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대종사

2013.10.02 01:37

비밀의 청춘 조회 수:2067

 



일 대 종 사


 

09. 21 10.02 

 

  비가 함빡 온다.

 

  왕가위는 정경을 그려낸다. 사람들은 빗속에 있다. 거친 발차기와 함께 엽문은 말한다. 세상에는 수평과 수직이 있다. 수평은 무너진 것, 수직은 꼿꼿이 서있는 것. 그는 자신의 몸을 단 한 번도 눕히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허리를 세우고 직립한 그의 모습은 곧 승리요, 생존이다.

 

  엽문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다정하다. 그와 아내의 사이 역시 좋다. 그 둘은 공익 광고처럼 건전하다. 그들의 삶은 사생활의 영역에 속해 있다. 엽문은 큰 어려움 없이 가족을 부양하며 아내와 오손도손 자식들도 낳고, 자신의 무예도 갈고 닦는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부족함을 알 수 없다. 그가 설치한 무술 연습용 나무봉은 굳건하고 안정된 그의 사생활을 상징한다. 그의 짝인 장영성은 자신에게 굴레 씌워진 사대부 여인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다. 엽문 역시 금루로 출입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들 둘은 사회와 세상의 시선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사생활 속에서 안전했고, 행복했다. 외부와 딱히 연결되지 않는 삶을 산 것이다. 부모가 물려준 금전으로만 살아도 풍족한 삶이니 딱히 말도 안 된다 짐작할 순 없다. 하지만 궁가의 등장으로 그들의 일상에는 새로운 사건이 발생한다. 엽문은 일생일대의 도전을 받게 된다. 이 시점이 바로 그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는 최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궁대인은 북방에서 온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무예와 남방의 무예를 합치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의 관심사는 개인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바라는 것은 진시황이 바란 천하통일과 같다. 하지만 궁대인은 분서갱유를 지시한 오만한 독재자는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대의와 중생을 바라보고자 한 인물이다. 그에게 무예란 것은 알려야 하는 소중한 것이며, 전통과 다름없다. 그는 중국적 가치를 일구어 내기 위해 분주하게 노력하는 자이다. 사회와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이다. 그가 만들어 내고, 지켜내고자 하는 것은 궁 대인의 삶을 대변하며 동시에 철저히 궁가의 것이다. 그가 자신의 딸에게 설욕전을 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일은 그의 생각에 당연하다. 무예는 인간 개인 한 명의 좁은 차원이 아닌 더 넓은 차원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일대종사에서 무예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영화 속 시간이라는 가로의 축 뿐만 아니라 세로의 축으로도 일대종사를 봐야 한다. 세로의 축이라 함은 왕가위 감독이 제시하는 철학이며 중국의 역사적 맥락을 동시에 의미한다. 왕가위 감독은 여러 곳에서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속 엽문을 이야기한다. 중국의 위기 속에서 무예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예라는 것은 중국민족에게 전통이며 문화 중 하나이다. 괜히 그들의 삶에서 무협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 아니다. 무술이란 개인 하나가 소유한 것이 아닌 집단의식에 가깝다. 공공재다. 그것은 스승이라는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달된다. 자식은 새로운 부모가 되어 자식인 제자에게 무예를 전달한다. 자신과 자연을 뛰어넘어 인간을 바라봐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교육의 형태는 민족적 정체성을 위협받는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삶의 방식이요, 저항하는 길이다.

 

  북방에서 온 자들이 엽문을 비롯한 남방계 사람들까지 자극시키는 이유는 그러한 사고방식으로는 당연한 일이다. 대의 앞에서 자신의 집단을 대표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능력자의 자질이 아니다. 그것은 비겁한 일이며 불효자나 할 짓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집단을 대표하는 일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병아리는 자신의 둥지 안에서 극치의 편안함만을 느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더 큰 책임감에서 개체가 자유롭기 때문이다. 엽문의 능력은 개인이 가진 것이 아니라 그를 낳은 스승과 문파에게 있는 것,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능력에 책임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허락을 받지 않는 한 움직일 수 없다. 그의 마음이 아내에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내밀한 공간은 장영성에게 내어준 방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아내의 허락을 받고서야 엽문은 움직인다. 그 순간이 바로 병아리가 둥지 밖으로 발을 내딛은 때이다.

