 구심점 삼아 세상을 바라보기보다는,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매개 삼아 자신의 세계 그 밖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스포일러)

 

  이러한 변화는 영화가 대화를 제시하는 방식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롱테이크로 차 안에서 진행되는 둘의 첫 대화 장면은, 공항 안의 아버지와 아들 / 공항 밖의 어머니와 딸들로 구분되어 있던 두 인물이 아들 헨리(그는 제시와 전 부인 사이에서의 아들이다.)가 떠난 뒤 차 안에 함께 앉는 순간 시작되며, 셀린느의 직업 이야기에서 시작해 헨리와 딸들 이야기 위주로 흐르다 두 딸이 깨어나는 순간 끝난다. 전 부인과 제시 사이의 아들, 그리고 제시와 셀린느 사이의 두 딸과의 관계가 둘의 대화를 장악하고 있다. 작가 게스트하우스에서의 두 번째 대화 장면은 남자들이 모인 올리브 나무 아래의 공간과 여자들이 모인 부엌을 오가며 동성의 무리 안에서의 제시와 셀린느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인데, 스테파노스 부부 중 남편이 여성들이 모인 공간인 부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끊기게 된다. 한 편, 식사 시간에 펼쳐지는 세 번째 대화 장면은 식탁에 커플끼리 모여 앉아 나누는 대화를 식탁에 둘러 앉은 모든 인물들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때 그 식탁에 둘러 앉은 이들의 면면은 제시와 셀린느의 과거, 현재, 미래의 또 다른 얼굴들이며, 이들의 대화 주제 역시 제시와 셀린느의 과거와 현재, 미래, 나아가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아우른다.

 

  이렇게 다른 이들과의 관계 하에서 자신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조망하며 대화를 나누던 제시와 셀린느는, 스테파노스 부부가 예약해 준 호텔로 향하는 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전처럼 온전히 둘만의 대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들이 산책길에 나누는 대화 장면은 얼핏 ‘비포 선라이즈’나 ‘비포 선셋’의 그것을 연상시키나, 대화의 주제는 이전 두 영화보다 훨씬 현실에 맞닿아있으며, 게스트하우스에서 있었던 대화의 연장선 상에서 자신들의 과거나 미래로부터 혹은 자신들의 외부로부터, 관계로부터 자신들의 현재를 바라보는 대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들은 산책 중에 어느 예배당에 들어서는데, 제시는 그곳이 시각을 관장하는 신을 기리는 예배당이며 사람들이 그곳에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돈을 기부한다고 말한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제시가 과거와 미래의 이름을 빌려 화해해 보려는 자신의 노력을 외면하는 노력을 외면하는 셀린느를 ‘눈이 멀었다’고 비판한다는 점, 이 산책길에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대부분 그들의 현재에서 벗어난 시공간으로부터 그들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일종의 복선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두 장면 모두 섹스에 대한 언급이 존재하기도 하고.).

 

  이제 제시와 셀린느가 호텔 방에 들어서게 되면, 영화는 한 동안 호텔 방을 나서지 않고 그 곳에서 둘의 대화를 지켜본다. ‘집’을 연상시키는 호텔 방이라는 공간에서 그들은 ‘집’이라는 공간이 상기시키는, ‘자식들’과 ‘권태로운 자신들의 일상’으로 대표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날을 세우고 싸우기 시작한다.

 

  ‘비포 선셋’에서도 두 인물은 집이라는 공간 안에 함께 들어선 바 있지만, 그때의 집과 지금의 집은 차이가 크다. 그때의 집은 둘 중의 한 인물인 셀린느의 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시의 입장에서는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상대방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셀린느의 입장에서는 한 번도 들어온 바 없던 상대방이 들어선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묘한 설렘과 성적 긴장감이 감도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를 대변하듯 ‘비포 선셋’에서 두 인물이 그 공간에서 나눈 대화와 노래에는 과거에 대한 감상적인 회상, 현재의 낭만, 미래에 대한 기대(이 기대에는 어쩌면 그 집이라는 공간 안에 두 인물이 공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역시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비포 미드나잇’의 두 인물에게 ‘집’은 그들이 권태로운 일상을 공유하는 공간이다. 비록 ‘타지에 있으며’ ‘한 번도 온 적 없는’ 어느 호텔 방이긴 하지만(이 때문에 처음 둘이 호텔 방에 들어설 때는 그 둘 사이에서도 자연스레 성적 긴장감이 형성된다,), 헨리의 전화로 인해 현실의 문제가 살짝 고개를 내밀기 무섭게 그 호텔 방은 일상 속의 ‘집’이나 다를 바 없어지고(셀린느가 집을 박차고 나간 뒤 호텔 방 곳곳을 바라보는 제시의 시선엔 권태가 묻어 있다.) 잠시나마 감돌던 설렘과 성적 긴장감은 사라지고 만다. 심지어 그곳에서 그들이 뱉는 말들엔 점차 과거에 대한 후회, 현재의 권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섞여 들기까지 하는 것이다.