 

  거울로 자신만을 보는 사람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나 타인을 보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분리해서 보지 못한다. 새가 둥지를 벗어나며 보는 것은 무엇인가? 하얀 설원과 푸른 산과 파란 바다와 붉은 꽃이다. 세상은 아름답다. 단조롭고 평화로우며, 촛불과 집으로 둘러싸인 사적 공간을 벗어나 밝고 넓은 공적 공간, 천지, 대자연이 펼쳐진다. 엽문은 자연과 인생의 섭리를 체험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이웃들한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영특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기에 척척 알아듣는다. 엽문은 이러한 사람도 있고 저러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그는 동포들을 대표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에 돌을 하나씩 짊어진다. 그 돌을 세 개 짊어진 다음, 엽문은 그 시대의 대인을 만난다. 궁대인은 적이요 스승이요 동시에 아버지이다. 먹어 삼켜야 할 우라노스이다. 자분히 밟고 지나가야 할 철쭉꽃이며 상대 역시 그것을 노린다. 궁대인은 더 넓은 곳을 본다. 자신이 끝나야, 자신의 유전자가 이어질 것을 아는 자이다. 그는 이타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무엇인지 역설하는 존재이다.

 

  궁대인은 사람들 앞에서 의식을 치른다. 자신의 새 아들에게 궁대인은 묻는다. 남과 북을 결합하고자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엽문은 남과 북이 다른 것을 억지로 합치면 탈이 나며 다른 것은 다른 것대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답한다. 전병이 궁대인에게 단순히 무림이라면 자신에게는 세상이라는 엽문의 말까지 고려해서 본다면, 궁대인이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함은 당연함이다. 궁대인은 무예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지만, 엽문은 무예를 뛰어넘은 세상 만상의 중생을 바라보며 답했기 때문이다. 그 답을 지닌 엽문을, 궁대인은 축복으로 기원한다.

 

  다만 혈기왕성한 장쯔이의 궁이가 순간만큼이라도 양보할 수는 없다며 엽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렇게 한 데에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은 젊은 후계자에 대한 궁금함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궁이는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자신을 보고, 하늘과 땅을 봤지만 중생을 보지는 못했다. 그녀에게는 여성이라는 한계가 있었고, 본인의 기질적 성품이라는 담이 있었다. 가끔 세상 사람들 중에는 이상하게 어느 지점 위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궁이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과 궁가라는 사적 집단의 자존심만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 해도 중요하지도 않고, 자신과는 상관도 없다. 하지만 궁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독의 애정은 지고지순하다. 북방에서 온 궁이가 화려한 금루의 여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감독 자택의 거실에 조심스레 걸어놓은 한 폭의 서양화를 보는 것 같다. 중생을 보는 일대종사가 되지 못한 인물, 우리네 수많은 지고 피는 꽃들 중의 하나가 바로 궁이다. 궁이는 일대종사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평범한 인물들인 우리네의 자화상이다.

 

  궁이는 엽문이라는 새에게 둥지 바깥에서 보게 된 아름다운 꽃 한 떨기이다. 그가 궁이를 거절할 것은 운명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궁이의 감정은 그들이 겨루는 무예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는 자의 시선에서 그들이 겨루는 무예는 화려한 동작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순간이 영원처럼 흐르고, 그들의 몸과 몸 사이로는 생각이 주고받아진다. 신체의 만남은 쉽게 넘어갈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경들끼리의 만남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것처럼 잠시의 스침이라도 그 영겁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이처럼, 궁이가 상징하는 것은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한 엽문에게 있어 극복해야 할 높은 무예의 산 중 하나였다. 궁이와의 경합에서 그가 낸 규칙대로 하여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고산 중 하나로 궁이와 같은 자들을 점찍었을 것이다. 무술의 세계로 나아간 엽문을 보며 장영성은 눈물짓는다. 그에게 다른 세계가 열린 것이다. 사진 속 거리는 그것을 보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사람의 변화를 견뎌내야 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엽문이 차차 발을 내딛던 중, 일제가 엽문의 도시로 들어온다.

 

  높은 자존심, 고고한 사생활의 평화는 깨진다. 아무리 안온한 둥지라도 거센 폭풍우에는 떠내려가는 법이다. 그것 역시 사회와 세상으로 나간 엽문이 배운 또 다른 천지의 이치이다. 대가 하나가 국을 저으며 때를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 개인은 바위로 내던져지는 달걀이나 다름없다. 엽문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가족의 삶이 깨지는 것을 막아보려 하지만, 새끼 새들이 뱀에게 먹히는 것을 어미 새가 막을 수 있느냐의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 엽문이 아무리 잘난 자라 하여도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혼돈 속에서 묵묵히 엽문은 자신의 무술 연습용 나무봉을 해체한다. 개인의 삶은 사회의 거친 혼란에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 사회의 혼란을 벗어나 편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자존심과 자부심을 파는 것이다. 자부심과 자존심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예이다. 중국인의 전통이요, 윗대로부터 내려온 공통의 무엇이다. 궁대인에게 궁가 64수의 힘을 물려받은 마삼은 그 길을 택했다. 아름다움을 물려받지 못한 그의 선택은 바로 변절이었다.

 

  마삼은 스승을 죽였다. 그는 스승이 남긴 초식의 비기를 듣고서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삼은 피가 끓는 열혈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핏 속에 담긴 혈기왕성함을 주체하지 못하는 힘 그 자체였다. 그에게 있어 세상이라 함은 그 본연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이치까지 파고들만한 자는 아니었다. 그가 거침없이 다른 사람들을 내리꽂는 것을 보라. 천지만물이 그에게는 자신의 힘을 증명할 수 있는 시험지에 불과했다. 그런 그에게 궁대인이 끊임없이 자제할 것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세상이란 한낱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둥벌거숭이에게 기다리라 한들 자제할 수 있다면 동물이 아니리라. 짐승을 길들이려 하였지만, 짐승은 곧 아가리를 벌려 아버지를 물어죽이고 표표히 떠나버린다. 그러나 짐승 마삼은 궁이에게 패배하는 순간 초식의 비기를 이해하게 된다. 돌아보는 것, 그것을 진부하고 늙은 자의 굼뜸이라고만 해석했던 그였다. 그러나 순간 뒤를 바라보는 것은 굼뜸이 아니라 더 높고 멀리 날기 위한 제 1조건이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에서 시선이 떠나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 그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 되면서 오히려 수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에게서는 아예 궁가의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궁이의 말대로 그것은 궁이가 되찾은 것이다. 마삼은 궁가의 것을 공유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는 자부심이란 없었다.

 

  그러나 궁이를 말린 노인들의 지적처럼, 궁이는 초라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천지와 중생을 보라고 가르쳤건만 그녀가 선택한 길은 사형과 사제끼리의 혈투였다. 궁가 64수의 아름다움과 힘이 서로를 헤친 것이다. 두 개로 나누어 무술을 보존하고자 했건만 하나의 욕심이 탑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궁이는 말한다. 궁가 64수가 없어진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없어지는 법이다. 니힐리즘에 빠진 궁이는 아편을 마셨고 결국 자신의 몸을 파괴한다. 아름다움만 있고, 힘은 없는 그녀는 세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녀는 결혼을 하여 자식도 낳지 못했고, 자신의 무술을 후세에 남기지도 못했다. 그러나 왕가위는 가련한 그녀를 비천하게 여기지 않는다. 배우 장쯔이에게 고고한 자존심과 기품을 선사하여, 궁이가 내린 선택을 마지막까지 조명한다.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는 아버지는 촛불을 하나 켜놓고 딸을 기다린다. 왕가위 감독은 우리 인간이 그렇게 간단히 감히 개인을 버리고 중생을 바라보는 삶을 선택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궁이가 복수를 한 것은 그녀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필시 그저 그것이 그녀다운 길이었기 때문이다. 궁이를 보는 것은 그러므로 엽문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엽문이 내린 선택과 정반대의 선택을 한 궁이, 그녀를 보는 것은 중국 최대의 위기 속에서 한 세상을 살아간 한 여인의 삶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녀는 남자로 태어날 수도 없었고, 일가를 이룰 수 없었다. 자신의 몸과 일가에 갇힌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쓴 바대로 평범한 인간의 길이다.