 

  젊은 시절 자신들을 중심에 세워 두고 세상을 바라보았던 그들은, 이제 타인들과의 관계 하에서, 외부에서 자신들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위치에 섰고, 아마 그 안에서 점차 자신들이 바라왔던 모습에서 벗어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타지 그리스의 풍광 아래서 과거와 미래를 불러내기 시작하면서 그 감정은 더욱더 커져만 갔고, 이때 ‘집’을 연상시키는 공간과 ‘집’과 직결되는 문제의 언급은 그 감정을 그대로 폭발시키고 만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전편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그 ‘집’에서, 한쪽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함께 뛰쳐나간다. 그리고 다른 쪽이 그 뒤를 따라 나선다. 엔딩이 다다른 시간, 과연 이 영화는 어떻게 끝을 맺을 것인가?

 

  ‘비포 선라이즈’의 엔딩에서 두 인물은 미래를 기약하며 작별했다. 이때 엔딩은 오롯이 그들의 미래를 향해 있었다. ‘비포 선셋’의 엔딩에서 두 인물은 과거 그들이 나누었던 추억을 찬미하며 미래에 대한 기대에 부푼 채로 화면에서 사라졌다. 이때 엔딩은 현재로부터 과거와 미래 양 갈래로 뻗어 있었다(‘비포 선셋’의 엔딩도 표면적으로는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라는 현재의 질문을 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노래를 통해 과거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사랑을 확인한 그들의 그 이후의 관계’에 방점을 찍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집이라는 공간 안에 머물러 낭만적인 현재 그 이후의 기대를 증폭시켰던 ‘비포 선셋’의 엔딩에서와 달리, ‘비포 미드나잇’의 두 인물은 엔딩에 이르러 다시 집 밖으로 뛰쳐 나간다.

 

  뛰쳐 나간 그곳에서 그들이 찾은 해결책은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 일상이 아닌 그 어느 다른 공간으로 향해 있지 않다. 오히려 현재의 일상을 낭만적이었던 과거의 연장으로 바라보고(‘비포 선셋’에서 셀린느가 제시에게 불러주던 노래의 경우에는 ‘과거의 낭만적인 하룻밤’이 핵심이지만, ‘비포 미드나잇’에서 제시가 셀린느에게 ‘내가 18년 전의 그 남자’라고 말할 때에는 ‘현재의 제시 자신’이 핵심이다.) 미래의 이름 아래 찬미하며(‘비포 선셋’에서는 현재 시점에서 노래를 통해 과거 비엔나에서의 원나잇 섹스를 찬미하는 것과 달리, 미래 시점을 가정하여 쓴 편지를 통해 현재를 이야기하고 현재의 섹스를 찬미한다.) 그 자체로 긍정하기로 약속하는, 과거와 미래로부터 현재를 향해 뻗어 있는 형식의 엔딩인 것이다.

 

  철없던 20대, 미래를 이야기하며 끝났던 첫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이 시리즈는, 이렇게 18년 만에 40대의 현재를 이야기하며 마무리되었다. 이 지점에서 끝나도 로맨틱하면서 또한 현실적이고 예쁘고 귀엽고 철없지만 동시에 우아하면서 성숙하기까지 한 이 시리즈에 걸맞은 더없이 깔끔한 결말이라 할 수 있겠지만, 1편에서 남겼던 ‘6개월 뒤에 그들이 재회했을까?’란 질문에 9년 뒤의 2편이 대답했듯이, 2편에서 남겼던 ‘제시가 과연 머물렀을까?’란 질문에 다시 9년 뒤의 3편이 대답했듯이, 3편이 남긴 ‘그들이 과연 환상적인 섹스를 했을까?’란 질문에 대답할 9년 뒤의 속편을 벌써부터 기다릴 사람이 비단 나 하나 뿐일 것 같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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