 

  무술에서 궁이는 수직이었지만, 삶에서는 수평이었다. 그렇다면 수직으로 꼿꼿이 살아가고 있는 엽문은 위기 이후 무엇을 하였는가?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자신의 핏 속에 남겨진 무술로 재기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술로 제자들을 일궈낸다. 다시 생명의 바람이 분다. 교육, 그것은 무엇인가? 교육을 다른 말로 정의내릴 수 있다면 번식일 것이다. 자신의 사상을 가진 자식들을 양육하는 것이다. 그 안에 핏줄이 다르고자 한다 하여도 그들은 같은 정신과 자부심을 소유한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의 스승에서 나온 이야기이며, 그의 스승이 말하는 바는 스승을 가르친 스승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엽문은 그러한 중국의 전통에서 자라고 난 사람이다. 그는 중생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삶에 천착하는 길로 치우치지 않았다. 영화 속 작은 비중으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일선천은 엽문과 다른 방향의 길을 걸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엽문과 큰 차이는 없다. 일선천은 평범한 비극의 삶을 상징하는 한 여인에게서 도움을 받고 살아난 독립투사요, 자신만의 일파를 이루기 위해 피를 튀기며 조직에서 나온 인물이다. 그들은 자신의 뜻에 감화된 자들과 사진을 찍는다. 그들은 어린 자들에게서 희망을 보며, 다음 세대를 기약한다. 사생활이 부서진 엽문이 자신의 고향인 불산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아마 아내를 잃은 그로서 지켜야 할 다른 가족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지켜야 할 가족은 요즘의 기업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가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같은 삶의 방향을 지향하는 동료들과 자식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을 믿고 따르며, 엽문은 그들 중생의 손을 잡고 이끌어가는 존재이다.

 

  『일대종사, 이 영화는 동양적, 중국적인 의식으로 보지 않으면 힘든 영화이다. 왕가위 감독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분명히 자신만의 서양적 미학으로 그림들을 그려낸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서양화적 시각과 색감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서구 문명의 상징인 기차가 압도적인 속도로 지나치는 그 바로 위태로운 옆에서 두 명의 중국 무술가들이 자신의 가치를 위해 싸운다. 왕가위는 우리의 현실을 포착한다. 바로 동양과 서양이 만난 역사의 최근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작품에서 서양적 아름다움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궁이와 마삼의 장면을 보지 않고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만을 본 것과 같다.


  왕가위를 읽기 위해서는 그가 홍콩인이라는 맥락을 읽어야 한다. 그는 촌스럽게 이 영화에 중국이 어떻고, 상황이 어떻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돌려서 말한다. 영상으로, 무술로, 물로, 장쯔이로, 양조위로 그려낸다. 하지만 그는 중국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홍콩인으로서, 중국의 위기에 봉착했던 그 시기 중국인이라면 무엇을 해야 했던 것인가를 엽문으로서 답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무술이 중국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무술은 단순히 경합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체의 수양이었다. 또한 오랜 전통으로서 지방색 역시 갖고 있다. 무술은 몸에 대한 이해요, 하나의 종파를 묶는 같은 움직임이다. 하나의 공통 기호이다. 그들은 그 기호를 근육과 움직임에 새기며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은 이 세상에 나서 개인으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가? 보았듯이, 동양의 정서는 거친 자연과 무한한 사람들 안에서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지 자기 자신만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연결되어 살아간다. 잘난 개인이 자기 자신만의 둥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숲 속에 만약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는데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 나무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우리의 정서로 본다면 그 나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 인간이 부모로부터 태어나 자기 자신만의 삶에서 살지 않고, 다른 의미의 가족을 일구고, 더 큰 사회의 어버이가 되는 것. 번식과 번식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고 만들고 다음 세대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로 왕가위 감독이 의미하는 일대종사’ The Grandmaster의 참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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